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대어를 낚다
“어서 오시오.”
우위광이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지만, 청풍과 정혜는 딱딱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표정으로 우위광을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머쓱해진 우위광이 창가의 탁자로 자리를 안내했다.
“가서 차를 내오너라.”
“예, 나리.”
시종이 황급히 달려 나가자 자리에 앉은 청풍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대접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뭐, 우리가 이곳에 와서 딱히 도와드린 것도 없는걸요.”
“허허, 아니오. 큰 힘이 되었소.”
“글쎄요. 힘이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짐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렇지 않소. 오히려 여러분을 모시고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게 아닌가 염려될 뿐이외다.”
“좋지 않은 모습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게 잘되지 않았습니까? 골칫덩어리 흑무련과 화친을 맺었고, 이제 마교를 막을 일만 남았으니.”
언중유골이었다.
사실 이러한 전개는 장로원도, 구파일방의 수뇌들도 바라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이들로서는 최대한 남궁검 체제가 흔들리길 바랐다.
그렇게 무림맹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면 구파일방의 세력을 끌어들여 당분간 신탁을 맡기고, 유명무실한 맹주를 세운 다음 실권을 장악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흑무련과 성공적인 화친을 맺어버렸으니, 이제 구파일방이 개입할 일도 사라진 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로원에는 눈엣가시 같은 천무류가 들어와 있게 됐으니, 앞으로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지 알 수 없는 상황.
‘모든 게 꼬였어, 젠장!’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우위광은 청풍과 정혜가 이러한 상황을 꼬집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면목이 없어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앞으로가 걱정이오. 남궁가는 오랜 세월 바닥을 기었던 가문이 아니겠소? 그런 그들이 흑무련이 상납한 목돈에 혹해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건 아닌지 걱정이외다.”
“하긴. 그 정도 오랜 기간 최정상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가문이었으니, 그만한 돈에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요.”
“그리 생각하니 참으로 천박하군요.”
청풍과 정혜가 맞장구를 치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는 우위광이었다.
이들이 자신에게마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앞으로 더욱 난감해질 터이기에.
우위광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두 분은 혹여나 용상회에서 마음 상한 일이 있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남궁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일어난 일들이니.”
“물론 사사로운 일을 마음에 담아둘 정도로 속이 좁진 않습니다. 다만 남궁천의 도발적인 행동들이 썩 보기 좋진 않더군요.”
“흐음. 그 역시 아직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것이니 장문인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시구려.”
우위광의 대답에 청풍이 눈을 가늘게 여기며 중얼거렸다.
“글쎄. 과연 그것이 정말 분수를 모르는 탓에 일어난 것인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청풍은 그날 용상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조직 개편 회의는 시작하자마자 시종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그간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던 남문각주 천무류가 은퇴를 선언한 것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무림맹 수뇌인사들과 장로들이 술렁인 것은 물론, 외부 인사로 참석한 구파일방의 수뇌들까지 표정이 흔들릴 정도였으니까.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낼 생각입니다.”
남궁검에게 고하는 천무류를 보면서 장로들이 ‘이때다’ 싶었던 것인지 앞다투어 물어보았다.
“각주께선 존재만으로도 본 맹의 힘이 되어주셨소. 한데 갑자기 왜 맹을 떠난다는 것이오? 혹 맹이 각주께 서운하게 대한 점이라도 있소?”
예의상 던진 질문 같지만, 은근히 맹주인 남궁검을 질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다만 장로들의 바람과 달리 천무류는 오히려 남궁검을 극찬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남궁검 맹주께서는 너무나 훌륭히 맹을 이끌어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게도 많은 배려를 해주고 계십니다. 맹에는 어떠한 서운한 점도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지요.”
“한데 왜…….”
“그저 나이가 든 만큼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러자 남궁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면 굳이 물러나지 마시고 장로원으로 들어가시는 건 어떨지요? 각주님 같은 인재가 이대로 은퇴하시는 것은 본 맹으로서 크나큰 손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주님?”
돌연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들자, 우위광은 잠깐 당황하다가 얼떨결에 대꾸했다.
“그, 그렇지. 천 각주님은 본 맹의 유일한 무림칠성이시오. 그러니 은퇴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소. 하나 정 은퇴를 해야만 한다면 본 원에 들어와 주신다면 영광이겠소.”
“저처럼 보잘것없는 무인이 어찌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겠습니까?”
“허허, 장로원이 그리 막중한 임무를 지는 곳은 아니외다. 천 각주께서는 부담 가지지 말고 고려해 주시오.”
어디까지나 예의상 던진 말이었다.
천무류의 성격상 이 정도는 권한다고 해도 충분히 거절하고 떠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남궁천이 저렇게 물어보는데, 그걸 거부할 수도 없었다.
무림칠성이나 되는 자에게 ‘당신은 이제 필요 없으니 떠날 테면 떠나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겠나?
그런데 천무류의 대답이 뜻밖으로 흘러나왔다.
“흐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감히 장로원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원주님께서 허락을 하신다면요.”
으응? 남는다고?
장로원에 남겠다고?
‘이게 아닌데…….’
확실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남궁세가와 친분이 두터운 천무류가 하필 장로원으로 들어오겠다니?
게다가 그는 무림칠성이 아닌가?
감히 누가 그를 함부로 대하겠나?
만약 천무류가 장로원에 들어오게 되면 기껏 다져둔 생태계가 급변할 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천무류는 정치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건데…….
결국 우위광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또 해야만 했다.
“본 원으로서는 적극 환영이오.”
그때부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유백랑이 천우당주 자리에서 물러나 천무류의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남궁검은 천우당주 자리에 새파랗게 어린 진소홍을 앉혔다.
“당주를 맡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겠습니까?”
“계산이 좀 빠르고 상재가 있다는 정도로 그리 큰 조직을 맡기다니요? 조금 더 신중할 문제입니다.”
곳곳에서 반발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구파일방의 수뇌들도 가세했다.
하지만 남궁검의 의지는 단단했다.
무엇보다 진소홍은 확실히 영민했다.
천우당주 후보로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막힘없이 모든 대답을 술술 이어갔다.
맹의 사업을 어떻게 관장할 것이며, 적자가 나는 분야를 어찌 해결할 것인지, 또 새로운 사업은 어찌 발굴할 것인지.
진소홍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획기적이면서도 확실한 성과를 장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간 진소홍이 포권하며 말했다.
“큰 조직을 이끄는 것은 당연히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나 천우당처럼 큰돈을 만지는 경험이라면 저 역시 모자라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 말에 반대할까?
어려서부터 금괴로 탑 쌓기를 하거나 멀리 던지기 놀이를 하던 아이인데.
진소홍이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또한 제가 천우당주가 된다면 아버지를 제 고문으로 초대해서 지속적인 조언을 들으며 천우당을 잘 이끌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쯤 되자 수뇌인사들과 장로들도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중원의 정보에 어둡고, 거의 새외 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 곤륜파의 장문인 청풍진인이 코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훗! 도대체 자네 아버지가 뭐 얼마나 대단한 자이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가? 확실히 어린 티가 줄줄 흐르는군. 뭐? 아버지에게 조언을 들어? 도대체가…….”
“장문인.”
옆에서 정혜 사태가 나직이 불렀다.
하지만 청풍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만 계셔보시오. 도대체가 저런 어린아이를 어찌 믿고 그 큰일을 맡긴다는 거요? 저러다 저 아이의 아비가 천우당주가 되겠소!”
“그럼 좋죠. 완전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을 뿐이죠.”
남궁천이 불쑥 끼어들며 하는 말에 청풍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뭣이? 그럼 좋아? 완전 바라는 바? 허! 도대체가 천우당을 어찌 보기에 그런 소리를! 자네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하다 안 되면 아비를 불러서 맡기는 게 좋은 일이라고? 그럴 거면 애초에 저 아이의 아비를 천우당주로 삼지 그러는가?”
“말씀드렸다시피 그럴 수가 없다니까요. 워낙 바쁜 분이셔서.”
“갈! 그럼 우린 한가해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감히 무림맹의 천우당 자리를 걷어찰 정도로…….”
“청풍진인.”
다시 정혜가 말렸다.
“거, 가만히 계셔보시오! 정혜 사태께서도 이 상황을 어찌 가만히 보고만 계신단 말이오? 저런…….”
“장문인!”
“아, 왜 그러시오?”
“우선 저 아이 말을 마저 들어보지요.”
정혜 사태가 필사적으로 눈치를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청풍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리 너그러우신 거요? 누가 보면 저 아이의 아비가 온 세상 돈은 다 만져보는 것처럼 보이겠소.”
“아마 그럴걸요?”
또 불쑥 들려온 남궁천의 목소리.
청풍이 미간을 팍 구기며 돌아보았다.
“뭐라? 지금 내게 농담을 하는 건가? 저 아이의 아비가 황제라도 된다는 것이냐?”
“아, 그건 아니고요.”
“그럼 도대체 저 아이의 아비가 누구더냐?”
“흐음. 중원 실정에 어두우신 곤륜파 장문인이시지만, 그래도 만금진인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지요? 금왕이라고도 불리는 그분요.”
“안다. 강남 제일의 거상이라 불리는 만금진인을 내 모를 줄 아느냐?”
“그분입니다.”
“뭐가?”
“진소홍 대주의 아버지요.”
“흥! 겨우 금왕을…… 잠깐. 뭐라고 했지?”
청풍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금왕이라고요. 진 대주 아버지가.”
그제야 청풍이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진소홍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금왕을 본 적이 없다.
머나먼 곤륜산에서 지내다가 최근 몇 개월 전에야 아미파로부터 강호 사정을 듣고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금왕에 대해서는 안다.
강남에서 제일가는 거상.
금왕의 손을 거치지 않은 돈은 돈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한데 그 금왕의 딸이라고?
진소홍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외부인이니까 천우당 일에 개입하는 건 좀 그럴까요? 그렇다면 고문으로 모시지 않겠습니다.”
“잠깐! 그리 급히 단정할 일은 아니잖은가?”
이번에도 우위광이 체면 불고하고 먼저 엉덩이를 떼고 말았다.
한 번씩 이렇게 엉거주춤 일어날 때마다 자존심이 팍팍 꺾이는 그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금왕의 여식이다.
강남에서 금왕의 손을 타지 않은 돈은 돈이 아니다.
그만큼 재력에 있어서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다.
오죽하면 전대 맹주도 금왕을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까?
하나 금왕은 무림맹에 데면데면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금왕이 아예 등을 돌리진 않았다는 것이다.
딸이 입맹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한데 이렇게 대놓고 금왕을 무시하면?
만약 금왕이 빈정이 상해서 자금줄을 쥐고 흔들기라도 하면?
무림맹은 그날로 자금난에 허덕일 수 있다.
흑무련으로부터 받은 사천만 냥?
그게 대수랴?
금왕이라면 그보다 더한 금액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인데!
우위광이 엉거주춤 일어선 자세로 얼른 장로들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뭣들 하시오! 어서 말리지 않고!’
그 뜻을 눈치챈 장로들이 황급히 말을 쏟아냈다.
“금왕이 친히 고문역을 맡아준다면 본 맹으로서는 안심이지!”
“옳소. 황제도 때론 거상이나 선비들을 불러 조언을 구하는데, 본 맹이라고 못할 게 있겠소? 오히려 감사할 일이오!”
“천우당이 기지개를 켤 일만 남았겠구려!”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지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천우당주는 정해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