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검증
남궁검이 걸음을 멈추자 백무극이 앞으로 나서며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다.
휘이이이잉.
적막한 골목에서 검은 바람 한 줄기가 머리카락을 스친다.
바람결에 살기가 묻어 있다.
‘살수……!’
틀림없다.
이 기운은 살수가 품는 것이다.
오로지 죽음만을 그리는!
살기가 향한 곳은 등 뒤에 선 남궁검이다.
머릿속에서 일극의 희열이 들려온다.
‘이야, 이거 한바탕 신나게 설치게 됐는데?’
‘방심하지 마. 맹주님을 지켜 드리는 게 우선이야.’
‘저 영감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설마 저녁 먹을 때 밥그릇에 고기 한 점 올려 준 걸로 뿅 간 거냐?’
‘그럴지도 모르고.’
백무극의 무감한 대꾸에 일극이 의외라는 듯 말을 멈췄다.
백무극은 해가 저물 무렵 객잔에서 맹주와 함께 먹은 저녁 식사를 잠깐 떠올렸다.
“먹어라.”
무심한 듯 던진 말. 아니, 결코 무심하지 않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에 날카로운 눈매였지만, 자신의 밥그릇에 고기 한 점을 올려주는 손길은 따스함이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온정이 깃들어 있었다.
말투는 무심해 보이되 행동 하나하나에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기에 처음에는 등줄기를 타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기분 나쁜 소름은 아니다.
뭔가 전율하게 만드는 소름이다.
일극의 말대로 정말 그 행위 한 번에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한 것인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남궁검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오늘 하루뿐이었지만, 백무극은 맹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부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아아앙!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백무극이 칼을 뽑아 들고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음침한 골목길이 살아 있는 생물의 일부 같다. 마치 괴물의 식도로 들어온 느낌이랄까?
꿈틀……!
골목 전체가 이지러지면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찰나!
피피피이잉!
사방에서 세침이 날아든다.
백무극이 일순 보법을 밟으며 물러나서는 칼춤을 추었다.
휘리리리릭!
띠디디디이잉!
세침이 도기에 휘말리면서 사방으로 튕겨 날아간다.
파밧! 쉬에에엣!
어둠 속에서 살기와 함께 살검이 날아든다.
온통 시커먼 옷을 입은 복면인은 곧장 남궁검의 목을 향해 검신을 뻗었다.
“어딜!”
백무극이 일갈을 터뜨리면서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스까앙!
검신이 튕겨 나가면서 살수가 주춤 물러난다. 하나 백무극은 그자에게만 신경을 둘 수 없었다.
어느새 반대쪽에서 벽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것 같더니 거짓말처럼 복면인이 나타나며 남궁검의 배후로 짓쳐들었다.
“죄송합니다!”
백무극이 남궁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반동을 이용해 날아갔다.
쒸이이잇! 까아앙!
불꽃이 터지면서 금속성이 터진다.
“큽!”
살수가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번에도 상대의 반응을 살필 겨를은 없다.
슈슈슈슈슈슈슉!
순간 밤하늘이 새카맣게 물든다.
검은 비가 마구 떨어져 내리는 듯하다.
순간 백무극이 갈지자로 보법을 밟으면서 다시 한번 칼춤을 추었다.
슈따다다다당!
순식간에 수십 자루의 검신이 튕겨 날아간다.
살수들의 대열이 흐트러진 것을 확인한 백무극은 바닥을 차기가 무섭게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도기를 뿌렸다.
까가가가가강!
파바바밧!
츠츠츠츳!
살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몇몇 살수들은 가슴과 어깨를 베인 것인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곧 동료에게 도움이 안 될 거라 판단한 것인지 어둠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이러한 일련의 동작들이 무척이나 정교하고 신속했기에 백무극은 이 싸움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스스슷.
살수들이 묘한 보법을 밟더니 은신술을 함께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복면을 쓴 살수들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이쯤 되니 지켜보는 자로서는 어느 형상이 진짜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이는 최근 강호 살수들이 익힌다는 귀보법(鬼步法)이었다.
일종의 분신술과 비슷하지만 그 원리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분신술은 대개 신형을 빠르게 움직여서 그 잔상을 남게 하는 방법이지만, 귀보법은 주변의 지형과 사물들을 이용하여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방식이다.
어쨌거나 은신술의 일종이기에 귀보법에 대응하다 보면 마치 자신이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착각을 겪게 된다.
하지만 백무극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극이 속으로 씨익 웃으며 뇌까렸다.
‘이것들이 재미있는 걸 보여주네? 무극, 우리는 더 재미있는 걸 보여주자.’
‘그래.’
백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귀신처럼 일렁이는 적들을 한 차례 스윽 훑어보았다.
그 순간 살수들의 보법이 일순 흐트러졌다.
일극이 재미있다는 듯 속으로 낄낄거렸다.
‘킥킥, 감히 누구 눈을 속이려고 들어? 우리가 환술을 익혔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가자, 일극!’
‘좋아, 이제 내가 설쳐주지!’
다음 순간 백무극이 적을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해 들어갔다.
쉬쉬쉬쉬이잇!
촤악! 촤촤악! 촤악!
잠시 보법이 흐트러진 살수들은 순식간에 백무극의 도격에 당하면서 피를 뿌리며 몸을 뒤집어갔다.
털썩, 털썩!
비명도 지르지 않고 쓰러지는 살수들을 보니 마치 짚단으로 만든 인형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남궁검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들의 뒤를 캐내야 할 테니 죽이지는 말아라.”
남궁검의 말에 백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미럴! 목숨 걸고 달려드는 새끼들에게 손속 봐주며 상대하라니! 영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철썩!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백무극이 제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방금은 제가…….”
“안다.”
“명 받들겠습니다.”
백무극이 무뚝뚝하게 말을 뱉어내고는 살수와 부딪쳐갔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었다.
조금 전 백무극이 팔을 잡아당겼을 때, 남궁검은 골목 벽에 등을 댄 상황이었다.
때문에 부채꼴로 펼쳐진 적들을 백무극이 종횡무진하며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혼자 조금 시끄럽긴 했다.
“아오, 이 개 같은 것들! 도대체 어디 살수 새끼들인데 이렇게 끈질겨? 이런 것들을 죽이지도 말라니! 정말 저 영감탱이 취미가 너무 고약……!”
철썩!
“닥쳐.”
“이 병신아, 왜 날 때리고 지랄이야? 싸움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니까 닥치라고. 조용히 싸워, 그냥.”
“뚫린 입으로 맘대로 지껄이지도 못하냐? 막말로 저 영감탱이가 다 죽여 버리라고 했으면 영감탱이도 살기 쉽고…….”
퍽! 퍽!
다시 주먹으로 제 얼굴을 때리는 백무극.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궁검이 희미하게 숨을 내뱉었다.
‘으음. 가끔은 일부러 저러는 것 같다는 천이의 말이 이해가 되기도…….’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살수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백무극의 체력에 조금씩 한계가 생겼다.
깡! 스캉! 피츗! 촤악!
“크읍!”
어깨와 옆구리를 얕게 베인 백무극이 신음을 뱉으면서 휘청거렸다.
“괜찮으냐?”
남궁검의 말에 백무극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길을 뚫겠습니다. 제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그러마. 뒤는 내가 처리할 테니 너는 앞만 보고 가라.”
“그럼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무극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무섭게 달려 나갔다.
“으아아압! 비켜라, 이 개새끼들아!”
슈카카카카캉!
백무극이 무아지경에서 칼을 휘둘렀다.
아직까지는 환술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상대의 공격에 시간차가 생기는 것을 최대한 이용해 빈틈을 노렸다.
촤촤촤촤촤악!
섬뜩한 파육음이 연이어 터지면서 살수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져 갔다.
그렇게 골목을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백무극은 무림맹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림맹은 너무 멀다.
이대로 달아나긴 어려우리라.
대신 점점 좁아지는 골목에서 막다른 곳을 향해 더 깊이 들어갔다.
마침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백무극이 미끄러지듯 멈춰 서며 돌아섰다.
촤츠츠츠츠츳!
백무극의 뒤로 남궁검이 물러났다.
타다다다닷!
뒤를 쫓아온 살수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백무극과 마주 보며 섰다.
백무극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도신을 혀로 핥았다.
“후우, 흐흐흐. 이제 좀 더 재미있게 싸우겠네.”
그 모습이 어딘지 광기를 머금은 듯해서 지켜보는 이가 오싹할 지경이었다.
스스슷……!
다음 순간, 백무극의 신형이 귀신처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묘한 보법이었다.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보법이 아니라 백무극의 특기인 환술이었다.
느린 듯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바로 지척에 와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츄아악! 촤촤촤악!
“크억!”
“악!”
워낙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다 보니 살수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백무극을 피해서 남궁검을 바로 노리고 달려들면, 어김없이 그 앞을 막으며 나타났다.
정말이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상황.
촤악! 슈까앙! 촤악!
살수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져갈 때였다.
쉬이이이이잇!
한 줄기 바람이 살수들 사이로 짓쳐들었다.
낌새를 챈 백무극이 흠칫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질풍처럼 달려든 복면인이 검을 무겁게 내질렀다.
쒸에에에엑!
쩌어어어엉!
촤츠츠츠츠츠츳!
“크읍!”
도를 눕혀서 검봉을 막아낸 백무극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신음을 삼켰다.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고 양팔이 저릿하게 울려온다.
손을 뻗어 백무극의 등을 받쳐준 남궁검이 넌지시 물었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담담하게 대꾸한 백무극이 느닷없이 나타난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상대 역시 살수를 펼쳤다.
하나 지금껏 상대한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무겁고, 더 빠르다.
‘빌어먹을, 저놈은 쉽지 않겠는데?’
‘그런 걸 원했잖아.’
‘킬킬, 뭐 그렇긴 하지. 무아지경으로 달려보자고!’
순간 백무극이 입매를 길게 찢더니 숨을 훅 뿜어내며 바닥을 찼다.
“햐아!”
파밧!
쒸에에엑!
땅! 까가가가강! 깡!
순간 백무극과 새로 나타난 복면인 사이에서 연이은 금속성이 터지며 불꽃이 마구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싸움이 워낙 격렬했기에 주변의 살수들은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렀을까?
백무극은 조금씩 자신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로지 적막함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느낌은.
하나 그런 고요함도 오래 느낄 수는 없었다.
‘무극, 위다!’
복면인과 도검을 섞던 백무극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어 들었다.
“……!”
또 다른 복면인이 지붕 위에서 떨어지면서 남궁검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탓!
일순간 상대에게 환술을 펼친 백무극이 바닥을 차고는 떨어져 내리는 복면인에게 날아가 몸을 부딪쳤다.
콰앙!
그대로 포탄처럼 튕겨 나간 복면인이 골목 벽을 부수면서 나뒹굴었다.
촤츠츠츠츳!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섰는데, 이번엔 조금 전까지 도검을 섞던 복면인이 남궁검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질러가는 것이 아닌가?
‘위험……!’
어째서 저 녀석에게 환술이 통하지 않은 거지?
방심은 하지 않았다.
한데 저 녀석에게 환술이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걸 따질 겨를도 없다.
이대로면 남궁검은 심장이 뚫린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남궁검은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인지 검파에 손도 얹지 않았다.
남궁검의 무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백무극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 너무 구경만 하니까 이 꼴이잖아앗!”
일극의 원망 섞인 외침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촤츠츠츠츠츳!
백무극이 남궁검의 앞을 가로막았고, 상대의 검신이 그대로 백무극의 몸을 뚫었다.
푸우욱!
“커억!”
백무극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복면인에게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