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대어를 낚다
남궁검은 맹주전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날씨가 풀려서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연못에서는 물고기가 헤엄을 쳤다.
홍예교 위에 멈춰 서서 연못을 바라보던 남궁검은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언젠가 남궁천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일전에 남궁화와 오찬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이 아닌데도 까마득하게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퐁!
마침 잉어 한 마리가 연못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헤엄을 치며 나아간다.
“너도 이 연못이 좁은 게냐?”
남궁검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읊조렸다.
그랬다.
그가 떠올린 남궁천은 바로 어릴 적 잉어를 몰래 품에 안고 가장을 벗어나던 모습이었다.
너른 강물에서 헤엄치지 못하는 잉어가 가여워 보였다고 했다.
그때는 남궁천의 마음이 여려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리고 일전에 남궁화와 대화를 나눌 때는 잉어를 보며 가문에 갇혀 지내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 것이 아닐까 하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 돌이켜 보니…….
‘어쩌면 그건 내 얘기였을지도.’
그날 남궁천이 자신을 쳐다보던 그 눈빛.
맹렬한 갈망을 품었으면서도 어딘지 원망을 품은. 동시에 안쓰러운 동정 같은 것마저 보였던 오묘한 눈빛.
물론 기억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기억된다.
‘너의 그 눈빛은 나를 안쓰러이 여겼던 것이더냐?’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남궁세가를 등졌을 때, 자신은 움츠릴 때라고만 생각했으니까.
뛰어오를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그 시기를 핑계로 움츠러든 자세에 적응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보다 높이 뛰어오르지 못할까봐 시기를 핑계로 감히 시도해 보지도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는 연못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지.’
그리고 남궁천은 그것이 안쓰러웠던 것은 아니었는지.
휘이잉.
거듭된 생각에 환기라도 시켜주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남궁검의 뺨을 적신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르게 보인다.
그때는 이랬다가, 어느 순간에는 저랬다가, 지금은 또 다르다.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다.
‘과연. 그렇구나.’
순간 남궁검은 모종의 깨달음이 뇌리를 스치는 듯했다.
이제 살 만큼 산 나이다.
더 이상의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아니다.
이 순간 남궁검은 하나의 이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현상들.
이것은 신선한 깨달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경험에 더욱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고집이 더욱 강해지고 어지간해서는 생각을 고치기도 힘들다.
인생을 달관했다고 착각하는 것도 그러한 관점에서 오는 것이리라.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남궁검은 당장에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깨달음을 이어가서 운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후원으로 남궁천이 걸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그래, 왔구나.”
“예, 할아버지. 그런데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요즘 같아서는 매일 너에게 놀라는 중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으로 기분이 좋으신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인데요?”
“허허, 눈치 하나는 정말이지…….”
남궁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감, 이래 봬도 내가 눈칫밥만 수십 년이오.’
남궁천이 속으로 생각하며 가만히 남궁검의 말을 기다렸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덕에 작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수련을 하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제가 방해했군요.”
“아니다. 젊은 너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내게는 깨달음이다.”
“너무 과찬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남궁천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내심 남궁검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편으로는 대단한 존경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개는 남궁검의 나이가 되면 깨달음 자체를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다.
본인의 부족함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뭔가를 깨달았더라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 남궁검은 그렇지 않다.
깨달음에 대한 갈망을 애써 숨기지도 않는다.
때문에 그가 더 대단하게 보인다.
이러한 점은 자신도 배워야 하리라.
“그래, 흑무련에서 연락은 왔느냐?”
“예, 오늘 안으로 부련주와 혈검단이 본 맹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렇군. 하면 모용강은 준비가 되었느냐?”
“예, 본인 스스로 자원한 만큼 준비가 빠른 편입니다.”
“확실히 모용세가의 혈육이구나.”
뭐랄까? 독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모용세가는 현재 모용신이 무너지면서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물론 모용 가주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또 어찌 될지 모를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모용 가주가 그저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마 둘째 아들인 모용강 때문이리라.
모용강은 남궁천에게 호승심을 가지고 있으나, 비열하진 않다.
비열함으로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아, 너의 대단한 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글쎄요. 제가 그걸 알게 되면 저의 대단한 점이 아니게 되지 않을까요?”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그 순간 그 부분에서는 방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허.”
남궁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디에서 이런 녀석이 온 것인지.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물었다.
“하면 내가 생각하는 그 장점을 말해주지 않는 게 낫겠구나.”
“에이, 그건 아니죠.”
“어째서?”
“타인이 먼저 발견해 준 장점은 자만보다 자신감을 심어줄 테니까요.”
“호오.”
남궁검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남궁천을 보았다.
확실히 남궁천과 대화를 하다 보면 희미한 깨달음이 스칠 때가 많다.
“너의 장점은…… 상대가 널 인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가요?”
“그렇다. 나도 그렇고, 모용강도 그렇고, 손우곤 대주도 그렇고, 패력궁도 그렇고, 모용강도 그렇지.”
“하지만 안 그런 인간들도 가끔 있잖아요? 안천길이나 지금의 장로원주나…….”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겠지. 하나 달리 생각하면 그들 역시 널 인정하기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일 터.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너는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제 자신을 믿고 더 힘내겠습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구파일방의 반응은 어떠하냐?”
“지금 막 청풍진인과 정혜 사태가 원주실로 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 원주의 실망이 크겠죠.”
“약천당주가 내정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더 난리가 나겠구나.”
“예. 그래서 시간을 좀 두려고요.”
“잘 생각했다. 뭐든 서두르면 탈이 나는 법이니.”
원래는 용상회 때 약천당주도 갈아치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파격적인 조치가 시행되면 거부감이 클 것 같아서 잠시 호흡을 고르기로 한 것이다.
‘그래 봐야 머지않아 바뀌겠지만.’
남궁천이 생각하는 사이에 남궁검이 부드럽게 물었다.
“천독노는 어떻게 지내느냐?”
“좋아 죽죠. 그러잖아도 맹에 갇혀 지내는 걸 질색하는데, 조금이라도 늦게 임명되길 바라고 있는걸요.”
“허허. 자유롭게 지내던 자가 그런 요직에서 잘 머물러 줄지도 걱정이군.”
“아마 연구할 것들을 잔뜩 던져주면 싫어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 걸로 꼬시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오늘 밤 송별회 준비는 잘 되어가고?”
오늘 저녁에는 구파일방의 인사들이 떠나기 전 송별 연회가 열린다. 어쨌거나 맹의 일에 구파일방 인사를 초대한 만큼 송별 연회를 베풀어 감사를 표한다는 의미였다.
또 한편으로는 흑무련의 부련주와 혈검단을 환영하는 의미도 있었고.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장로원으로서는 우리를 압박할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연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올 테지.”
“저야 뭐, 싸움을 걸어주면 좋죠. 그런데 이번엔 제가 먼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자, 남궁검도 피식 웃어버렸다.
이젠 아예 은근히 기대까지 된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남궁천을 이제야 비로소 너른 강물에 풀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맙구나. 노부를 연못에서 끌어내 주어서.’
* * *
그날 밤 무림맹 지객당에서 연회가 열렸다.
장로원을 비롯하여 무림맹 수뇌 인사가 모두 참여하였고, 구파일방에서 온 손님은 물론, 흑무련에서 온 부련주와 혈검단주도 참석했다.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음악이 흘렀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한쪽에 자리한 여신우는 옆에 앉은 혈검단주 백시랑과 술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었는데, 이따금씩 백도 무인들이 허세 가득 무용담을 늘어놓으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때문에 몇몇 무인들이 발끈하긴 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다.
그렇게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오늘 이 자리는 먼 곳에서 본 맹을 찾아와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은 구파일방의 손님들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본 맹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준 흑무련에게도 감사를 표하는 자리지요.”
사람들이 일순 대화를 멈추고 남궁천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우위광은 뱀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남궁천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잖아도 기회를 봐서 남궁천을 궁지로 몰 생각이었는데, 먼저 저렇게 나서서 이목을 끌어내니 그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남궁천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제가 한 가지 재주를 보여 흥을 돋울까 합니다!”
“오오, 좋소! 기대가 잔뜩……!”
눈치 없이 목소리를 높이던 각주 하나가 옆 사람의 눈총에 금방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장내를 둘러보고는 빙그레 웃더니 품에서 단검 하나를 뽑아 들었다.
바로 추혈검이었다.
“자,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천하의 절대 고수를 찾아내는 명검입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이 명검이 가리키는 것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이 아니라! 바로 천하제일의 고수!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만이 이 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과연 이 연회장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구일 것인가! 한 번 이 단검에게 물어볼까요?”
“하하! 재미있을 것 같소!”
“좋습니다. 한 번 해봅시다!”
몇몇 눈치 없는 이들이 동조했다.
사실 이런 유흥은 저잣거리에서도 잡상인이 자주 하는 짓이긴 했다.
때문에 남궁천의 행동은 정말로 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원주님 탁자 좀.”
우위광은 코웃음을 치고는 탁자를 들어 남궁천에게 휙 던졌다.
갑자기 왜 나서나 했더니 저런 시답잖은 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니.
‘아직 어린 건 어쩔 수가 없군.’
한편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탁자를 사뿐히 받아낸 남궁천이 연회장 복판에 탁자를 두고는 추혈검을 눕혀 두었다.
별것도 아닌 것이지만 분위기를 제대로 잡으니 모두가 묘한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몇몇 이들은 은근히 저 단검이 자신을 가리키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강호에서는 꽤나 미신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쨌거나 모두가 숨을 죽인 상황.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추혈검을 잡으며 말했다.
“자, 그럼 돌려보겠습니다. 과연 우리 중 누가 천하제일고수인지!”
팽그르르르!
다음 순간, 추혈검이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