소설리스트

파공검제-420화 (419/508)

420. 미끼

한 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무림맹은 며칠간 고요한 날들을 보냈다.

정문에 효시되었던 묵천악의 머리도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봄꽃이 피기 시작했고,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맹을 상징하는 깃발이 흐느적흐느적 나부꼈다.

한가로운 오후.

하나 맹 내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평화로웠으나 내부에서는 온갖 갈등과 기 싸움이 팽배해 있었다.

말 그대로 칼만 뽑지 않았을 뿐이지, 기득권과 신흥 세력의 눈치 싸움은 살벌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

우선 남궁검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는데, 가장 먼저 안천길의 투옥으로 공석이 된 호법당주를 채웠다.

새로 임명된 호법당주는 바로 황산윤가의 윤첨산이었다.

이 뜻밖의 인사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윤첨산 본인과 그의 아들인 윤종승이었다.

두 사람은 무림맹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였다.

“승아!”

“아버지!”

무림맹 정문에서 서로를 얼싸안은 두 사람은 내내 싱글벙글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이 아비가 아들을 잘 둔 덕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하하.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친구를 잘 둔 것도 네 능력이 아니더냐? 네가 어렸을 때 남궁천과 함께 놀지 말라고 그리 다그쳤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나 자신을 혼내주고 싶을 지경이다.”

“하하, 우선 들어가시지요. 맹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맹주님은 평안하시더냐?”

“요즘 맹 내에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호법당주가 되셨으니 맹주님을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당연한 말이다. 이미 일전에 나는 맹주님께 맹세한 적이 있다. 본 가는 그 언제든 남궁세가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제가 다 든든합니다, 아버지.”

윤종승이 빙그레 웃었다.

윤첨산도 마주 웃어 보이면서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아들이 언제 이렇게 의젓하게 컸던가?

이 모든 변화에 남궁세가의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천이 아들을 변하게 만들었다.

“천이는 어디에 있느냐?”

“이제는 저보다 남궁천을 더 찾으시는 겁니까?”

“이 녀석아, 그래도 너를 이렇게 장성하게 만든 친구가 아니더냐? 만나면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

“서운하네요. 아버지만큼은 제가 잘나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뭐야?”

결국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은 맹주실을 찾아갔고, 이내 남궁검과 조우했다.

윤첨산이 포권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내려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윤 아무개가 부족한 실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맹주님을 돕겠습니다.”

“허허,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네. 요즘은 어찌 지내시는가? 황산의 사업은 잘되시고?”

“예? 아, 예.”

윤첨산의 얼굴이 곧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래전 윤첨산은 남궁세가를 찾아가서 몹쓸 짓을 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날 윤종승이 남궁천에게 한 방 얻어맞았고, 이에 격분해서 날뛰다가 자신이 오히려 아들을 때리게 되었던 일.

윤첨산은 남궁검이 그날의 일을 은근히 잊지 않고 지적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 그것이 질책이라기보다는 농담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미안한 감정이 일어났다.

“덕분에 잘되고 있습니다. 일전에는 제가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윤첨산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치자,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 과하게 반응할 일은 아닐세. 나 또한 이젠 잊으려고 하네. 그보다 호법당주는 맹에서도 요직일세. 자네가 잘 이끌어주길 바라네.”

“물론입니다.”

“참, 윤 가장의 일은 어찌 정리했는가?”

“첫째 녀석에게 가주 자리를 위임하고 왔습니다.”

“그렇군. 하긴 자네 가문을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하군.”

남궁검이 우스갯소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는 현재 남궁표가 전적으로 가주 대리를 맡고 있었다.

남궁검이 윤첨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맹의 요직에 앉게 되면 많은 것들이 변할 걸세. 이제 자네를 보며 웃는 자들보다 우는 자들이 많아질 걸세.”

“제가 아둔하여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차차 알게 될 걸세. 첫째로, 자네는 그 울음을 마주할 때 절대로 우월감이나 희열을 느껴서는 안 될 걸세.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걸세. 둘째로, 자네는 여전히 자네를 보며 웃는 자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걸세. 이 두 가지만 명심해도 성공한 수장이 될 수 있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윤첨산이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남궁검의 말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가 있었기에.

그리고 언젠가 이 말을 되새길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윤첨산이 고개를 들고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호법당의 최대 일선 조직은 청랑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 청랑단주는 내정이 되었는지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왜? 자네 아들이길 바라는가?”

“그럴 리가요. 물론, 아비로서 자식이 그만큼 장성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아직은 승아가 그 정도의 그릇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과한 욕심은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맡은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하길 바랄 뿐입니다.”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는 확실히 변하고 있군.”

“감사합니다, 맹주님.”

윤첨산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대꾸했다.

남궁검이 곧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청랑단주가 될 자는 지금 적랑단주가 만나는 중일세. 그가 받아들인다면 청랑단주까지 오늘 다 구성될 걸세.”

* * *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요?”

악후가 남궁천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딱히…… 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동생 일은 유감으로 생각하오.”

“유감? 내 동생을 죽이고서 하는 말이 고작 유감?”

악후가 잡아먹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서는 금방이라도 피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였다.

남궁천은 시종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악후를 마주 보았다.

“감정적으로는 내가 원망스럽겠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거요.”

“이해? 전혀.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소. 최근 당신을 보면 무림맹주가 오래전부터 비리를 저질러 왔고,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요. 한데 그딴 자를 구하기 위해서 내 동생을 죽였지.”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소. 맹주를 구하는 것과 별개로 악굉은 이미 폭멸고를 복용하여 죽을 운명이었소.”

“그걸 지금 말이라고! 차라리 동생이 맹주와 함께 자폭을 했더라면 개죽음으로 기억되진 않았을 터!”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아시잖소? 어차피 그때 맹주가 죽었다면 그간의 비리를 낱낱이 밝히기도 어려웠을 거요. 오히려 맹주에 대한 추모 물결이 이어졌을 테고, 산동악가는 위상이 추락했을 거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악후는 남궁천의 말을 곧이곧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더욱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다 좋소. 하나 당신들은 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흑무련과 손을 잡았소. 그런데 이젠 나를 청랑단주로 임명하겠다? 원수와 손을 잡은 자와 어찌 협력하란 말인가!”

쿠웅!

악후가 이어붙인 삼절창을 바닥에 찍자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마침 뒤에 서 있던 제일대주 손우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아앙!

비량과 진소홍이 차출되면서, 손우곤이 제일대주가 되었고, 유현과 팽수혁, 그리고 윤종승과 당우기가 네 개의 조직을 나눠 맡았다.

원래 부단주였던 당우기는 애초에 묵천악이 욱여넣기로 만든 자리였기에 자발적으로 오 대주의 자리로 물러난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손우곤이 살벌한 기운을 풀풀 휘날리는 중에도 악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를 드러냈다.

“흥! 하늘이 두 쪽 나도 네놈과 손잡지는 않을 것이다! 내 언젠간 동생의 원수를 갚을 테니…….”

“거, 답답한 사람일세.”

결국 남궁천도 겸손한 자세를 풀고 짝다리를 짚었다.

도저히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자, 절로 본능적인 행동이 드러난 것이다.

악후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답답하다고 했소.”

“답답하다? 동생을 잃은 자의 분노를 그리 표현하다니. 대체 네놈은…….”

“그 분노가 갈 방향이 너무 이상하잖아.”

“뭣이?”

“흑무련으로서는 자신들을 죽이겠다며 달려드는 적을 처리했을 뿐이오. 그러지 않았다면 모가지 내밀고 ‘가져가세요’라고 말해야 했을까? 아, 물론 흑무련도 좀 잔인한 방법을 쓰긴 했소. 이왕이면 무인답게 깔끔하게 목을 썰어버리면 좋았겠지. 그런데 사파의 방식이 좀 지저분하다는 건 알고 있지 않소? 지금 당신의 분노는 묵천악에게 향해야지. 동생을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가 묵천악이었으니까. 애초에 무림맹이 지원군을 보냈더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

“하지만 묵천악은 이미……!”

“죽었지. 그래서 갈 곳 잃은 분노를 지금 흑무련에게 쏟아붓는 것 아니오? 그리고 흑무련은 좀 덩치가 크니까 당장 눈앞에 있는 내게 쏟아붓는 것이고.”

“……!”

“칼에 찔렸다고 칼날을 미워하면 되겠소? 칼자루 쥔 놈을 미워해야지.”

악후가 어금니를 꽉 씹었다.

사실 남궁천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미운 것은 묵천악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남궁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긴 하다. 만약 남궁천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동생은 죽어서도 손가락질을 받으며 지탄받았을 거다.

다만 동생을 그렇게 악용한 흑무련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악후가 창대만 꽉 말아 쥔 채 서 있자, 남궁천이 담담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선택은 당신 몫이오. 그렇게 원망만 하면서 살 건지, 이참에 기울어져가는 가문을 다시 한번 세워볼 것인지. 맹주님이 같은 처지에 있었던 적이 있었기에 한 번 기회를 드리는 거요.”

물론 마지막 말은 절반의 거짓이 섞여 있었다.

오히려 남궁검은 악후를 청랑단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다소 의문을 표했으니까.

“악후를 청랑단주로 추천한다고?”

“예, 할아버지.”

“이유가 무엇이냐?”

“가장 큰 이유는 대외적으로 보이기에 좋다는 겁니다. 현재 천응대와 천우당, 그리고 호법당까지 측근으로 임명하게 되면, 제법 보이지 않는 반발이 있을 겁니다. 이럴 때 한 번쯤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는 것도 논란을 잠재우기에 좋을 겁니다. 만약 악후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본 맹이 소외될 뻔한 가문까지 챙기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호오.”

남궁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만 보면 남궁천이 인생 살 만큼 살아서 정치질을 꽤나 해본 사람 같지 않은가?

“알겠다. 산동악가는 너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진 않을 거다. 이유야 어쨌건 악굉이 네 손에 죽었으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그런 자를 품어야 반발을 잠재울 수 있겠죠.”

“오냐, 한 번 해보거라.”

“예, 할아버지.”

그렇게 남궁천은 악후를 불렀고, 악후는 지금 갈등 중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조급하지 않았다.

결국 악후는 청랑단주 자리를 받아들일 것이기에.

일선 조직 중에서도 가장 권한이 막강한 곳이 바로 적랑단과 청랑단이다.

악굉이 오명을 쓰고 죽으면서 자칫 기울 뻔했던 가문이 이 기회에 다시 솟아오를 기회이기도 했다.

남궁천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 기회는 악굉이 형님께 드리는 거라고 생각해 주시오.”

“……!”

말 한마디가 무엇이기에.

악후는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마치 남궁천 곁에서 악굉의 혼이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같다.

마침내 악후가 한숨을 얕게 내쉬며 답했다.

“좋소. 받아들이지. 하나…….”

“……?”

“흑무련과 사이좋게 지낼 자신은 없소.”

“거기까진 바라지 않소. 그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 주시길.”

“산동악가는 신의를 저버리진 않소.”

악후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때였다.

콰당!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당우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단주! 당장 사천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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