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시간 좀 주시죠?
“뭐라고? 누가 왔다고?”
우위광이 이맛살을 한껏 구기며 다시 물었다.
무인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흑무련주가 본 맹을 찾아왔습니다.”
“……!”
좌중은 다시 한번 얼음물을 덮어쓴 것처럼 침묵했다. 정말이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모두 호흡도 멈춘 채 입을 딱 벌리고서는 보고를 올린 무인을 보았다.
그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금…… 흑무련주라고 한 게 맞나?’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가만, 흑무련주가 여길 왜 와?’
‘정말 화해의 손길이라도 내밀려고 온 건가? 그럴 리는 없겠고.’
‘다른 사람을 오해한 건 아니야?’
이런 생각들은 우위광의 머릿속에도 왕왕 울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데, 가장 먼저 나서며 질문을 던진 자는 바로 청풍진인이었다.
“자네, 방금 흑무련주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흑무련주가 다른 무인들 몇을 데리고 지금 무림맹 정문에 도착해 있습니다!”
“혹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본인 입으로 흑무련주 류난이라 하였습니다!”
“……!”
이제야 장내의 다른 사람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은 도검을 뽑아 들며 격분했다.
차차앙!
“아니, 이 개 같은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타나!”
“머릿수는 얼마나 되느냐!”
“부상자는 없는가!”
“모두들 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춥시다!”
순식간에 회의장이 난리법석으로 변했다.
갑자기 분주한 상황을 본 무인이 당황하더니 얼른 양손을 내밀면서 소리쳤다.
“잠, 잠시만요! 흑무련주는 전쟁을 하기 위해 온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장로 중 하나가 날을 세우며 소리쳤다.
“흥! 그럼 뭐 하러 온 것이라더냐? 염탐을 왔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이더냐!”
“그, 그건 아니고…… 본 맹과 화친 맺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기어이 본 맹과 화친을…… 응? 뭘 청한다고?”
“화친…… 입니다.”
“화친이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 화친이 맞나? 사이좋게 지내고 뭐 그런……?”
너무 어이가 없는 탓에 장로가 거듭 풀이하듯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궁천의 말을 한껏 비웃고 있지 않았던가?
한데 그러기가 무섭게 흑무련이 화친을 청한다며 찾아왔다니. 어찌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리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화친이라니?”
“흑무련이 화친을 먼저 청해왔다고?”
“이게 말이 되는 경우인가?”
“정말로 흑무련이 먼저 찾아올 줄이야. 도대체 흑무련 입장에서 뭐가 아쉬워서?”
“혹시 전임 맹주에게 빚이라도 진 걸까요?”
이젠 엉뚱한 추측까지 쏟아져 나온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빚이라면 나한테 있었지. 그걸 탕감해 준 것도 나고.’
남궁천이 속내를 감추고는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거 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흑무련주가 정말 나타날 줄이야. 일단 만나보는 게 어떠세요? 게다가 화친을 맺으러 왔다고 하니 딱이네요. 원주님도 그러셨잖아요? 흑무련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면 대환영이라고요.”
우위광이 뺨을 부들거리면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이 간사한 놈이……!’
이제야 우위광은 남궁천을 다시 보았다.
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찾아와? 마침 정말 나타나서 딱이라고?
기가 찬 녀석이 아닌가?
이걸 정말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물론 남궁천에게는 천운이 따르는 것 같단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며칠 전 뇌옥에 갇힌 호법당주를 찾아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남궁천 그놈은 정말 하늘이 돕는 녀석이었습니다. 게다가 만독불침지체더군요! 아니,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만독불침지체가 될 수 있지요? 게다가 정말이지 기적처럼 천운이 따르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더군요!”
호법당주는 말을 하면서도 어딘지 두려움에 떠는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남궁천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얼굴이었다.
‘흥, 천운이라.’
과연 이게 운이라고?
천만에!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네놈이 흑무련과 진작 내통한 상태였구나!’
물론 증거는 없다.
그저 심증이 있을 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림맹과 전쟁을 하던 흑무련이 느닷없이 화친을 요청하겠나?
마침 정혜 사태가 우위광을 돌아보며 전음을 날려왔다.
[원주, 어떻게 하실 건지요? 하필 지금 흑무련주가 나타날 줄이야. 시기가 이상하리만치 묘하군요. 우연은 아닐 테지요?]
[흐음. 아무래도 남궁천과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소.]
[역시. 나도 그리 생각합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나름 잔머리를 굴리는 녀석이군요.]
[흥, 그래 봐야 흑무련을 먼저 찾아가 고개를 조아렸을 게 뻔할 터. 오히려 잘된 것인지도 모르겠소. 이 기회에 우리가 흑무련주를 강도 높게 압박하면 먼저 부탁을 한 남궁천의 처지가 난감해질 터.]
[역시 좋은 생각이군요.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흑무련주도 망신을 줄 수 있고, 남궁천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겠어요.]
정혜 사태가 빙그레 웃자, 우위광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남궁천은 난리법석이 난 와중에도 우위광과 정혜 사태가 전음입밀을 주고받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전음이란 결국 어기전성과 달리 기에 소리를 실어 보내는 수법이다. 즉, 입술을 움직여 미약하게나마 발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달싹이는 입술만 보고도 그들이 은밀히 대화 중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래 봬도 이 몸이 눈칫밥만 수십 년이란 말이지.’
그렇게 한참이나 소란 속에서 전음을 주고받더니 우위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명령했다.
“흑무련주를 이곳으로 안내해라.”
“예, 원주님!”
맹주가 아닌 원주가 나서서 말한 것이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원주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작정을 했기에.
잠시 후, 흑무련주와 흑무련 총군사인 지강이 차분한 표정으로 장로원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실제로 본 맹원들과 구파일방의 수뇌들이 두런거리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장내 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두 사람은 동시에 포권을 하며 차례로 인사말을 전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검 맹주님! 흑무련주 류난입니다.”
“흑무련에서 군사직을 맡고 있는 지강입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서들 오시오.”
반면 옆에 앉은 우위광은 내심 불쾌함을 느꼈다.
버젓이 자신이 앞에 앉아 있음에도 저 두 사람이 일별조차 주지 않은 채 남궁검에게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멍청한. 누가 실세인지도 모르는군.’
은근한 노기는 그렇게 조소로 바뀌었다.
남궁검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앞서 보고를 듣긴 했으나 직접 들어보고 싶소. 두 분은 무슨 용무로 본 맹을 찾아온 것이오? 오늘 본 맹이 용상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물론입니다. 구파일방의 대협들께서 모이시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귀머거리도 알 만한 사실이지요.”
“하면 용상회가 열리는 줄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본 련은 귀 맹과 화친을 맺고자 합니다. 그간 강호에 흘린 피가 적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화친을 맺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나아가 준동하는 마교 진압에 힘을 모으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남궁천이 말한 그대로의 진술이 아닌가?
장로를 비롯한 백도 무림의 인사들이 술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혹시 남궁천이 정말 저들을 설득한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저 인간들을 구워삶은 거지?’
물론 그 내막을 따지자면 흑무련이 살곡을 찾아가 청부한 사실부터 얘기해야겠지만, 이런 정황을 다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반면 우위광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아니, 조금 전에 정혜 사태와 전음으로 나눴던 것처럼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우위광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성질 급한 정혜 사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흥! 그간 당신들은 백도 무림을 향해서 칼을 겨누어 왔는데, 이제 와서 대뜸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다른 뜻이 있었다면 이렇게 적지에 대책도 없이 찾아오진 못했을 겁니다. 정 믿기 어렵다면 마교를 제압할 때까지만 손을 잡는 것은 어떨지요?”
“마교가 준동한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어찌 알았지?”
피식.
류난이 조소를 머금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
“지금 무림맹 정문에 효시 된 전임맹주 덕분이지요. 전임 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은 이미 세간에서 지겨울 만큼 회자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백도 무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맹주가 마교와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기에.
“사실 본 련이 무림맹과 전쟁한 것은 전임 맹주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습니다. 터무니없는 공적 사냥과 무차별한 사파 탄압에 대한 불만이었지요.”
“터무니없는 공적 사냥이라니? 하면 자네들은 무림 공적을 가만히 지켜만 봐야 한단 말인가!”
“진정한 공적이라면 잡아 죽여야지요. 하지만 무림공적 일 호인 진천랑 대협은 어땠습니까? 무림공적이었습니까?”
“끄음…….”
“여러분도 이젠 아시다시피 그저 무림맹의 표적이었을 뿐입니다. 하나 지금은 맹주님도 바뀌었으니 본 련도 귀 맹에 대한 기대를 걸어보고자 하는 겁니다. 저희들로서도 마교라는 존재는 몹시 껄끄러우니까요.”
“하지만 당신들은……!”
“그 전에.”
“……?”
“아까부터 계속…… 누구시죠?”
“……!”
“죄송합니다. 제가 견식이 짧아서 말입니다.”
류난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정혜 사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침 정혜 사태 뒤에 서 있던 여승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이분은 아미파의 정혜 사태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이제부터 기억하겠습니다.”
하! 이제부터 기억해?
한마디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다는 투가 아닌가?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딱히 콕 집어서 따질 수도 없는 부분.
그러자 이번엔 청풍이 넌지시 나섰다.
“련주의 뜻은 잘 알겠소. 하나 우리로서는 련주의 진심을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오. 적어도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신뢰하기 힘드오.”
마침내 본론이 나왔다.
우위광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사실 이러한 성의 문제는 맹이 직접적으로 꺼내기에 체면 문제가 있었다.
한데 청풍진인이 적당한 시점에 말을 잘 꺼내준 것이다.
‘그럼, 어디 성의를 보여주실까?’
과연 흑무련이 얼마나 내놓을 수 있을까? 십만 냥? 백만 냥? 아니면 이백? 삼백?
사실 액수도 액수지만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단돈 한 냥일지라도 흑무련이 무림맹에 건네주게 되면 어디까지나 ‘상납’의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위 조직이 상위 조직에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행위랄까?
말이 좋아 화친이지 금전이 오가는 순간 굴복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마침 정혜 사태가 원주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원주님, 최소 천만 냥은 되어야 할 겁니다.]
[물론이오.]
누가 들었다면 기겁할 액수다.
천만 냥.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말이 천만 냥이지, 그 정도면 무림맹 일 년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다.
마침 류난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어느 정도의 성의면 본 련과 화친을 맺어주시겠습니까?”
호오, 이런 정도의 굴욕도 감수하시겠다?
우위광이 조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최소 천…….”
“최소 이천만 냥은 되어야 하오.”
순간 불쑥 들린 음성에 우위광이 기겁을 하며 돌아보았다.
‘이, 이천만……? 미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