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미끼
콱!
백무극이 자신을 찌른 남자의 복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을 것처럼 아찔한 고통이 뇌리를 들쑤셨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어 복면을 찢어냈다.
촤아악!
복면이 찢어지면서 달빛 아래로 상대의 얼굴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다음 순간 백무극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너…… 네가 왜……?”
놀랍게도 자신을 찌른 상대는 남궁천이 아닌가?
백무극이 말을 마저 잇기도 전에 남궁천이 검신을 뽑아냈다.
촤아아악!
“크억!”
벽라검이 뽑혀 나오면서 핏물을 뿌린다. 곧이어 남궁천이 비틀거리는 백무극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휙 들어 올렸다.
“엄살 떨지 마, 이 새끼야.”
“크윽!”
“너 이 새끼, 왜 그랬냐? 왜 몸까지 던져가면서 막아서고 지랄이야?”
남궁천의 살벌한 욕설에 백무극이 오히려 모를 표정이 되어 반문했다.
“너야말로 왜……? 아무리 저 영감탱이가 싫다고 해도 네 외조부인데…….”
“시끄러워, 이 새끼야. 누굴 보고 영감탱이래? 건방지게.”
철썩!
남궁천이 뺨을 후려치자, 백무극의 신형이 그대로 튕기면서 벽에 처박혔다.
흉흉한 살기를 피워대던 살수들은 어느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백무극으로서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새끼라니까.”
남궁천이 싸늘한 소리를 뱉어내고는 돌아서자,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고는 다가왔다.
“어떠냐?”
“솔직히 아직도 마음에 안 들긴 합니다.”
“흐음. 그래도 조금 심하게 대했구나.”
담담하게 말을 꺼낸 남궁검이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 처한 백무극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가 백무극 앞에 쪼그려 앉고는 친히 점혈을 해서 피가 멎도록 해주었다.
상처를 대략 살핀 남궁검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와중에 요혈을 피해서 피해를 최소화했구나.’
정말이지 손자의 무위를 알면 알수록 혀가 내둘러진다.
최근 깨달음을 얻으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남궁검이었다.
한데 남궁천의 섬세한 일격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또 겸허한 마음이 생긴다.
남궁검은 백무극에게 비상약을 먹이고는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궁천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아,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저 새끼는.”
“마치 동생이 막 생겨서 질투하는 아이 같구나.”
“뭐라고요? 제가요? 왜 때문에요?”
남궁천이 어이가 없다는 듯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펄쩍 뛴다.
하지만 남궁검은 딱히 대답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남궁천이 다시 뭐라고 하려는데, 남궁검이 앞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더냐?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야 가능하다고. 내 보기엔 조금 전의 백무극이 딱 그런 상황 같았다.”
“하아.”
남궁천도 그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백무극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상황만 놓고 보면 저 두 사람이 애초에 짜고 행동한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자신을 죽이려고? 그렇다고 해도 맹주까지 나서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사실 백무극으로서는 맹주와 남궁천이 따로 나눈 대화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키는 건 본능처럼 해야 합니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헤엄을 못 치는 어미도 반사적으로 몸을 던지는 것처럼요. 할아버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호신위는 기꺼이 목숨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백무극은 머릿속에서 저 혼자 싸우느라 볼 일 다 볼걸요?”
“그럼 너는 어떠냐?”
“뭐가요?”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느냐?”
“당연합니다.”
대답은 남궁천도 놀랄 정도로 곧장 튀어나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뿐더러 그 대답이 너무나 건조해서 낯간지러운 느낌조차 없었다.
“그래서 안 된다.”
“예? 뭐가요?”
“그런 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호신위를 구해야 한다. 너는 나를 위해 목숨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무엇보다 네 목숨을 우선해야 한다. 너는 이제 누군가를 대신해 목숨을 버릴 위치가 아니다.”
“…….”
“너는 백도무림의 신룡이다. 너는 본 가의 소가주다. 너는 강호의 미래이자, 본 가의 미래다.”
“……!”
남궁천이 눈만 끔뻑이며 남궁검을 보았다.
역시 이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어색하기만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하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공적에서 이젠 천하에서 가장 귀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네가 이 늙은이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속히 호신위를 뽑아야 한다.”
“그렇다고 왜 하필 백무극입니까?”
“말했다시피 그 아이가 널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아비를 닮았기 때문이다.”
“……!”
“총관을 통해서 그 아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아이는 지금 삶의 목적을 잃은 아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방향을 잡을 때까지 그 삶의 목적이 내가 된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느냐?”
잠깐의 상념에서 빠져나온 남궁검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어떠냐? 이 아이는 오늘 삶의 목적이 내가 되었다.”
“칫! 오늘 하루 이 녀석에게 잘해줬잖아요. 그 영향일 수도 있죠.”
“잠깐의 호감을 살 수는 있었을 지도 모르지. 하나 목숨을 사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 것이다. 마음이 없는 곳에 생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하아.”
남궁천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쓰러져 있는 백무극을 보았다.
“정말 저 녀석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마음에 든다.”
“아아, 전 모르겠습니다, 이제! 할아버지 뜻이 정 그러시다면 따라야죠, 뭐!”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고는 남궁천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라. 백무극을 가까이에 두지만 너에게도 늘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 아니! 누굴 애, 애정결핍으로 보시는 겁니까?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허허. 안다, 알아.”
남궁검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움찔거리고는 돌처럼 굳었다.
“응? 왜 그러느냐?”
“아뇨…… 이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그랬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궁검은 어느새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넘어가죠.”
그러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백무극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크윽! 왜……!”
“잘 들어, 이 새끼야. 너 앞으로 맹주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내 손에 뒈지는 거야. 알았어?”
“그게 무슨……?”
“어우, 이 눈치도 없는 새끼가 앞으로 어떻게 호신위를 한다고…….”
“……호신위?”
“쳇!”
혀를 찬 남궁천이 거칠게 손을 밀어내자, 백무극이 다시 벽에 부딪치며 울컥 피를 토했다.
“커윽!”
남궁천은 여전히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백무극을 사납게 노려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려무나.”
“그리고, 너.”
남궁천이 싸늘한 눈초리로 백무극을 보았다.
“……?”
“내 앞을 막을 때의 눈빛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항상 그런 태도로 임해라. 네 목숨을 걸고 지켜도 될 만한 분이시다. 네 인생의 목적이 되어도 좋을 만한 분이란 말이다.”
“…….”
멍한 표정의 백무극을 두고는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렇게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남궁검이 쓴웃음을 짓고는 백무극에게 다가왔다.
“이해하게. 저 녀석이 워낙 성격이 저 모양이니.”
“……예.”
백무극이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대략 정리해보았다.
이쯤 되니 눈치가 없는 그도 대충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호신위라니…… 내가 맹주님의?’
생각을 하는 사이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가? 내 호위가 될 생각이 있느냐?”
“저…… 로 괜찮겠습니까?”
“자네라서 택한 걸세.”
백무극이 여전히 실감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답했다.
“시켜만 주신다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피식.
남궁검의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살짝 걸렸다가 사라졌다.
남궁검이 품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리 딱딱한 격식은 차리지 말게. 뭐든 부드러워야 하는 법. 이제부터 자네와 나는 한마음, 한 몸이 되어야 할 걸세.”
말을 마친 남궁검이 품에서 수실을 꺼냈다.
오늘 저잣거리를 다니면서 보부상에게 산 것이었다.
“이건 내가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네.”
남궁검은 주름진 손으로 백무극의 도파에 손수 수실을 매어주었다.
“선물…….”
낯선 단어에 백무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수실을 잘 매듭지은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무극을 마주 보았다.
“앞으로 너는 나를 지켜보아라.”
“…….”
“나는 너를 지켜보마.”
“…….”
“우리 서로를 지켜보자꾸나.”
뒤늦게 백무극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모종의 기운에 감정이 북받치기 시작했다.
낯선 감정이었다.
이것이 충성심인가? 아니면 애정인가? 그도 아니면 무엇인가?
어쨌거나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잠시 후 백무극은 그 감정이 이끄는 대로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손을 바닥에 짚고는 온 마음을 다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맹주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 * *
남궁검과 백무극을 먼발치 지붕에서 바라보던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날 닮은 녀석이라.”
확실히 백무극은 전생의 자신과 상당히 닮은 인생이다.
거짓된 강호 평화를 위해 운명이 뒤틀려 버린 자.
묵천악으로부터 쓰임새만 달랐지, 그 결은 같은 셈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또 백무극에 대한 생각이 묘하게 변하긴 한다.
다소 복잡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데 마침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남궁천이 돌아서니 한 인영이 날렵하게 내려섰다.
“주군, 부상자 스물셋입니다.”
보고를 올린 자는 비료단주였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수고했다. 오늘도 너희들은 강호 평화를 위한 거름으로 거듭났구나. 이렇게만 해라. 삶의 가치는 그렇게 올리는 거다.”
“예, 주군.”
“부상자들은 신룡객잔 지점으로 옮겨서 치료하고, 따로 명이 떨어질 때까진 대기하도록.”
“존명.”
대답과 동시에 비료단주가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과연 살수의 수장다운 움직임이었다.
잠시 후 다시 그곳에 다른 인영이 사뿐히 내려섰다.
“여기 있었구나.”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천응대주 비량이었다.
그가 남궁천 곁으로 걸어와 먼발치의 남궁검과 백무극을 보았다.
“보기 좋네.”
“보기만 좋아서는 될 일이 아니죠.”
남궁천이 어딘지 부루퉁하게 말하자, 비량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무극이라면 잘할 거야. 특유의 환술이 호신위로 지낼 때도 많이 도움이 될 테고. 딱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데?”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런데 대주님은 왜 제자리에 안 계시고, 여기에 오신 겁니까?”
“허어, 할아버지가 맹주님이라고 지금 날 갈구는 거야?”
“…….”
“하하. 농담. 일단 뭐가 나와서 말이지.”
“뭐죠?”
“일전에 네가 말한, 뇌옥에 갇힌 죄수들이 죽어 나가는 사건. 조사하다 보니 좀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