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00화 (399/508)

400. 난 평화주의자야

장로원 야외 정원에 탁자들이 마련되었다.

상석에는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좌우로 줄을 지어 탁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구파일방의 수뇌인사들과 각주들이 자리했고, 왼쪽으로는 무림맹 장로들과 당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개방의 장로 만취개의 자리만 비어 있었는데, 그 역시 해가 저물 무렵이 되니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부랴부랴 들어섰다.

“딸꾹. 클클, 이거 지각해서 미안하게 됐소. 아니, 요앞에 신룡객잔이라는 곳에서 술 한 병 얻어먹었는데, 그 집 주인장과 점소이들이 하도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뭐요? 킬킬.”

구린내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만취개가 딸꾹질을 해대며 자리에 착석하자 모든 이의 시선이 맞은편에 서 있는 남궁천에게 자연스레 향했다.

남궁천이 논란의 중심에 선 자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은 남궁천이 제멋대로 설치지 못하도록 눌러달라는 원주의 당부도 들은 터였다.

후우우웅. 후우웅.

촛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어지럽게 흔들린다.

아직은 날이 밝았지만, 곧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릴 순간을 대비해서 미리 밝혀둔 촛불이었다.

하나 탁자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무인들이 저마다 강맹한 기운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으니, 촛불이 그 기의 흐름에 따라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남궁천은 구파일방의 수뇌 인사들이 보내는 노골적인 압박에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내 무인 하나가 소리쳤다.

“맹주님 오십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로원 정문으로 남궁검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단지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막강한 존재감을 풍기는 남궁검이었다.

눈빛과 표정, 걸음걸이와 시선 처리까지.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없다.

오랜 세월 수장의 자리에서 조직을 지켜온 자의 위엄이 절로 풍겨진다.

무림칠성인 덕양과 청풍도 내심 그런 남궁검의 기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검이 자리에 착석했음에도 아직 회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남궁검은 옆의 빈자리를 힐끔거렸다.

‘노골적으로 업신여기겠다는 거군.’

싸늘한 웃음이 그려진다.

하는 짓이 어쩌면 이리도 묵천악을 닮았을까?

묵천악이 그렇게 모욕적인 최후를 맞이했음에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면 그 뚝심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원주께선 아직인가?”

남궁검이 장로원에 거주하는 하급 무인에게 이르자, 상대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나오실 겁니다.”

용상회는 어디까지나 장로원주가 주최하는 것.

원주가 없는 상태에서 회의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옆자리라니.’

주최는 원주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맹의 중심은 맹주가 되어야 하는 법.

이전까지는 상석에 맹주의 자리만 있었다.

한데 이번엔 보란 듯이 원주의 자리가 맹주와 나란히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늦기까지.

마침내 무인 하나가 소리쳤다.

“원주님 나오십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각에서 장로원주 우위광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나이에 비해 보폭은 넓었으나 별로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남궁검 옆자리에 앉으면서 모두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아이고, 제가 좀 늦었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몸이 무거워집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저희들이 이해해야지요.”

청풍의 호방한 말에 다른 이들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위광이 자리에 착석하자 남궁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남궁검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우위광이 불쑥 말을 꺼냈다.

“자, 그럼 용상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맹주가 오래전부터 본 원에 제안한 것인데, 여러 여건을 따지고 고민하다 보니 개최가 늦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본 맹이 지금 어지러운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하여 본 맹은 구파일방의 귀빈들을 초청하여 고견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가감 없이 고견을 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꺼이 귀 맹을 돕겠습니다.”

“그래도 귀 맹이 지금껏 강호의 평화를 지켜왔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요.”

청풍에 이어 덕양도 포권을 하며 대꾸했다.

‘얼씨구, 죽이 척척 맞네.’

남궁천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장로원주는 잔꾀가 많은 늙은 오소리다웠다.

남궁검의 발언 기회를 자연스럽게 없애 버리면서 회의의 주도권을 가져간 것이다.

이리 되니 남궁검은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남궁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서 큰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었다.

우위광이 빙그레 미소 짓고는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맹주. 오늘의 안건은 무엇이오?”

마치 보좌하는 아랫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남궁검이 싸늘한 웃음을 머금고는 답했다.

“제일 급한 것은 역시 살곡과 손을 잡은 호법당주 안천길을 어찌 처리하느냐가 될 겁니다. 맹의 규율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안천길을 참수해야 마땅합니다만. 이 역시 용상회가 열린 만큼 장로회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지요. 이후에는 대대적인 무림맹 조직 개편과 인사 조치에 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

그러자 장로 중 한 명이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며 말했다.

탕!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소! 지금 이런 시시콜콜한 문제로 시간을 보낼 때요? 북쪽에서는 흑무련이 호시탐탐 남침할 기회만 엿보고 있을 텐데 우리끼리 칼질이라니? 흑무련이 보면 아주 좋아라 하겠소이다!”

그러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하는 뜻을 나타냈다.

그 모습만 봐도 오늘 회의가 쉽지 않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장로들 대부분이 원주의 입김으로 매수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시시콜콜한 문자라니요. 살곡에 의뢰해서 제 목을 노렸는데요.”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금 전에 일어서서 발표했던 장로가 눈살을 구겼다.

“자네가 아직 어려서 경험이 많지 않은 모양인데, 강호를 살다 보면 목 절반은 원래 저승에 내놓고 있는 셈일세. 더구나 호법당주는 그간 맹의 요직을 맡아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던 자일세. 잠깐의 실수를 너무 깊게 따지는 것 같군.”

“잠깐의 실수요? 살곡에 의뢰를 해서 날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살다 보면 원래 사사로운 오해가 실수로 이어질 수도 있는 법일세. 순간의 울화를 참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는 법이란 말이야! 결과적으로 자네는 안 죽었잖은가? 그럼 마음을 넓게 가져서 넘어가시게! 그것도 다 인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야! 한 조직에 잘 녹아들기 위해서는 인덕을 갖춰야 할 일! 동료가 목숨을 노린 게 뭔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녀서 이런 지경까지 온 것인가?”

“저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동료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만.”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장로가 손가락을 부들거리며 소리쳤다.

“저, 저, 건방진 말투 좀 보소! 자네가 그렇게 노려진 것도 바로 그런 태도 때문이란 말이야!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거참. 말이 안 통하시네. 장로님 같아도 대인배처럼 그냥 넘어가실 겁니까?”

“흥! 당연하지!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도 하지 못했을 걸세!”

“별 개 같은 대답도 다 있네.”

“뭐, 뭣이?”

“그냥 뒈지시죠.”

“뭣……!”

팟!

순간 남궁천의 신형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쒸에에에엑!

어찌나 순식간에 일어난 것인지 무림칠성조차도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빛살처럼 뻗어간 벽라검이 장로의 이마에 닿았다.

톡.

주르르륵.

장로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게 핏방울인 줄 알았다.

하나 벽라검은 그야말로 장로의 이마를 살짝 건드렸을 뿐 상처 하나 없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은 땀이었다.

맥이 풀린 장로가 뒤늦게 화들짝 물러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 이, 이익……! 이게 무슨 개망나니 같은 짓이냐! 네놈이 맹에서 칼춤을 추다 보니 주제도 잊은 채로 설쳐대는구나! 여봐라! 뭐 하느냐? 신성한 용상회에서 검을 뽑아 든 저놈을 당장……!”

콰아앙!

순간 폭음과 같은 소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정말이지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 곧장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웬만한 무인들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시선이 모인 곳에는 남궁검이 탁자를 내려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남궁검이 내려친 탁자에 정확히 손바닥 모양으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그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그 바람에 옆에 앉아 있던 우위광 원주도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맹주?”

“그만들 하시지요.”

무거운 목소리를 흘려낸 남궁검이 좌중을 훑었다.

칼날 같은 시선이 사람들의 면면을 할퀴듯 지나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귀빈들과 맹 내 수뇌부에게 감사 말씀드립니다. 또한 장로원에서도 용상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먼저 남궁천 단주가 실수를 좀 한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린 만큼 장로께서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해라니! 이게 이해를 하고 넘어갈 문제……!”

“장로님이라면!”

“……!”

“대인배처럼 넘어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다 인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저 같으면 부끄러워서 입 닥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시퍼런 기광까지 뿜어내며 말을 뱉는 남궁검.

그 매서운 기세에 장로는 물론 주변 인사들도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표정을 굳혔다.

남궁검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장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강호에서 살다 보면 사사로운 은원 관계는 잊어야지요. 일일이 다 따지고 들면 복수가 복수를 낳고 끝없는 혈전만 벌어질 겁니다. 그러니 피 한 방울 보지 않으신 장로께서는 적랑단주의 실수를 말끔히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

장로가 흙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뺨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제야 남궁천이 검을 거두면서 포권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실. 수. 를 좀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보다 훨씬 대인배이신 장로님이셔서요.”

“끄음…….”

장로가 이마를 한 번 매만지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궁천이 모두를 돌아보며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가끔 제가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행동이 말보다 앞서서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남궁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진 상태.

그때 한쪽에 앉은 만취개가 킬킬거리며 떠들었다.

“클클클! 아주 재미있군, 재미있어! 원주! 이렇게 재미있는 회의를 진행하는 거였으면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랬소? 그럼 내가 늦지도 않았을 텐데! 크하하하! 그런데 여긴 술도 안 주오?”

몇몇 인사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만취개를 보았다.

하지만 만취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이를 쑤시면서 말을 덧붙였다.

“지나가던 개가 들러도 먹을 건 던져주는 법이오! 인심 야박하게 굴지 말고 술과 안주 좀 주시오!”

만취개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장로원주 우위광이 ‘끙’ 앓는 소리를 내고는 명했다.

“술과 안주거리를 내어 드려라.”

만약 그러지 않으면 더 크게 소동을 부릴 것 같았기에.

사실 개방은 아무도 부르고 싶지 않은 원주였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던 우위광이었다.

‘그렇다고 하필 만취개가 올 줄이야. 쯧…….’

그러는 사이 남궁검이 다시 좌중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적랑단주는 어찌 생각하는가?”

“무엇을 말인지요?”

“북측의 흑무련을 먼저 해결하고, 호법당주의 처벌 논의는 추후에 하는 것이 어떤가에 대해서 말일세.”

남궁천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정 그럼 흑무련 문제부터 해결하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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