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시간 좀 주시죠?
순간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찻잔을 들어 마시던 장로 한 명은 사레가 걸렸는지 격하게 기침을 하다가 주변 눈치를 슬쩍 살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장로원주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 보니 남궁천이라는 녀석은 뭣도 모르고 설쳐대는 천둥벌거숭이였구나. 오히려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상대는 남궁검이었던가?’
그가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남궁검을 슬쩍 보았다.
남궁검이야 워낙 돌 같은 표정이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 저렇게 대책 없는 손자를 거둬서 키우려니 속이 오죽 썩어 문드러졌을까?
보아하니 제 부모의 재능을 이어받아서 무공에 재능은 있나 보다.
하지만 저리 뭣도 모르고 설쳐대니 그간 가슴앓이 좀 했을 터다. 지금만 해도 되지도 않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가?
남궁검이 지금이야 저리도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애간장이 녹아 흐르리라.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뭐? 그럼 흑무련 문제부터 해결하죠, 뭐?
이게 지금 동네 파락호들 정리하는 일로 보이는 건가?
‘무공만 뛰어날 뿐 머리는 여전히 어린애로군.’
호법당주도 어이가 없다. 저런 대책 없는 녀석 하나 제어하지 못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다니.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호되게 나무라야겠다.
물론 남궁검이 뒤에서 남궁천을 조종한 것이겠지만, 살곡에 의뢰를 하려면 애초에 남궁검을 죽여달라고 하던가?
하긴. 자신만 해도 처음에는 남궁천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니.
긴 생각을 갈무리한 우위광이 가소로운 웃음을 머금고는 물었다.
“그래, 우리 적랑단주께선 흑무련 문제를 어찌 해결하시려는가?”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마치 손자뻘을 상대한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물론 나이로 따지면야 손자뻘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남궁천은 적랑단주였다.
용상회는 공식적인 자리였고.
그럼에도 이렇게 아이 다루듯 묻는 것은 구파일방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나 남궁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제 주제에 어찌 얕은 생각을 함부로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 전에 원주님의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흐음?”
우위광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놈 같으니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뭣도 모르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굴더니 이젠 제법 예를 갖춰서 사람을 떠볼 줄도 알지 않은가?
도대체 뭐가 진짜 모습이지?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남궁천을 확실히 기 죽이면 될 일.
“흑무련은 지금 북측을 장악하고 소림과 화산, 그리고 종남까지 봉문하게 만들었네. 결코 만만히 볼 조직이 아닐세.”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흑무련을 어찌 하루아침에 정리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야겠죠.”
‘흥, 하나 마나 한 말을 쏟아내는군.’
내심 냉소를 지은 우위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차차 해결해 나가야겠지. 하루아침에 해법이 나올 문제가 아닐세.”
“에이, 그래도 귀찮고 걸리적거리는 건 미뤄봐야 좋을 게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당장 그리 큰 조직을 없앨 방도는 없지 않겠나?”
“그렇죠. 당장 그 큰 조직을 어찌 없애겠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길게 보고 생각해야지. 흑무련 문제는 차차 논의하세.”
“에이, 그래도 어려운 문제일수록 미루지 말고 일찌감치 해결해야죠.”
아니, 이 새끼는 왜 말이 안 통해?
우위광이 약간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입으로 흑무련을 뿌리 뽑기는 어렵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야!’
말귀를 못 알아먹는 녀석인가?
우위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어려운 문제를 풀 방도를 알겠나? 흑무련을 당장 뿌리 뽑을 방법을 알겠는가?”
“그건 모르죠. 제가 전지전능한 것도 아닌데. 흑무련을 어찌 뿌리 뽑겠어요?”
“그러니 천천히 해결을 하자는 것 아닌가?”
“하지만 흑무련이 제일 시급한 문제라면서요. 그러니까 빨리 해결해야죠.”
“…….”
“…….”
우위광은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반복…….’
그가 파들거리는 뺨을 진정시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적랑단주.”
“예, 원주님.”
“당장 흑무련을 제거할 방법이 없으니,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접근하자는 것 아닌가? 내 말을 이해 못 하겠나?”
“아뇨,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흑무련은 더 견고해질 테니 빨리 해결하자는 거죠.”
아니, 이 새끼가 진짜 장난하자는 건가?
우위광이 눈썹을 사정없이 꿈틀거리다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니까! 자네에게 묻지 않았나! 흑무련을 뿌리 뽑을 자신이 있느냐고!”
“없습니다! 말했잖아요!”
“아니, 그런데 뭘 어떻게 해결하자는 것이야!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야!”
결국은 분이 우위광이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남궁천이 손을 뻗으면서 진정시켰다.
“워어, 워. 일단 진정하시고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왜 흑무련을 뿌리 뽑을 생각만 하시냐고요?”
“뭐라? 자네 입으로 해결하자며?”
“그것도 말씀드렸잖아요.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고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게!”
“자자, 진정하시고요. 이래 봬도 제가 평화주의자라서요. 제 생각은 흑무련과 평화협정을 맺자는 겁니다.”
“……!”
순간 장내가 경직됐다.
쾅!
거친 소리가 울린 것은 구파일방의 수뇌인사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탁자를 내려친 청풍진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보겠군! 흑무련과 뭘 맺어? 내 비록 지금까지 무림맹의 일에 관여하진 않았지만, 흑무련이 백도무림을 휘저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들었다! 한데 그런 놈들과 평화 협정을 맺자고? 자네 미친 건가!”
기다란 눈썹이 푸들푸들 떨린다.
남궁천이 청풍을 가만히 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흑무련은 우리의 적입니다. 하나 지금은 흑무련도 얌전히 지내고 있어요. 딱히 힘없는 양민을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군사님?”
남궁천의 질문에 총군사 제갈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소. 현재까지 북측에서 흑무련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정보는 없소. 그건 개방에서도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오만.”
“히꾹, 꺼어억! 뭐, 들어본 적 없네.”
만취개의 성의없는 대꾸에 제갈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차라리 흑무련을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흑무련을 이용해?”
“예, 지금 진짜 문제는 흑무련보다도 마교입니다. 마교가 준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묵천악은 마교와 은밀히 교섭하면서 그들의 힘을 키우는 데 일조했지요.”
“그래서?”
“본 맹이 마교와 부딪치면 정말 위험해진다는 겁니다. 만에 하나 흑무련이 그 틈을 타서 남침을 하면? 무림맹은 끝장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흑무련과 본 맹이 손을 잡는 게 낫다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정사가 손을 잡다니! 있을 수 없는……!”
“왜요? 역사에서 그런 경우는 많았잖아요? 당장 미운 정이 쌓였다고 죽을 각오를 한답니까?”
“뭐라?”
“시야를 넓게 가져야죠. 삼국시대에도 촉나라는 오나라와 손을 잡고 위나라에 대항했습니다.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죠.”
그러자 이번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혜 사태가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로구나.”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들을 초청한 우위광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확실히 구파일방까지 나서서 압박을 하니 보기에도 좋지 않은가?
만약 이 자리에서 장로들만 나서서 기를 쓰고 반대를 한다면, 자칫 정책 토론이 아니라 그저 기득권 지키기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점을 예방하기 위해 구파일방의 인사들을 초빙한 것이기도 했다.
“뭐가 가소로운 거죠?”
남궁천이 따박따박 따지듯 묻자, 정혜 사태가 눈을 치뜨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한 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지.”
“뭡니까?”
“첫째, 결국 촉나라와 오나라는 각자의 길을 가며 적으로 돌아섰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될 문제입니다. 당장은 마교를 제거할 때까지만이라도 손을 잡자는 겁니다.”
“하나 두 번째 문제는 더 어려운 부분이지.”
“뭡니까?”
“과연 흑무련이 자네 생각에 동의하겠느냐지. 자네가 내민 손을 흑무련이 덥석 잡을 것 같은가?”
“해보지 않고는 모르죠. 흑무련 입장에서도 마교는 껄끄러운 존재일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거기엔 더 큰 문제도 있다.”
“한 번에 말씀하시지…….”
“무림맹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백도무림의 어떤 무인도 동의하지 않을 거란 말일세. 잘못을 저지른 흑무련이 먼저 다가와도 손을 잡을까 말까 한데,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어? 그건 무인이 아닌 양민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걸세.”
이번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던 것인지 장내의 무인들이 저마다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백도무림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체면과 자존심도 버린 채 흑무련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깟 체면이 뭐라고…….”
“뭣이? 지금 뭐라고 했나?”
정혜 사태가 눈썹을 성큼 추켜올리고는 따져 물었다.
남궁천이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제 생각에는 체면 따위보다는 강호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흑무련에게 먼저 화해하라고 말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여기저기 툴툴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혜 사태도 어이가 없는 것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자네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흑무련이 고분고분 무림맹의 말을 들을 것 같은가?”
“혹시 모르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거금을 들고 찾아와서 화해의 손길을 청할지도요.”
“흥! 이쯤 되면 어린 건지, 멍청한 것인지 모를 지경이군!”
정혜 사태가 노골적으로 비웃자, 다른 수뇌 인사들도 고개를 저으며 남궁천을 비웃었다.
이쯤 되자 지켜보던 우위광이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랑단주. 자네의 소녀 같은 마음은 내가 잘 알겠네. 그 고운 마음은 높이 사네.”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와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남궁천은 이 자리에서 조롱거리가 된 상황이었다. 지켜보기만 하던 천우당주 유백랑은 내심 시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지난날 나와 만날 때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저런 애송이에게 농락당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우위광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강호인에게 온정이야말로 필요한 덕목이겠지. 하나 자네처럼 소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다간 일찍 죽기도 십상일세. 어려서부터 무공이 뛰어나다 보니 남들이 모두 자네 앞에서 굽실거린 모양이군. 그러니 이렇게 장밋빛 미래만 꿈꾸는 게 아니겠는가?”
“뭐, 그렇다 치고 들어봅시다.”
“자네가 제시한 방법은 매우 훌륭하네. 자네 말대로 그렇게만 되면 오죽 좋겠는가? 하나 흑무련은 절대 본 맹에 먼저 숙이고 들어오지 않을 걸세.”
“숙이고 들어오면 어쩔 건데요?”
“그야말로 대환영이겠지. 그러나 그들이 정말 숙이고 들어오는지 어떤지는 성의를 봐야 알 수 있겠지.”
“성의라면……?”
“글쎄. 요즘 같은 세상에 성의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면 금전적인 부분일 테지.”
“화해의 뜻으로 약소하게나마 돈을 내라?”
“뭐, 그리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좀 그렇긴 하네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닐세. 그건 화친의 증표랄까?”
“그 증표도 들고 와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
허, 뭐 이런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이젠 기가 막혀서 비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우위광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드러내며 말했다.
“자네 말만 들으면 마치 당장에라도 흑무련이 돈을 들고 찾아올 것 같…….”
콰당!
순간 장로원 문짝이 부서져라 열리면서 무인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우위광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무인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와, 와, 왔습니다!”
“뭐? 뭐가 와?”
“그…… 흑무련주가 찾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