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검증
남궁천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백무극만큼은 절대 안 됩니다.”
“흐음. 네가 이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구나.”
“몰랐다고요? 당연히 제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요?”
“전혀 아니다.”
“왜죠?”
이번엔 남궁천이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남궁검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네 동기들 중에서 모두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 윤종승과 유현, 그리고 팽수혁은 적랑단의 대주로서 임무에 충실한 상황이지. 진소홍은 천우당주로 제 장기를 잘 살렸고. 모용강은 화랑단주로서 이번에 임무를 맡았다. 물론 운경이라는 견습생이 있지만, 그는 사문이 봉문했으니 예외로 쳐야겠지. 하지만 백무극은 여전히 승천각에 머무르고 있지 않느냐?”
“단순히 그런 이유로 백무극을 선택하신 겁니까?”
“꼭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할아버지!”
남궁천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남궁검이 눈살을 가늘게 여몄다.
남궁천이 지금껏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견에 대립각을 세웠던 적이 있던가?
물론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궁천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그게 아니면 상대의 심리를 흔들어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거나.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남궁천이 감정적으로 꽤 격해져 있지 않나? 게다가 저 눈빛은…….
‘나를 걱정하는 것인가?’
왠지 기분이 묘하다.
낯선 감정이다.
물론 지금까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많았다.
남궁설희나 남궁표, 또는 남궁효나 남궁화도 그랬으니까.
한데 이건 뭔가 다르다.
‘허참, 선아. 네 아들이 지금 나를 걱정하는 것 같구나.’
낯설면서도 어딘지 간지러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남궁검이 가만히 바라보자, 남궁천이 먼 산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죄송합니다.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일단 들어보자. 왜 그리 반대하는 것이냐?”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무엇이?”
“할아버지. 전담 호신위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냥 손자 동기라고 덜컥 임무를 맡기면 될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흐음. 그 아이가 내 목을 노리기라도 할 것이란 말이냐?”
“그럴 리가요! 설혹 그런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이제 그 녀석에게 당할 정도로 무르지 않으시죠.”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솔직한 말이었다.
남궁검의 무공은 일전에 깨달음을 얻은 후로 비약적인 상승을 이루었다.
남궁천은 노년에 이르러 얻은 깨달음이 얼마나 많은 성장을 가져다주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움을 멈춰 서는 안 된다더니.
그 이유를 남궁검이 몸소 보여준 사건이었다.
남궁검이 듣기 싫지 않은 듯 희미하게 웃으며 차를 들이켜고는 물었다.
“한데 무엇이 문제더냐?”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그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애가 좀 헤까닥 했다니까요.”
남궁천이 귀 옆에 손가락을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남궁검이 잠시 차를 뿜을 뻔했지만, 잘 참고 넘겼다.
“그래도 네 동기에게 그런 말은…….”
“사실이니까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녀석입니다.”
“하나 너와 겨룬 이후로 특별히 사고를 친 적은 없지 않느냐?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만. 마지막에는 너를 도와서 함께 싸운 것 같고.”
“그렇긴 하지만 또 언제 헤까닥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튼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숙조부나 숙조모에게 맡기시는 게 어떠세요? 아니면 이모도 있잖아요.”
“지금도 본 가가 무림맹의 요직을 다 차지한다는 핀잔을 듣고 있다. 한데 호신위까지 그리 뽑으면 장로원부터 한마디 하고 나설 것이다.”
“빌어먹을 골방 늙은이들 같으니!”
“그런 말은 썩 듣기 좋지 않다. 나 역시 그들만큼 늙었다.”
“끙. 죄송합니다.”
남궁천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사죄하다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역시 백무극은 안 됩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백무극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백묘의 쇠사슬을 끊어놓지도 않았을 겁니다.”
“흐음.”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일전에 연회에서 백묘의 쇠사슬을 끊어둔 것은 남궁검의 지시에 따른 남궁천의 짓이었다.
당시 남궁검은 백묘의 쇠사슬을 슬쩍 끊어두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백묘가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 판단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단 한 명을 죽여 가장 큰 혼란을 주기 위해서는 남궁검의 목숨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묘는 맹주를 노렸고,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궁검은 멋지게 그녀를 막아냈다.
그런 일을 꾸민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깨달음을 통해 얻은 성취를 실전에 써먹어보고 싶다는 무인으로서의 심리였다.
둘째는 그 상황을 통해 본인의 무공을 과시하고, 호신위의 필요성과 호위각을 재정비하려는 명분 쌓기용이었다.
만약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맹주가 본인의 측근만 보강해 나간다고 딴지를 걸었을 게 분명하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남궁천도 남궁검의 지시를 군말없이 따랐다.
한데 난데없이 백무극을 호신위로 삼겠다니.
“그 녀석은 정신이 멀쩡한 놈이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항시 할아버지 곁을 지켜야 할 사람입니다. 매번 또렷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고요. 여차하면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그러니 그 녀석만 빼고 다 됩니다.”
“흐음. 의외군. 네가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제가 왜 찬성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그게 더 이상하네요.”
남궁천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자, 남궁검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의 매화나무에서는 봄을 알리는 새순이 돋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남궁검이 고개를 돌려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하필 그 아이라고 물었느냐?”
“예. 왜 하필 그놈입니까?”
“글쎄. 왜 하필 그 아이였을까? 나도 잘 모르겠지만 굳이 찾아보자면…….”
“……?”
“그 아이가 널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외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이랄까? 타고난 운명이랄까?”
“…….”
“그래서 그 아이를 거둬보고 싶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아이로 하여금 나를 지키게 할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그 아이를 가까이에 두고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너를 닮았기에.”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오히려 백무극을 지켜주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말이 안 되는…….”
“아니. 궁극적으로 그건 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즘 너를 보면 나의 과오가 떠오를 때가 있다. 내 너의 환경을 외면하여 어려운 시기를 보냈을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그래서 그 아이를 선택했다. 너를 닮은 아이. 아니, 너의 운명을 닮은 그 아이를 내가 거두어서 지켜보면 어떨까 하고. 너에게 저지른 과오를 돌이킬 수 없지만, 대신 그 아이의 환경을 바꿔주는 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호신위는 보호받는 자가 아니라, 지켜주는 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일방적으로 성립되는 관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그러하듯. 만약 내가 잘 이끈다면 그 아이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호신위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
“그럼에도 네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으마.”
남궁천이 가만히 남궁검을 보았다.
‘내 운명을 닮은 녀석이라니.’
그래서 구해주고 싶다니.
따지고 보면 확실히 백무극의 운명은 전생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운명. 오로지 이용당하기만 한 운명이었으니까.
영감, 이러면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잖아.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남궁천이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보마.”
* * *
백무극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남궁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 지내고 있느냐?”
“……?”
백무극은 순간 남궁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림맹주가 자신을 찾아와서 너무나 사적인 질문을 던지니 마땅한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남궁검이 저런 질문을 하니 더 적응이 안 되기도 했다.
결국 잠시 망설이던 백무극은 조금 전 일극이 했던 말을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맹을 잠시 떠날까 합니다.”
“어째서냐?”
“그냥…… 이리저리 부딪치다 보면 뭔가 답답한 문제가 풀릴 것 같아서…….”
“질문도 답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구나.”
“그렇습니다.”
백무극은 순순히 인정했다.
제삼자가 보면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인가 싶겠지만, 백무극으로서는 남궁검의 말이 정확히 자신의 상황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질문도 답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한마디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엿 같은 상황이다.
남궁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예……?”
백무극이 멀뚱히 바라보자 남궁검이 죽립을 쓰며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예……?”
“배고프지 않느냐? 일어서라.”
“아…… 예.”
그렇게 얼떨결에 대답한 백무극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백무극은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맹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점심을 먹자고 하더니, 이후로는 줄곧 무한의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시답잖은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잡동사니를 파는 보부상에게 검파에 매다는 수실 하나를 샀다.
길거리에서 만두 몇 개를 사서 먹었고, 당과를 사서 백무극에게 던지다시피 주었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맹주도 영 어색한지 머쓱한 표정이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말이 많은 편이 아닌지라, 대화도 거의 없었다.
정말이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행.
그렇게 객잔에서 저녁까지 해결한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지자 무림맹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남궁검은 서너 걸음 앞서 걸었고, 백무극은 자연히 뒤를 따르게 됐다.
“별이 밝구나.”
“…….”
백무극이 무심결에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생이 그렇다. 칠흑같은 어둠에 잠긴 것 같아도, 무수히 많은 별이 존재한다. 그러니 고개 숙이지 마라. 어둠 속의 별은 고개를 든 자만이 볼 수 있느니라.”
“……!”
순간 백무극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껏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어른이 없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남궁검의 등만 바라볼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별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불안할 필요 없다. 영원한 구름은 없는 법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구름은 언젠간 걷히고, 별은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별을 보며 버티다 보면 어둠이 물러가고 내일이 되는 것이다.”
“……예.”
“그러니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여 조급하지도 말고, 그저 너 자신을 믿고 앞에 놓인 길을 가면 된다.”
“…….”
백무극은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께에서 치밀고 올라와 목구멍에 콱 걸린 기분이었다.
평소에 시끄럽게 떠들던 일극도 이 순간만큼은 조용했다.
남궁검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백무극은 이 순간이 무척이나 편안했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
그런데…….
순간 백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곧이어 그가 걸음을 놀려 남궁검 앞으로 나섰다.
“제 뒤로 물러서십시오. 맹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