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검증
구파일방의 귀빈들이 떠난 다음 날, 무림맹에서는 흑무련과 공식적인 행사를 가졌다.
먼저 흑무련 부련주 여신우와 혈검단이 정식으로 전각 한 채를 배정받고 협약식을 맺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는 모용강이 이끄는 조직이 류난과 지강을 따라 흑무련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조직명은 제갈승의 추천으로 화랑단(和浪團)으로 정했다. 정사가 화합하여 하나의 물결을 이룬다는 뜻이었다.
물론 조직명을 정하는 과정 중에서도 소소한 잡음이 있었다.
애초에 남궁천은 흑무련이 무림맹과 화합을 이루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정화조(淨化組)가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모용강이 극렬히 반대했다.
비료단 이상으로 이상한 이름이라며. 먼 훗날 오물이나 처리하는 장치 이름이 될 것 같다나?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남궁천이 제안한 정화조는 묵살되었고, 모용강은 화랑단주가 되었다.
대략의 행사가 끝나고 흑무련이 무림맹을 나서기 직전, 남궁천은 모용강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가서 밥 잘 챙겨 먹어라. 혹시 흑무련 놈들이 괴롭히면 두드려 맞지 말고 연락해.”
“흥, 네놈이야말로 두 눈 부릅뜨고 잘 지내라. 맹 내에 흑무련의 잔당을 들였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남궁천이 씩 웃으며 대꾸하자, 모용강이 피식 웃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겠나?
모용강이 발을 옮기려다가 멈칫하고는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남궁천.”
“……?”
“기다려라. 강해져서 돌아올 거다. 너보다 더 강해질 거다. 내가 자발적으로 맹을 나서는 이유는 더 너른 세상을 보고자 함이다. 너를 만나면서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젠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것이다. 견식을 넓히면 또 깨달음이 있겠지. 그때는 긴장해야 할 거다.”
“좋은 자세야. 얼마든지 도전을 받아주지. 그리고 넌 사고 방식이 원래 사파적인 면모가 있었으니 잘 해낼 거야.”
모용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사파적인 면모? 욕하는 것이냐?”
“에이, 아니지. 그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말이지. 언제나 강한 힘을 추구하고,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독기도 좀 품고. 긍정적인 이야기다. 뭐, 약간 비열한 면은 있지만. 치졸한 면도 좀 있고, 겉과 속이 살짝 다르기도 하고. 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은근 강한 점도 비슷한…….”
“그만. 결국 욕이잖아!”
“어음. 그게 그렇게 됐네.”
남궁천이 턱을 긁적이며 먼 산을 응시하자, 모용강이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피식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남궁천은 남궁천답달까?
왠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남궁천이 이 자리에 굳건히 있을 것만 같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흑무련주 류난과 총군사 지강이 여신우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부련주, 자네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겠지? 혹시 힘들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지강에게 혈검단을 맡길 테니까.”
“괜찮아. 저런 약골에게 그런 중임을 맡기는 건 불안하니까.”
지강이 다시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약골이라니! 그리고 이런 중차대한 임무는 힘으로만 해결하면 안 된단 말이야. 순간적인 판단력과 융통성, 그리고 친화력과 상당한 수준의 처세술을 요하는 임무란 말이지. 역시 내가 적임자일 것 같은데. 련주님, 부디 저에게 이 임무를 맡겨주십시오!”
“흐음. 역시 그게 좋으려나? 부련주가 남아 있다가 괜히 무림맹 무인들과 싸움이라도 붙으면 곤란하니…….”
“그렇습니다. 이건 본 련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어마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일입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안 싸워. 내가 무슨 뒷골목 파락호인 줄 아나?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
“그래도…….”
다시 말을 꺼내던 지강은 여신우의 부리부리한 눈매를 마주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류난과 지강이 슬쩍 눈치를 주고받았다.
‘완전히 감긴 것 같습니다.’
‘그러게. 다행이야.’
안도의 숨을 내쉰 두 사람이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뒤를 잘 부탁하겠네, 부련주.”
“부련주님, 막중한 임무를 맡으신 만큼 항시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웬일로 지강까지 극진한 예를 다 하니 여신우가 입매를 비틀고는 답했다.
“련주와 총군사도 조심히 돌아가. 참, 그분은?”
“먼저 본 련으로 모셨네.”
그분이란 차양검 이휘명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렇군. 난 여기서 무림맹을 잘 감시하고 있을 테니, 련주는 걱정하지 말고 그분이 살아 계실 동안만이라도 잘 보살펴 드리도록 해.”
“고맙네, 부련주.”
류난의 눈빛에 진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이번만큼은 어떠한 거짓도 없는 표현이었다.
괜히 머쓱해진 여신우가 코를 씰룩이고는 먼 산을 보았다.
“뭐, 무림맹 놈들이 마교와 싸울 때는 협조도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물론, 자네는 알아서 잘 할 거야. 내가 가장 믿는 벗이 아닌가?”
“흠!”
여신우가 헛기침을 하고는 지강을 슬쩍 바라본다.
마치 ‘보았느냐?’ 하는 표정이다.
지강도 이번에는 딱히 딴지를 걸지 않고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각자의 이별을 고한 이들은 한동안 대화를 더 나누다가 서서히 무림맹 정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 *
무림맹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언덕 끄트머리에 우뚝 선 자는 다름 아닌 백무극이었다.
백무극의 뒤로는 승천각이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고, 한옆에서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모용강…….”
백무극이 조용히 뇌까렸다.
모용강은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승천각에 남아 있던 동기였다.
한데 이젠 모용강마저 떠나고, 승천각에는 백무극만이 홀로 남아 있는 상황.
휘이이잉.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불면서 백무극의 뺨을 스쳤다.
멀찍이 떠나가는 모용강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백무극의 입에서 돌연 까칠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랄. 울겠네, 울겠어. 왜? 당장 달려가서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리지 그러냐?”
“그런 게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아주 그냥 표정이 버림받은 아낙 같구만.”
“내 표정을 네가 어떻게 봐?”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지, 병신아.”
“시끄럽다. 모용강에게는 별 관심 없어.”
“그럼 뭐에 관심이 있는 거냐?”
“나.”
“뭐?”
“나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넌 무극이지. 새삼 나를 인정하기 싫어진 거냐?”
“그게 아니라, 그래.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알아듣게 말을 해!”
“우리는…… 과연 쓰임이 있는 것일까?”
“뭐……?”
“우리는 이제 뭘 하면 되지?”
“…….”
“모용강은 자신의 뜻을 좇아서 떠났어. 다른 동기들도 각자의 자리를 찾아서 떠났지. 하지만 우린 여전히 하늘로 솟구치지 못한 이무기야. 아직도 여의주를 찾지 못했어.”
“개소리가 너무 길어. 너는 그냥…….”
“묵천악 맹주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그게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그런데 그게 사라지고 나니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흐음.”
웬일인지 일극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무극은 이 상황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백무극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일극의 목소리였다.
“우리 방식대로 해보자.”
“그게 뭔데?”
“뭘 할지 모를 때는 그냥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거지.”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니라, 네 방식이겠지.”
“뭐가 됐든. 우리가 무공을 익힌 건 그저 상대를 부수기 위해서였을 뿐이잖냐? 그런데 지금 목적을 상실했으니까, 뭔가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워보자는 거야. 어때? 신나지?”
“별로.”
“아, 이 새끼가 또 찬물을 끼얹네. 그럼 어쩔 건데? 네 말대로 동기들도 다 떠난 이 빌어먹을 승천각에서 남은 여생을 보낼 거냐? 이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잊었다. 그러니 차라리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 강호기행을 하다 보면 온갖 놈들이 시비를 걸 테고, 그때마다 깨부수다 보면 뭔가 답이 있겠지!”
“으음.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 그러니까 우리 방식대로 해보자고.”
“그럼 우리의 공허한 마음이 조금 채워질까?”
“글쎄. 나야 모르지. 적어도 지금처럼 심심하진 않을 거 아냐.”
“그러려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백무극이 뒤를 돌아보니, 승천각주 조순욱이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을 찾았다.”
“평소처럼 낮잠이나 처잘 것이지 뭐 하러 우릴 찾……!”
철썩!
백무극이 순간 자신의 뺨을 후려치더니 무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커흠. 그, 그래.”
조순욱이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듯 애써 입매를 틀었다. 사실 백무극이 승천각에 머문 지 오래 지나면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된 그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예? 왜요?”
“맹주님이 널 찾으신다.”
“맹주님이요? 왜 저를……?”
백무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 서서 무림맹 입구를 바라보는 동안 누군가 승천각으로 들어가는 걸 느끼지 못했다.
물론 남궁검이 은신술이라도 펼쳐서 들어갔다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다면 승천각 후문을 통해 들어가서 기다린다는 뜻인데…….
‘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승천각주도 정확히 모르는 듯했다.
“나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니, 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알겠습니다.”
백무극이 조순욱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승천각 안으로 들어가서 연무장을 지나고 행랑을 따라 한참이나 걸음을 옮긴 다음에야 각주실로 들어섰다.
과연 각주실에는 남궁검이 창가의 탁자에 고고한 자태로 앉아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맹주님, 백무극 견습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했네. 자네는 나가봐도 좋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조순욱이 나가고 나자, 백무극만이 멀뚱한 표정으로 서서 남궁검을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거, 바쁘신 양반이 나를 뭐 하러 찾아왔……!”
철썩!
이번에도 백무극이 제 뺨을 후려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방금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느닷없는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남궁검이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평소 표정이 얼음장 같은 남궁검이었기에 그 웃음조차도 싸늘한 냉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듣던 대로구나. 이리 와서 앉아라.”
“듣던 대로? 남궁천, 그 새끼가 우리에 대해 다 까발린……!”
철썩! 철썩!
“정말 죄송합니다. 가끔 마음이 복잡할 땐 이 녀석이 제멋대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렇군. 앉아라.”
백무극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남궁검은 그런 백무극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더니 찻주전자를 들었다.
“한잔 마시겠느냐?”
“아니, 그럼 혼자 처먹을 생각……!”
철썩! 퍽! 퍽!
이젠 백무극이 주먹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다소 황당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남궁검이 그대로 굳어 있자, 백무극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더 조심하겠습니다.”
“흐음. 괜찮네.”
또로로로롱.
남궁검이 따르는 찻물 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그 소리와 은은하게 풍기는 차향 때문인지 백무극의 마음도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셔라. 눈치 볼 것 없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차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니 백무극의 마음이 더욱 안정이 되었다.
남궁검은 여전히 백무극을 하나하나 뜯다시피 살폈다.
“밥은 먹고 다니느냐?”
“……예.”
“그래야지.”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백무극은 뜻밖의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검 맹주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같은 순간, 남궁검은 백무극을 바라보면서 남궁천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 * *
“백무극을요?”
“그래, 그 아이가 어떨까 한다.”
남궁천의 반문에 남궁검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남궁천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절대 안 됩니다! 저는 결사반댑니다! 백무극은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