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 대어를 낚다
“잠깐. 갑자기 그게 뭔 개소리야?”
가만히 듣고 있던 여신우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서늘한 기운마저 풍기는 것이 감히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도 힘들 만큼 예민해진 상태였다.
‘내 저럴 줄 알았지. 끄응.’
지강이 내심 속으로 뇌까리며 시선을 외면했다.
류난만이 담담하게 웃으며 여신우를 달랬다.
“자자, 그리 예민하게 굴 일은 아니잖아.”
“예민할 일이 아니라니. 련주, 이건 너무하잖아?”
“뭐,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어디 있나? 그건 실패자나 하는 소리라고 련주가 그랬을 텐데.”
“흐음.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류난이 이마를 긁적이며 애매하게 웃자, 여신우가 내심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씰룩인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그 고구마 같은 영감들하고 같이 지내라는 건가? 이게 말이 돼? 갑자기 이러긴가? 애초에 그런 말은 없었잖아. 나는 못 가. 아니, 안 가.”
“흐음. 이미 우리 쪽에서 부련주와 혈검단이 남겠다고 말해 버렸는데.”
류난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여신우가 탁자를 탁 내려치며 목소리를 슬쩍 높였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해?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부련주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 누구보다 본 련을 생각하는 부련주니까.”
“하!”
여신우가 한 방 먹은 표정을 하고는 류난을 노려보았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나는 흑무련의 미래를 생각하지. 하지만 이런 건 적어도 나와 상의를 했어야 해. 그럼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잖아.”
상황이 쉽지 않게 흐르자 지강이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부련주, 일단 진정해 봐.”
“너는 참견하지 말고. 내 문제니까.”
“허어, 아무리 그래도 총군사인데 너무하네.”
“난 부련주다.”
“우리 지침상 련주님이 계실 땐 내가 상관이야. 부련주는 련주님의 부재 시에만 나보다 높아.”
“흥!”
여신우가 혀를 차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단단히 토라진 표정이었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지강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못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련주,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야. 사실 너도 그런 말 했잖아. 부련주라는 애매한 자리는 필요 없다고. 하지만 바로 이럴 때 부련주가 필요한 거야. 저들도 부련주나 되는 사람이 맹에 남겠다고 하니 우리를 신뢰하는 거라고. 본 련에서는 최고의 사절단을 보내는 셈이지.”
“흥, 말이 좋아 사절단이지 이건 그냥 볼모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상황을 보자고. 부련주가 그곳에 머물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혹시나 무림맹이 먼저 우리 뒤통수를 치진 않을지 감시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 한마디로 감시자지.”
“그런 감언이설로 날 구슬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말이 좋아서 감시자지, 결국 간자 역할이나 하란 말이잖아.”
“흐음. 련주님.”
“응?”
류난이 고개를 들자, 지강이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부련주가 좀 똑똑해진 것 같습니다. 쉽지 않네요.”
“원래 머리 좋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다 보면 범인도 조금씩 발전하는 법이야.”
“과연 그렇군요.”
이쯤 되자 여신우는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 소리쳤다.
“지금 날 놀리는 거냐!”
“확실히 련주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뭐야? 이것들이 진짜!”
“엇! 지금 련주님께 이것들이라고 하다니! 이건 중죄다! 무림맹에 남아서 반성해야 할 일이야!”
“알아서 지껄여라. 어쨌든 나는 안 남을 테니.”
여신우가 강하게 반발하자 지강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하던 류난이 지강을 보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억지로 남을 수는 없으니 이번엔 지강, 자네가 남아.”
“그럼 우리 쪽에서 말을 바꾼 건데 괜찮을까요?”
“어쩔 수 없지. 부련주가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아서 네가 대신 남는다고 전해.”
“흐음. 그럼 저들이 본 련의 부련주를 겁쟁이라고 생각할 텐데요.”
지강의 말에 여신우가 순간 움찔거렸지만, 류난은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그들 생각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총군사도 부련주 못지않게 높은 지위니까 저들도 마다하진 않을 거야.”
“하긴.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요. 아무나 보낼 수는 없죠. 역시 처음부터 제가 맡아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본 련의 미래가 걸린 문제지.”
“동감합니다. 그럼, 제가 혈검단과 무림맹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히 맹을 감시해서 본 련에 피해가 없도록 주의하고요. 아울러 여차하면 맹의 약점을 파악해 두고 훗날 이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류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지강의 어깨를 붙들었다.
“좋아, 지강. 본 련의 명운이 이제부터 너에게 달린 셈이다. 우린 너만 믿는다, 지강. 너야말로 본 련의 희망이다. 이 중요하고 엄청난 임무를 무사히 잘 수행하고…….”
“……잠깐.”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류난과 지강이 무감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자, 여신우가 침음을 흘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흐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란 말이지.”
일순 류난과 지강의 눈빛에 한 줄기 빛이 스친다.
지강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 우선은 마교를 잠재우는 게 큰일이지만, 훗날은 또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면…… 역시 지강으로 불안하지 않나?”
“아니, 지강이야말로 이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야. 용감하고 적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했으니.”
류난의 말에 여신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정신력 따위는 모르겠고. 저 녀석 너무 약골이잖아.”
“약골이라니! 이래 봬도 내가 무공을 익힌 몸이야!”
“그래 봐야 삼류 수준이지.”
“삼류라니! 이류는 된다!”
“그건 네 생각이고. 아무튼 좋게 봐줘도 이류. 그런데 초절정 고수들이 즐비한 맹에서 네가 버틸 수 있을까? 그 고구마 같은 영감들이 살기를 줄기줄기 뻗으면 기절해 버리지 않겠어?”
“괜찮아. 나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어. 련주님, 전 괜찮습니다. 부디 제게 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십시오!”
지강이 고개를 휙 돌리고 소리치자, 여신우가 얼른 끼어들었다.
“아니, 내가 생각을 바꿨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저 병약한 몸으로는 무리야. 내가 맹에 남도록 하지.”
일순 류난과 지강의 몸이 흠칫거렸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낚았다!’
하나 누구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류난이 더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여신우를 돌아보았다.
“부련주…… 정말 괜찮겠나? 이건 아주 중요한 임무야. 무림맹에서 지내면서 온갖 차별과 서러움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어. 그러면서도 본 련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지. 그렇다고 함부로 싸워서도 안 돼. 노련하게 대처해야 해. 한마디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뛰어난 인재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한다. 저런 약골은 해낼 수 없을 게 뻔하니까.”
여신우가 눈을 지그시 감고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류난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여신우의 어깨를 붙들었다.
“네가 나서준다면 나로서도 더 없이 안심이긴 하지. 정말 다행이군. 사실…… 나도 지강은 좀 불안했거든.”
“훗, 그럴 수밖에.”
여신우가 보았느냐는 듯이 지강을 힐끔 본다.
지강이 발끈한 척 따졌다.
“련주님,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지강, 너는 본 련에 남아서 맹의 사절단 감시를 맡아줘.”
그러자 여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약골인 너에겐 그 정도가 딱 적당하군.”
“끄음. 련주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위대한 공을 세울 기회는 부련주에게 양보할 수밖에요.”
“이해해 줘서 고맙네, 총군사.”
련주의 말에 여신우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나저나 무림맹 사정은 좀 어때?”
“아마 저쪽도 장로원에서는 골치 꽤나 아플 거야.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으니.”
류난의 말에 지강이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지금쯤 노발대발하면서 씨근거릴지도 모르죠.”
* * *
콰앙!
우위광이 내려친 주먹에 탁자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그는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면서 뺨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궁검은 모든 조직을 개편했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남궁세가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다.
그 막강한 구파일방의 인사들을 초청해 놓고도 제대로 방어조차 못했다.
상황이 이리 되니 구파일방의 인사들을 마주할 면목도 없어졌다.
그야말로 체면을 완전히 구긴 셈이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절로 쏟아져 나온다.
용상회를 이용해서 남궁가 놈들을 잔뜩 짓밟아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신과 구파일방의 수뇌 인사들이 짓밟힌 셈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남궁검이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감행하면서, 비량을 따로 차출해 감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천응대(天鷹隊).
천응대가 맡은 임무는 각 조직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비록 구성 인원이 많지 않은 만큼 ‘대’로 불리지만 그들의 권한은 ‘당’을 뛰어넘는다.
어지간한 당주들조차도 천응대가 나서면 자라목을 하고 운명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위험한 곳은…… 약천당과 정검당, 그리고 철심당인가?’
그 세 곳이 모두 무너지면 장로원을 지탱할 힘이 약해진다.
게다가 지금 장로원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하필 천 각주가…….’
패력궁 천무류.
그가 용상회 도중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남문각주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대신 그는 장로원에 들어오길 원했다.
다른 이도 아닌 패력궁 천무류다.
그가 원한다는데 장로원에서 반대할 명분이 있겠는가?
다만 그가 현 남궁가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적랑단주의 자리뿐만 아니라, 맹주의 자리까지 남궁검에게 양보했을 정도니까.
그런 그가 장로원에 들어오게 되면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지 않겠나?
무림맹 소속으로서는 유일하게 무림칠성에 이름을 올린 자.
그런 자를 누가 마다하겠나?
오히려 머리를 조아리며 모시고 가야 할 판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천무류를 받아들였는데, 이번엔 또…….
“그 멍청한 놈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어 올린 우위광은 더 이상 깨부술 탁자가 없음을 깨닫고는 맥없이 손을 내렸다.
‘병신 같은 놈!’
천우당주 유백랑이 제 발로 물러날 줄이야.
어떻게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악을 했어야 하건만.
조직 개편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무류가 은퇴를 선언했고, 그 빈자리를 유백랑이 채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천우당주라는 요직을 내팽개치고, 할 일 없는 한직으로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것.
당시 우위광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친 게 아니냐고.
하나 이 모든 상황이 어쩌면 남궁가의 계략이었을 수도 있다는 상황에 이를 꾹 깨물고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모든 상황은 남궁가가 주도하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멍청하게 약점을 잡힌 것일 테지.’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기에.
물론 우위광은 꿈에도 몰랐다.
유백랑이 살곡에 호법당주 안천길을 죽여달라고 사주했다는 사실을.
어쨌거나 그로서는 지난 용상회가 떠올리기 싫을 만큼 끔찍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분을 삭이고 있는데, 마침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원주님, 청풍진인과 정혜 사태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뫼셔라.”
잠시 후 청풍과 정혜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그날 있었던 또 다른 일이 떠오르는 우위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