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시간 좀 주시죠?
용상회가 열리기 사흘 전, 신룡객잔 귀빈실.
툭!
탁자에 두툼한 봉투가 놓였다.
류난과 지강이 눈을 슬쩍 구기고는 한참이나 봉투를 쳐다보았다.
봉투를 내려둔 남궁천은 그저 팔짱만 낀 채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류난이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에 담긴 것을 꺼내 보았다.
전표였다.
공신력이 있는 전장에서 발행한 것으로, 언제든지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전표다.
차를 마시던 지강이 곁눈질로 금액을 슬쩍 확인하고는 사레가 걸려 기침을 토했다.
“콜록! 콜록, 콜록!”
지강이 얼른 찻잔을 내려두고는 류난의 손에서 전표를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마, 맙소사. 이게 다 얼마야?”
“총 삼천오백만 냥.”
“헉!”
순간 지강은 만져선 안 될 것에 손이라도 댄 것처럼 얼른 전표를 놔 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뻗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큰돈을 만져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삼천오백만 냥.
맙소사. 삼천오백만 냥이라는 돈을 저렇게 쉽게 입밖으로 내뱉다니.
무림맹으로 따지자면 삼 년치의 예산 수준이다. 흑무련이라면 대략 오 년치의 예산 정도가 되리라.
남궁천의 대답에 류난도 조금은 놀랐는지 눈자위를 흠칫거렸다.
하나 그는 곧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이 금액에 원래 우리가 자네에게 줬어야 할 오백만 냥을 더해서 사천만 냥을 내놓아라?”
“잘 이해했네.”
“마치 상납금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게 핵심이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난이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사천만 냥이라.
확실히 엄청난 금액이다.
물론 흑무련이 실제로 지출할 돈은 오백만 냥뿐이다. 사실 그것도 남궁천에게 당연히 지불해야 할 돈을 내놓는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흑무련이 금전적 손해를 보는 것은 단 한 푼도 없다. 아니, 오히려 흑무련이 남궁천에게 지불해야 할 이천오백만 냥 중, 이천만 냥을 삭감받았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돈을 버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흑무련의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명분만 내세우는 무림맹의 늙은이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사천만 냥도 아깝지 않게 내놓는 척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까지 미치자 옆에서 지켜만 보던 부련주 여신우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일렀다.
“흥! 우리를 뭐로 보는 거지? 어차피 돌려줘야 할 돈을 내놓으면서 굴욕을 감수하라는 것이냐?”
“바보네.”
“뭐라?”
여신우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남궁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궁천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완전 똥멍청이네.”
“뭐, 뭣? 똥멍청……!”
여신우의 표정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버릴 것처럼 뺨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딴 생각으로 어디 가서 장사할 생각은 하지 마.”
“이 시건방진 애송이 새끼가…….”
“어차피 돌려줘야 할 돈을 받은 대가로 보이나?”
“…….”
“계산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당신들이 한 번 굴욕을 참으면 이천만 냥을 버는 거야. 거기에 당신들이 원하는 덤이 하나 더 붙는 거고. 이 정도면 당신들에게 결코 불리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땅을 파봐. 어디 이천만 냥이 나오나? 단 두 냥도 찾기 어려울걸?”
“그건 네놈 생각……!”
여신우가 으르렁거리는데 류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신우가 어금니를 꾹 깨물고 고개를 휙 돌리자, 류난이 빙그레 웃으며 남궁천을 보았다.
“확실히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은 아니군. 다만 생각보다 금액이 많아서 조금 놀랐을 뿐.”
“어차피 금액이 더 많아도 상관없을 텐데. 당신들 돈을 내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받기로 한 오백만 냥만 받는 거고.”
“좋아, 이미 거래하기로 한 문제니까 다시 번복하진 않는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조건은 자네도 알고 있을 터.”
“아, 덤?”
“듣기 불편하군.”
모처럼 류난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워낙 평소에 부드러운 인상을 보였기에, 그 모습은 언뜻 주변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에이, 그렇게 분위기 잡지 말고. 일단 그 영감은 아직 잘 살아 있어. 다만 몸이 썩 좋지 않아.”
“그 정도 정보는 알고 있네.”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자, 여기.”
남궁천이 이번에는 또 다른 책자를 툭 던져두었다.
류난이 차분한 손길로 책자를 펼쳐 들고는 빼곡하게 적힌 이름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중 하나의 이름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차양검(遮陽劍) 이휘명.
그 이름을 천천히 곱씹는 류난의 눈빛에 모종의 감정이 요동친다.
남궁천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여튼 알고 보면 단순한 녀석이라니까.’
류난이 저런 사내다.
그 누구보다 은원관계가 확실한 자. 은인에게는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원수에게는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보다도 냉철하게 대한다.
그래서 강호에 어울리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강호에 어울리는 자.
이렇듯 단순하지만, 그 누구도 류난을 알고 난 후엔 원수 질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우선은 원수로 지내기엔 아까운 인간이다.
남궁천 역시 전생에서 류난과 지냈던 시간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그와 술 한잔 기울이며 석양을 볼 때면 세상 근심이 한 잔의 술에 녹아버리는 듯했다.
묘한 사내였다.
굳이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저 같은 광경을 보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대.
하나 그가 마음을 닫아버리면 북해빙궁의 빙벽보다도 시리고 차갑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네가 이런 전쟁을 일으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건 역시 차양검 때문일 거라 생각했지.’
남궁천이 명부에 적힌 차양검의 이름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양검 이휘명.
그는 류난의 대부였다.
어려서부터 류난을 거둬서 먹이고 재워주며 무공을 가르쳐 준 자였다.
하지만 그는 무림공적으로 내몰렸고, 결국 끈질긴 추격전 끝에 사로잡혀 뇌옥에 갇히고 만 것이다.
류난은 이에 격분하여 흑무곡에서 나와 무림맹을 친 것이고.
물론 류난은 그간의 무림맹 횡포에도 심기가 불편한 상태이긴 했다. 그래도 그의 성격상 대부인 이휘명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무시했을 거다.
심지어 자신이 무림공적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어도 그러려니 했을 거다.
류난은 그런 남자다.
한데 하필 무림맹이 이휘명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니 나설 수밖에.
그 누구보다 은원관계가 확실한 류난이니까.
전생에 류난은 진천랑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자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글쎄. 어떤 분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 워낙 일찍 돌아가셔서.”
“자네 인생도 엿 같군.”
“저주받은 운명이지. 킬킬.”
“만약 무림맹이 내 아버지를 건드린다면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걸세.”
그 말을 하던 류난의 눈빛에는 남궁천이 지금도 쉬이 잊기 힘든 강렬함이 들어 있었다.
‘뭐, 그 덕분에 이휘명을 명부에서 찾아낸 것이기도 하지만.’
남궁천이 다시 시선을 들어 류난이 들고 있는 명부를 보았다.
신년 특사로 지명될 이들이 적힌 명부.
차양검 이휘명을 신년 특사로 지정하여 석방하는 것.
그것이 류난이 남궁천의 제안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핵심 조건이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류난에게는 오히려 삭감되는 이천만 냥 쪽이 덤이 되는 셈이었다.
마침내 류난이 물었다.
“얼마나 사실 것 같은가?”
“왜? 얼마 못 살면 그냥 뇌옥에서 뒈지게 놔두려고? 거래는 없던 걸로 하고?”
“…….”
순간 류난이 고개를 들고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일순 한기가 휘몰아친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 삭막한 기운이 전신을 음습한다.
“농담이야, 농담.”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거, 성격 지랄 맞기는.
그제야 류난이 다시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니미럴, 기분 변화가 거의 백무극 수준이네.’
남궁천이 내심 핀잔을 던지고는 입을 열었다.
“의원 말로는 앞으로 반년도 살지 못할 거라더군. 병세가 꽤 진행된 상황이야.”
남궁천이 솔직히 말해주었다.
이휘명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대로 둘 류난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류난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스민다.
아마도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회한이리라.
그래도 류난은 남궁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전쟁을 해서 무림맹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이휘명이 옥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노후를 편안하게 해주려면 남궁천과 거래를 해야만 한다.
거기에 이천만 냥 삭감.
확실히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어차피 모든 일의 화근인 무림맹주도 죽었으니,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으리라.
‘뭐, 그건 류난의 특기니까 알아서 하겠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류난 아니던가?
그 정도는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이윽고 류난이 책자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제안대로. 사흘 후, 용상회가 열리면 지체 없이 찾아가도록 하지.”
“잘 생각했어.”
남궁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강렬한 인상도 남길 수 있도록 금괴로 바꿔 와. 그게 보기도 좋잖아?”
* * *
어두컴컴했던 장내가 눈부시도록 밝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전히 어둡지만, 마당 복판에 쏟아진 금괴만큼은 찬란하게 반짝인다.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사천만 냥이라니…… 사천만 냥!
우위광은 자신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는 사실조차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저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서는 수레에서 쏟아져 나온 금괴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게 정말 사천만 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눈에 척 보기에도 이천만 냥은 족히 넘어 보인다는 게 문제다.
허! 천만 냥도 내놓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정말 사천만 냥을 내놔?
저것들이 미쳤나?
혹시 가짜 금은 아닌가?
그래, 도금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우위광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쏟아진 금괴 가까이 걸어갔다.
스윽.
그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금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묵직하다.
확실히 금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나 믿을 수 없다.
설마 이게 진짜 금일 리가.
그럼 안 된다.
정말 남궁검과 남궁천 말대로 이천만 냥, 아니, 사천만 냥을 내놓는다고?
‘금일 리가 없지!’
차앙!
매끄럽게 검을 뽑아낸 우위광이 한 손에 든 금괴를 휙 집어 던졌다.
곧이어 그가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쉬쉬쉬쉭!
금괴가 일순간 열여섯 등분으로 나뉘었다.
놀랍도록 균일하게 갈라진 금괴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유 당주!”
“예? 예, 원주님!”
“확인하게!”
우위광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천우당주 유백랑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갈라진 금괴를 주워 들었다.
“곧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유백랑이 금괴를 횃불에 비춰 이리저리 살피고 송곳니로 살짝 깨물어보기까지 했다.
그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우위광을 돌아보았다.
“금괴…… 맞습니다.”
“……!”
“이 정도의 양이면…… 확실히 사천만 냥 정도는 될 듯합니다.”
유백랑 역시 놀랐는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자, 그럼 흑무련 쪽은 해결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