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03화 (402/508)

403. 시간 좀 주시죠?

장내가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였다. 그들은 마치 고요한 태풍의 눈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연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천만 냥!

제정신인가?

절로 드는 생각이다.

천만 냥이면 무림맹 일 년치 예산이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한데 이천만 냥이라니.

액수도 액수지만, 이건 대놓고 흑무련을 장악하겠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니, 그보다 흑무련에 그만한 돈이 있기나 한 건가?

이제 막 기강을 다잡아가는 흑무련이다.

곳곳에 쓰일 돈도 많을 거다.

대체로 조직이 처음 생기게 되면 여기저기 돈이 물 새듯 쓰이는 법. 때문에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허다하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내실은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더구나 지금 흑무련이 돈을 내게 되면 백 냥도 의미가 남달라진다.

굴복의 뜻과 마찬가지니까.

‘허참, 이건 뭐 개념이 없는 건가?’

우위광이 내심 허탈한 조소를 지었다.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맹주 남궁검이었다.

맹주가 꺼낸 말이니 다른 사람이 번복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장내의 사람들은 저마다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는 남궁검만 볼 뿐이다.

그저 흑무련주 류난만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남궁검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올 테지.’

우위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건 뭐 적당히 불러야 상대가 되든 하지.

하긴. 남궁가는 지난 수십 년간 바닥을 기었던 가문이 아니던가? 이제야 막 수면 위로 떠오르다 보니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 것이리라.

‘그래도 그렇지 이천만이라니…… 클클.’

이천만 냥이 뉘 집 똥개 이름인가?

혹시 바닥만 기어다니던 가문이 갑자기 돈을 준다니까 눈이 뒤집히기라도 한 걸까?

‘천박하군.’

내심 혀를 찬 우위광이 한편으로는 좋게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흑무련주에게 면박을 줄 생각이었는데, 남궁검이 알아서 대신 해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나?

흑무련은 이대로 뻥 걷어찰 수 있을 테고,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린 남궁검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기껏 먼저 찾아와 화친의 뜻을 전한 흑무련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퇴짜를 놓은 셈이니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우리라.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남궁가가 알아서 퇴장하겠구나.’

구파일방의 인사들과 다른 장로 및 수뇌인사들 역시 우위광과 다르지 않은 생각이었다.

심지어 남궁검에게 호의를 가진 수맹당주조차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맹주님이 아직 감을 잡지 못하셨구나. 화친에 대한 성의는 백만 냥이어도 충분했을 터인데.’

어차피 성의라는 것이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성의를 이용해서 배를 채울 생각을 하면 화친이고 뭐고 틀린 것이다.

‘모처럼 기회가 찾아온 것인데 안타깝군.’

수맹당주 곁에 앉은 남문각주 천무류 역시 비슷한 생각에 잠겼다.

다만 그는 남궁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지금껏 그가 지켜본 남궁천이라면 세상 물정에 그리 어두운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 물정에 너무 빠삭해서 나이답지 않게 영악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남궁천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

마치 남궁검이 그 정도는 부를 줄 알았다는 듯이.

‘뭔가 뜻이 있는 건가?’

천무류의 시선이 다시 남궁검에게 옮겨갔다.

잠시간의 정적을 음미하듯 침묵하던 남궁검이 천천히 옆을 돌아보며 묻는다.

“어떻습니까? 원주님. 화친에 대한 성의로 그 정도라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하다마다. 그걸 말이라고?

‘다만 그걸 내놓을 만큼 정신 나간 인간이 없다는 게 문제지.’

우위광이 내심 고소를 머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흐음. 확실히 이천만 냥이면 긍정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소.”

“역시 그렇군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흑무련주 류난을 보았다.

“어떻소? 흑무련주.”

“흐음. 꽤 지극정성을 들이길 원하시는군요.”

“그간 흑무련으로 인해 본 맹이 피해를 본 것에 대한 보상으로 보면 좋을 것 같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두 조직이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피해 본 조직에게 보상을 한다니? 게다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천만 냥은 확실히 과하다.

그걸 의식한 것인지 남궁검이 생소한 개념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피해 보상도 포함되었소.”

“이천만 냥이라.”

류난이 가만히 중얼거린다.

그 모습을 본 우위광이 입매를 슬쩍 비틀었다.

‘어이가 없을 테지.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대가 시기를 잘못 맞춰 찾아온 탓이지.’

그런데 한참을 고민하던 련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뜻밖의 대답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당장 드리긴 어려우니, 준비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류난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자신에겐 지금 자금이 없다는 걸 보여주듯.

다만 이러한 대답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겠다고? 이천만 냥의 성의 표시를 하겠다고? 저것도 정신이 나갔나?’

우위광이 눈을 부릅떴고, 다른 수뇌인사들과 구파일방에서 온 손님들도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었다.

하나 우위광은 곧 흑무련주의 속셈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저 시간을 벌 생각이구나. 애초에 화친의 뜻이 없었던 게야. 감히 본 맹을 능멸하려는군.’

그가 옆을 슬쩍 돌아보니 남궁검의 표정에도 아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우위광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게 바로 사파가 아니었소? 그 말을 어찌 믿고 덜컥 화친을 맺는단 말이오? 본 맹은 믿을 수 없소.”

그러자 류난이 우위광을 무심한 눈으로 돌아보더니 물었다.

“그쪽은 누구신지…….”

“……!”

우위광이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련주 놈이 감히 나를 무시하는구나! 누가 실세인 줄도 모르는 놈 같으니!’

내심 발끈한 우위광이 화를 눌러 참으며 대꾸했다.

“무림맹 장로원주 우위광이라고 하오.”

“아, 그렇군요. 한데 결정은 맹주님이 하시는 게 아닌지요? 무림맹은 맹주님보다 일선에서 물러난 장로님들이 주로 실정을 담당하시는지?”

콰앙!

순간 장로들 중 하나가 탁자를 부서져라 내리치며 불쑥 일어났다.

“그대는 어찌하여 본 맹을 이간질하려는가! 진정 화친의 뜻을 맺으러 왔다면 용건만 간단히 말해도 될 것을!”

“아, 이간질이었습니까? 저는 제 뜻을 확실히 결정권자에게 전하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그럼 어느 분에게 말씀을 드리면 될까요? 본 련과의 문제에 대한 최고 결정권자는 누굽니까?”

류난이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원주에게 매수된 장로들은 내심 부글부글 끓었다.

이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남궁검 맹주를 자신들의 입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나 우위광은 곧바로 차분한 이성을 되찾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본 맹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여기 남궁검 맹주님이오. 나는 그저 궁금증이 도져서 말을 했을 뿐이오.”

“아, 그렇군요. 그럼 말을 마저 이어가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이천만 냥을 드리지요.”

우위광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정 그렇다면 천만 냥으로 낮춰 드릴 수도 있소.”

이런 끼어들기라면 저쪽도 대환영이리라.

어차피 천만 냥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흑무련이 당장 준비할 수준이 아니리라.

그럼에도 이런 말을 굳이 한 이유는 장로원주가 이 화친을 성사시키려고 금액을 절반이나 낮췄다는 말은 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남궁검이 다시 불쑥 나서는 게 아닌가?

“아니. 금액을 깎아드릴 순 없소. 처음 그대로 이천만 냥을 내야 하오. 그 정도는 되어야 피해 복구도 하고, 앞으로 본 맹이 마교와 맞서는 데 필요한 비용들도 충당할 수 있소.”

다시 한번 좌중이 술렁인다.

기껏 장로원주가 조금이나마 길을 열어주었는데, 그걸 다시 닫아버렸다는 투다.

우위광은 기가 찬 표정으로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허어, 이젠 알아서 밥그릇을 걷어차는구나.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군.’

남궁검의 표정이 세상 단호하다.

그 터무니없는 금액에 몇몇 장로들은 툴툴 웃어버리기까지 한다.

이에 류난이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더니 다시 묻는다.

“시간을 잠시도 줄 수 없다는 겁니까?”

이번에도 우위광이 나섰다.

“맹주님이 안 된다고 하시지 않소?”

“잠시의 시간을 주신다면 준비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서 얼마나?”

“반각 정도면 충분합니다만.”

“우리가 흑무련을 어찌 믿고 반각이나 기다…… 으응……? 반각?”

순간 우위광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반각이라고? 반년도 아니고?

“네, 반각입니다. 갑자기 그 많은 돈을 여기서 쏟아낼 순 없지 않습니까? 보다시피 지금은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라.”

“한데 반각이면 된단 말이오?”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장내가 다시 한번 격하게 술렁거렸다.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소란이 일어났다.

반각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러자 청풍이 탁자를 거칠게 쾅 내려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흑무련주! 그대는 진정으로 하는 소린가? 이 자리에서 그런 재미없는 농을 하다간…….”

“진담입니다만. 아까부터 왜 자꾸 무림맹과의 일에 외부인이 끼어드는지 모르겠군요.”

“뭣이? 자네가 정말 반각의 시간에 이천만 냥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소만.”

류난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는다.

졸지에 장내 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얼어붙었다.

이번엔 우위광이 목을 가다듬고 나섰다.

“반년이 아니라 반각이란 말이오?”

“예, 반년을 어찌 기다리시겠습니까? 보아하니 성격들이 급하신 것 같은데.”

“허어!”

우위광이 헛바람을 뱉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것들이 집단으로 미친 건가?

오냐,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흥! 좋소. 반각의 기회를 드리지! 단, 반각의 시간 내에 이천만 냥을 준비하지 못하면 화친은 물 건너간 것으로 아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서둘러 준비하지요. 지강.”

“예, 련주님.”

“준비해.”

“알겠습니다.”

지강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정문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지강.”

“예?”

“이왕이면 번거롭지 않게 넉넉히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련주님.”

지강이 희미하게 웃고는 정문을 나섰다.

후우웅. 후우웅.

잠시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보다 반각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마당 곳곳에 피워둔 횃불과 탁자마다 놓인 촛불만이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마침내 정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으로 덮은 수레를 끌고 낑낑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절반은 흑무련의 무인들 같았고, 나머지 절반은 무림맹 소속이었다.

마침내 수레가 류난 옆에 멈춰 서자, 사람들이 웅성임을 멈추고는 숨을 죽였다.

류난이 남궁검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본 련의 성의를 보여 드리지요.”

남궁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위광도 입을 꽉 다문 채 류난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꿀꺽……!

이상하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절대 긴장할 일이 아닌데.

‘진짜 이천만 냥을 내놓겠다고? 대체 무슨 꼼수를 쓰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지! 만약 쓸데없는 액자 따위를 내놓으면서 이천만 냥의 가치라며 사기라도 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무조건 현금이어야 한다. 보화 따위는 가짜가 많지 않던가?

마침 류난이 턱짓을 하자, 두어 명의 무인이 수레를 기울이더니 덮고 있던 천을 휙 걷어치웠다.

동시에 수레 안에 가득 실려 있던 묵직한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순간 눈부시도록 환한 빛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우위광은 물론,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누군가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금, 금괴가…….”

수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틀림없는 금괴였다.

이천만 냥이 족히 넘어 보이는!

류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천만 냥이면 긍정적으로 검토하신다기에 아예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이천만 냥의 두 배, 사천만 냥을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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