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19화 (418/508)

419. 미끼

“마교라.”

남궁검이 창밖을 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후원에는 벌써 매화의 순이 돋아서 금방이라도 꽃을 피울 것만 같은 날씨였다.

“적랑단주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단주가 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세운 공을 따지자면 역대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바로 총관이었다.

총관은 남궁검의 찻잔에 찻물을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뇌옥에서 죽은 죄수들까지 신경 쓸 것이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흐음.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자네는 어떤가?”

“예?”

총관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남궁검이 자신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심연의 바닥까지 꿰뚫어보겠다는 눈빛이다.

‘대단하군.’

눈빛만으로 상대를 이렇게 기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나 자신은 은마령이다.

이 정도로 속내를 드러낼 만큼 심지가 약하지 않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은마령이 아닌가?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제가 아둔하여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남궁검이 시큰둥하게 말하더니 곧 본론을 꺼냈다.

“자네는 오랫동안 묵천악을 모신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자네는 팔옥각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나? 나는 그걸 물어본 것일세.”

“그런 뜻이었군요. 하나 제가 전임 맹주의 모든 계획과 뜻을 알고 있진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묵천악은 워낙 세심한 성격이었고, 타인을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제게도 숨기는 것이 많았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남궁검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총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건가?

달리 말해서 아닐 수도 있겠다는 말.

남궁검은 자신을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상관없다.

그 정도의 의심은 감수하고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자신은 묵천악과 함께 어두운 시기에 영광을 누렸던 총관이 아닌가?

게다가 마지막에는 주인이나 다름없는 묵천악을 배신했고.

그런 와중에 다시 총관이 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은마령이다.’

결국 녹아든다.

적서는 이름이 없다.

어디에든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디든 존재하는 곳에서 온전한 정체성을 가진다.

지금은 그저 총관이다.

결국 신임 맹주는 언젠간 자신을 믿게 되리라.

자신이 그리 행동할 테니까.

그게 가능하도록 만드는 게 바로 은마령이니까.

남궁검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맹 내에 누굴 믿어야 하고, 누굴 믿으면 안 될지 아직 확신이 서질 않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조심하셔서 나쁠 것이 없습니다.”

“옳은 말일세. 해서 백옥지단의 일을 우선 사천당가에게 맡겨두었네. 맹 내 조직을 파견하기에는 아직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은 만큼, 이왕이면 이전부터 나와 친분이 있던 당가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지.”

“확실히 그건 예상치 못한 부분이군요.”

총관이 솔직하게 말했다.

실제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남궁천이 직접 갈 줄 알았는데, 당가를 보낼 줄이야.

하긴 신무 지역에서 가까운 사천이니까 당가가 이동하기에는 크게 부담이 없으리라.

남궁검이 총관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자네 생각에는 이 결정이 어떤 것 같나?”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것은…….”

“걱정되는 것은?”

“만약 총군사님의 추측이 정확하다면, 당 가주가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라리 정말 귀신이라면 당가가 어떻게든 해결할 것 같으나, 마교가 개입되어 있다면 방심은 금물일 것입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이럴 때 보면 총관은 정말로 무림맹에만 충실한 자 같지 않은가?

하지만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만약 총관이 마교의 간자라면, 묵천악조차 속인 것이 틀림없다.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도 속였다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리라.

“하면 자네 생각에는 어찌 대처하는 게 좋겠나?”

“이미 당가를 파견한 이상 소식을 기다려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장 빠른 전서를 이용한다면 조만간 소식이 전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대책은 이후에 세워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군.”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곁에 서 있던 총관은 침묵이 길어지자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 또한 총관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어색하지 않다.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없어야 할 곳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때론 그가 공기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러다가도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 찾으려고 하면, 어느새 바로 옆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

어쨌거나 총관이 그렇게 조용히 실내를 나가려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더니 이내 장로원주 우위광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우 원주님?”

총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우위광은 곁눈질을 한 번 하고는 성큼성큼 실내 복판까지 걸어왔다.

“맹주! 도대체 이게 어찌 된 거요?”

“무엇이 말입니까?”

남궁검이 우위광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창밖만 보며 대꾸했다. 그 홀대에 우위광이 내심 발끈했지만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화를 눌렀다.

“팔옥각주에게 들었소! 백옥현으로 조사를 보낸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그것도 맹 내 조직을 파견하는 게 아니라, 사천당가에게 부탁을 했다던데!”

“사정이 그리됐습니다. 우선 시급한 문제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맹의 일을 어찌 사천당가에게 부탁한단 말이오? 차라리 사천의 다른 지단주에게 명을 내려도 될 것을!”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시던가!”

“…….”

이윽고 남궁검이 말을 멈추고 차디찬 시선을 우위광에게 던졌다.

흠칫거린 우위광이 어금니를 꾹 씹었다.

‘뱀처럼 사나운 눈빛이로군! 흥! 그런다고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은가!’

확실히 우위광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남궁검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우위광이 마다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서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남궁검이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맹주가 그런 일까지 장로원에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혹시 장로원이 팔옥각에서 일어난 일과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갈! 맹주께선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오! 누가 들으면 오해라도 할…….”

“그럼 우선 지켜보시지요.”

“맹주.”

“…….”

“갑자기 팔옥각을 들쑤시는 것은 혹시 흑무련 때문이오?”

“……?”

남궁검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우위광이 냉랭하게 웃었다.

“흑무련이 맹주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소. 하나 그들의 이간질에 놀아나서야 되겠소? 그들은 본 맹에 머무르면서 맹주를 만나 온갖 이간질을 다 할 거요. 그때마다 내부에서 칼질이나 한다면 어찌 본 맹이 바로 서겠소?”

이건 대놓고 맹주를 무시하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남궁검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흑무련하고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조사를 해보고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지요.”

“그걸로 끝이오?”

“하면?”

“이렇게 동료를 믿지 못하고 내부 칼질을 해댔으면, 어느 정도 책임이라는 걸 져야 하지 않겠소?”

“어찌 책임을 지길 바랍니까?”

“마교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내부 칼질이나 하는 맹주를 맹원들이 믿을 수 있겠소?”

“자리에서 물러나란 말씀이군요.”

“그만큼의 책임은 각오해야 한단 말이외다.”

남궁검이 싸늘한 눈으로 우위광을 보다가 답했다.

“이런 엄격한 잣대로 그간 묵천악은 어찌 그리 맹신하셨는지. 재미있군요.”

“그건……!”

우위광이 발끈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다. 아니, 오히려 한통속이라고 내몰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인가?

우위광이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마침 낭랑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책임지면 되죠.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가진 장로원이 있으니 더없이 든든합니다.”

실내로 들어선 자는 바로 남궁천이었다.

우위광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이상하게 남궁천만 보면 이젠 모종의 불안감이 싹튼다.

‘저 녀석이 나서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하나 따질 건 따져야 하지 않겠나?

“갑자기 그리 자신만만하게 구는 이유라도 있는가?”

우위광의 질문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있죠.”

“뭔가?”

“전에 백묘라는 여인을 보셨죠? 본 단이 생포한 마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남궁천이 씨익 웃더니 남궁검을 보며 말했다.

“다 불었습니다. 용취곡에 마교의 분타가 있다고요. 그뿐만 아니라 직접 분타가 은둔한 지역으로 안내까지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

깜짝 놀란 우위광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로 그 여자가 다 까발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만.”

“내 알기로 마인은 죽으면 죽었지, 함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오오, 그런가요? 마인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그런데 그 여자는 아픈 게 싫은가 봐요. 여기저기 고문을 좀 했더니 술술 불더라고요. 아니면, 직접 한 번 만나보시겠어요?”

남궁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우위광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 누굴 엮으려고!’

생각을 갈무리한 우위광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됐네. 마교 분타를 찾았으니 다행인 거지.”

“역시 그렇죠? 이제 당가의 소식만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그럼 팔옥각주는 목 길게 빼고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원주님.”

“왜 내가……?”

“아? 두 분 서로 친한 거 아니었어요?”

“그런 것 없네. 나는 그저 내부 칼질을 멈춰 달란 뜻이었을 뿐.”

우위광이 변명을 하면서도 스스로 구차하단 생각에 이가 갈렸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총관의 눈빛이 일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그 변화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았다.

* * *

“헉, 헉, 헉……!”

피투성이가 된 무인 한 명이 쓰러질 듯 말 듯 달렸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신발은 다 해졌고, 옷가지는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졌다.

마침내 그는 저만치 당가를 발견하고는 마지막으로 젖 빨던 힘까지 짜내어 달렸다.

그렇게 당가의 정문에 도착한 그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풀썩 쓰러졌다.

콰당……!

“헉, 무, 무슨 일이야?”

“엇? 자네는……!”

수문무사들이 사내를 알아보고는 얼른 일으켜 세웠다.

쓰러진 무인이 가슴께를 쥐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무…… 물을 좀……!”

“잠, 잠깐 기다리게!”

“가서…… 소가주님을……!”

잠시 후 수문무사 하나가 후다닥 가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물을 한 바가지 들고 와서 만신창이가 된 무인에게 들이밀었다.

“자, 어서 마시게!”

무인이 바가지에 코를 처박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사이, 장내에서 당예설이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냐!”

“헉, 헉, 헉……!”

가까스로 목을 축인 무인이 당예설 앞에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소가주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가주님을 비롯한 당가의 무인들이 모두 실종되었습니다! 저 혼자 간신히 살아남아 돌아왔습니다!”

“그럴 수가…….”

당예설이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섰다.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말했다.

“어서…… 무림맹에 전서를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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