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시간 좀 주시죠?
이제 흑무련 쪽은 해결된 거냐고?
그걸 말이라고?
무려 사천만 냥을 갖다 바쳤다. 아니, 바친 게 맞긴 한가?
사천만 냥이다.
웬만한 거상이라도 평생 구경도 하기 힘들 만한 액수가 아닌가?
번쩍이는 금괴가 마당을 꽉 채우고 있다.
진짜 미쳤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면 해결된 수준을 넘어서 류난이 무림맹에 지대한 공을 세운 셈이다.
지금껏 무림맹이 어떤 사업으로 단숨에 사천만 냥을 벌어본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다.
심지어 한 해 동안 적자가 날 때도 있었다.
특히 한창 진천랑을 추격할 때는 확실히 적자였다. 돈을 있는 대로 쏟아붓고도 번번이 진천랑을 놓쳤으니까.
그런데 단숨에 사천만 냥을 상납하다니?
이게 만약 남궁천의 안배라면?
사천만 냥을 번 것도 모자라서 흑무련이라는 맹수를 길들인 게 아닌가?
뭐, 흑무련이 정말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해도…….
‘무려 사천만 냥이란 말이지.’
우위광이 신음처럼 침음을 흘렸다.
이건 뭐 어지간해야 딴지라도 걸어보지.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해 버린 액수에 머리가 굳는 느낌이다.
장내가 충격으로 굳어버린 분위기인데, 남궁천만이 여유롭게 물었다.
“자, 그럼 화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좋소.”
류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지켜만 보던 청풍이 탁자를 탕 내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흑무련의 진정성은 알겠지만, 갑자기 화친이라니! 정사가 그리 쉽게 풀릴 관계던가?”
“청풍 도장께선 사천만 냥도 쉬워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류난의 나직한 말투에 청풍이 표정을 굳히고는 우위광을 돌아보았다.
우위광이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류난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도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죠. 본 련은 그저 마교를 앞두고 무림맹과 평화 협정을 맺고 싶으나, 굳이 서로 피 흘리길 원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겠소? 지강, 다시 담도록 하지.”
류난의 명에 지강이 곧 눈짓으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흑무련 무인들이 서둘러 수레로 달려가 금괴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무림맹 간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견물생심이라고, 눈앞에서 금괴가 다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왠지 조바심이 일어났다.
그만큼 사천만 냥은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결국 우위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거,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 않소?”
“어차피 진척이 없는 대화라면 여기에 더 머물러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커흠! 청풍진인께선 그간의 감정을 하루아침에 녹이긴 힘들다는 뜻이었을 뿐이오. 게다가 이 안건에 대한 결정은…….”
잠시 말을 멈춘 우위광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남궁검 맹주님에게 달려 있는 것 아니겠소?”
어쩌다 보니 본인 입으로 실권을 넘긴 셈이 되고 말았다.
하나 맞는 말이긴 하다.
‘빌어먹을. 왜 사천만 냥씩이나 가져와서는!’
이 정도 되니 우위광은 이번 일에 남궁천이 개입한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정말로 우연이 아닐까?
남궁천이 진짜 천운을 타고 태어난 것일까?
제 아비가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 태어난 보상으로 하늘이 운을 베풀어주기라도 하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의 수완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흑무련에게서 사천만 냥을 받아 낸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모르겠다.
이쯤 되니 정말 모르겠다.
결국 우위광은 그저 남궁검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표정으로 옆을 돌아볼 뿐이었다.
남궁검이 희미하게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장로원에서도 이천만 냥에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다고 하셨으니, 그 곱절인 사천이라면 충분히 귀 련이 성의를 표했다고 봐도 무관하겠소.”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류난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본 맹은 귀 련과 화친을 맺도록 하겠소.”
그러자 곳곳에서 안도와 탄식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선은 사천만 냥을 내팽개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들이 다수였고, 몇몇 이들은 이걸로 남궁세가가 실권을 더욱 공고히 다질 거라는 사실에 탄식했다.
그렇다고 흑무련을 함부로 대하지도 못할 상황이다.
‘이건 뭐 어지간해야지.’
우위광이 불편한 표정으로 연신 침음을 흘렸다.
너무 많은 금액을 받아버리니 오히려 주도권이 넘어가 버린 기분이랄까?
뭔가 상납금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적선을 받는 처지가 된 기분이다.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자 금괴를 주워 담던 흑무련 무인들이 멈칫거리고는 눈치를 살핀다.
그러자 지강이 준엄하게 말한다.
“뭐 하는가? 어서 주워 담도록.”
“아, 예.”
무인이 금괴를 수레에 담기 시작하자, 우위광이 반사적으로 엉거주춤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왜……? 본 맹은 화친을 맺으려는데…….”
“아, 물론입니다. 다만 금괴를 이렇게 널브러뜨려 놓고 대화할 수는 없어서요. 옮기시기 편하도록 수레에 담는 겁니다. 도로 가져가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강의 차분한 대답에 우위광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빌어먹을! 내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다니! 이 무슨 추태인가!’
돈 앞에서는 장사 없다더니.
혹여나 사천만 냥이 눈앞에서 날아갈까 봐 저도 모르게 전전긍긍이었다. 기실 돈도 돈이지만, 만약 이 거래가 결렬될 경우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크지 않겠나?
눈앞에 굴러떨어진 사천만 냥을 발로 걷어찬 장로원주라는 소리는 절대 들어선 안 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말았다.
‘제길!’
한마디로 일이 엿같이 돌아가고 있다.
한편 갑자기 정사지간의 화합이 추진되니 남궁세가를 견제하기 위해 참석했던 구파일방의 인사들은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별생각 없이 참석했던 만취개만이 술 한 병을 거하게 들이켜고는 킬킬 웃어댔다.
“재미있네, 재미있어. 정사 간의 화합이라니. 진행시켜!”
그의 말에 류난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본 련의 진정성을 알아주시니 역시 만취개 대협이십니다.”
“호오, 나를 아시는가?”
“물론입니다. 강호에 몸을 담은 자로서 선배님의 별호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수양이 부족한 것이지요.”
상황이 묘하게 흐르자 앞서 나섰던 정혜 사태의 얼굴은 더욱 발갛게 달아올랐다.
따지기도 자존심 상한 상황.
그러거나 말거나 만취개가 킬킬거리며 물었다.
“그래, 화친을 맺으면 앞으로 흑무련은 무림맹과 어찌 지낼 생각인가?”
“당연히 정사 간의 어떠한 싸움도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 련이 먼저 손을 내민 만큼 정사간의 갈등이 있을 때는 무림맹의 의중을 먼저 확인할 것을 약조하지요. 뿐만 아니라, 마교와 싸우게 된다면 본 련은 물불 가리지 않고 무림맹을 도울 것입니다.”
“호오, 화끈하군!”
만취개가 흐느적거리는 손을 들어 박수를 짝짝 치더니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술병을 탁 내려둔 만취개가 조금은 달라진 눈빛으로 류난을 빤히 응시했다.
“하나 그깟 종이 쪼가리에 글자 몇 자 적는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들으면 서운할지 몰라도 사파가 정파의 뒤통수를 친 역사는 무수히 많네.”
“물론이죠. 그 반대의 경우도 많고요.”
“킬킬킬. 맞아. 모든 조직은 썩어가는 것이 세상 이치니까. 그래서 더욱 확실한 방법이 필요할 것 같지 않은가?”
“사천만 냥의 성의로 부족한 걸까요?”
“물론 저 성의는 좋아. 사천만 냥이면 도대체 술통이 몇 개야? 과장 좀 보태면 술로 강물도 만들겠군. 킬킬킬.”
“멋진 상상력이십니다.”
“쓸데없는 말은 됐고. 사천만 냥이 자네의 신뢰를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지. 일단 나로서는 흑무련이 저 많은 돈을 어찌 구했는지 의문이기도 하고.”
만취개가 반쯤 풀린 눈동자를 남궁천에게로 옮겼다.
그로서도 이 상황의 배후에는 남궁천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딱 맞춰서 흑무련이 나타났을까?
류난이 보일 듯 말 듯 피식 웃었다.
확실히 만취개가 헐렁해 보여도 예리한 구석이 있다.
‘괜히 무림칠성이 아니란 말이군.’
다만 만취개는 앞서 청풍이나 정혜와 달리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자신의 의중을 떠보는 것 같다.
그에게서는 사리사욕보다는 강호 평화만을 생각하는 의기가 확실히 느껴진다.
때문에 류난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긴. 나라도 갑자기 사천만 냥을 덥석 내놓는다면 의심스러웠을 테니.’
류난이 남궁천을 힐끔 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남궁천은 대범하다 못해 광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누가 사천만 냥이나 되는 돈을 그리 쉽게 내놓을까?
어지간한 범인이라면 사천만 냥을 내놓고선 잠도 자지 못하리라.
하나 남궁천은 자신에 대해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었다.
이휘명을 두고는 사천만 냥을 꿀꺽하고 잠적할 수 없다는 것을.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녀석을 보고 있으면 마치 진천랑과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정말 신기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더니.
저리도 닮을 수 있는 건가?
단지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실 외모만 두고 보면 진천랑도 떠오르지만, 천하제일룡이었던 남궁선이 더 떠오른다.
그런데도 남궁천과 대화하고 있으면 마치 진천랑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이래서 아버지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신 건가?’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오른 류난이 내심 피식 웃고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나저나 이 많은 돈은 어디에서 났나?”
“살곡주로서 번 돈이지.”
“살곡주로서?”
그렇게 전후 사정을 털어놓은 남궁천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더 대단한 것은 남궁천이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 나조차도 남궁천이 안배해 둔 말 하나라는 점이 자존심 상하지만. 진천랑, 너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군.’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하던 류난이 만취개와 남궁천, 그리고 남궁검과 우위광을 차례로 보더니 파격적인 제안을 꺼냈다.
“종이 쪼가리를 믿을 수 없다는 말씀 이해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
“서로의 신뢰를 확실하게 다지기 위해 서로 조직 하나를 맞교환하는 겁니다.”
“호오?”
만취개가 술병을 든 채로 흥미를 보이더니 무릎을 탁 내려쳤다.
“과연! 서로에게 힘을 실어줄 겸, 볼모의 역할도 하는 셈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또한 각자가 뒤통수를 치지 않을지 감시의 역할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투명한 방법도 없을 듯합니다.”
“크으! 좋은 방법이로다! 좋아, 아주 좋아. 아, 물론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니네만. 그저 개인적인 생각일세.”
만취개의 취기 오른 소리에 류난은 그저 빙그레 웃음으로 답했다.
남궁검 역시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확실히 나쁘지 않네요. 그럼 련주님은 본 맹에 어느 조직을 남겨두시겠습니까?”
“흐음. 본 련의 부련주와 혈검단을 남겨두겠소.”
류난의 말에 옆에 선 지강이 움찔했다. 여기까진 그로서도 생각지 못한 것이기에.
‘부련주라니. 여신우 그 성깔 나쁜 녀석이 발끈할 텐데.’
지강이 생각에 잠긴 사이, 류난이 남궁천을 보며 물었다.
“이제 귀 맹은 어느 조직을 본 련에 보내시겠소?”
“흐음. 그걸 논의하기 위해서는 역시 조직 개편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군요. 자, 그럼 이제 흑무련이 해결됐으니, 조직 개편에 대해 논의하죠?”
“…….”
지극히 무난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다.
누구도 반대 의사를 표하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사천만 냥이나 내놓은 인간이 그러자는데.
사천만 냥이나 덥석 받아낸 인간이 그러자는데.
이젠 오히려 흑무련에게 제발 화친을 맺자고 매달려야 할 판국인데.
‘니미럴.’
모든 회의는 남궁검의 주관하에 남궁천과 류난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우위광은 욕지거리를 흘리면서도 그렇게 용상회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제대로 나설 수 없었다.
몇 차례 파격적인 인사 조치가 단행되었지만, 우위광은 그저 눈만 끔뻑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