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95화 (394/508)

395. 좀 뒈져라! 좀!

안가장의 후원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연회에 참석한 수뇌인사들이 대체로 무공 고수였기에 추위 따위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데워진 음식은 탁자마다 화로가 올려져 있어서 시종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쯤 안천길이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안가장의 주인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입을 다물고 시선을 모았다.

안천길이 모두를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늘 이렇게 신년회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나마 맹의 본단에서 가까이에 살고 있는 제가 진작 여러분들을 모셨어야 하는데, 이래저래 여건이 좋지 않아서 조금 늦어졌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이 잠시 끊어지자 사람들이 박수로 환대했다.

안천길이 사람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다가 남궁천과 시선이 마주치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요즘 맹은 역대급 쇄신을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하지요. 그런 와중에 이런 연회를 연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나 역시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로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우리는 묵 맹주에게 속아서 여러모로 피해를 당했지요. 하나 이젠 새로운 맹주님을 모시고 예전의 전성기를 다시 부활시켜 봅시다.”

말을 매듭짓자 여기저기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으면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신년 인사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묘한 화법이었다.

마치 전임 맹주를 질타하는 것 같으면서도, 역시나 지금은 전임 맹주가 만든 전성기만 못하다는 의미가 이면에 깔려 있지 않은가?

이런 말 한마디가 교묘하게 사람들의 무의식을 흔드는 법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 별 대수롭지 않은 말들이 쌓여서 현 맹주에 대한 불만을 품게 만드는 거다.

‘이래서 정치질 하는 새끼들은 피곤하다니까.’

남궁천이 피식 조소를 짓는데, 마침 안천길의 시선이 다시 날아들었다.

“참, 여러분! 이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될 분이 역시나 참석해주셨습니다. 본 맹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온 남궁천 단주입니다! 남궁천 단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거짓된 평화에 속아서 안일하게 지냈을 겁니다! 하나 남궁 단주 덕분에 우리는 이렇듯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년회인 만큼 변화의 태풍을 몰고 온 남궁 단주의 인사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좋습니다!”

“남궁 단주, 한마디 해주시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대했다.

몇몇은 어디 한 번 낯짝이나 보자는 심보로 소리친 것이었고, 몇몇은 정말로 남궁천의 공로를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깊이 끄덕이기도 했다.

남궁천이 마다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천길 옆으로 다가갔다.

“오늘 이 귀한 자리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안천길이 슬쩍 앞을 막아섰다.

“남궁 단주. 요즘 쇄신을 준비하느라 공사다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본 맹의 미래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겠소?”

이것 봐라?

남궁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안천길을 보았다.

지금 이 질문은 함정이다.

무심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순간 남궁천은 마치 무림맹을 제 것처럼 생각한다는 인식이 생겨 버릴 테니까.

하나 남궁천은 실제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였다.

이제 정말로 약관이 된 청년이었다면 무심결에 걸려들었겠지만, 이미 안천길의 얕은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해서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글쎄요. 제가 미래를 보는 능력은 없어서요.”

남궁천의 대꾸에 몇몇 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남궁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안천길에게 물었다.

“안 당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 맹의 미래를.”

“허허. 나같이 아둔한 자가 그걸 어찌 알겠소? 나보단 요즘 맹의 쇄신을 위해 동분서주한 남궁 단주가 더 잘 알겠지.”

“저는 그저 맹주님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아, 그런 거였소? 난 또 남궁 단주가 맹주님께 조언을 하여 이런 업적을 남기는 거라고 생각했소만.”

안천길이 너스레를 떤다.

얼핏 들으면 별것도 아닌 말이지만, 이 역시 교묘한 화술이었다.

먼저 남궁천이 실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공개하고, 동시에 남궁검 맹주를 허수아비 취급하는 발언도 섞은 것이다.

정치질에 능한 수뇌인사들은 진즉 이 두 사람의 칼날 같은 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때문에 한옆에서 악사들이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와중에도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의 연속이었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당주님.”

“말씀하시오.”

“제가 아직 어려서 세상 사는 법을 잘 모릅니다. 때론 완곡한 표현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으음? 허허, 그거야 차차 나아지지 않겠소? 별문제도 아니오.”

“그럼 별문제가 아니라고 하시니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러시오.”

“당주님, 저 마음에 안 들죠?”

“으응?”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안천길을 빤히 보았다.

“솔직히 제가 당주님이라면 이런 생각이 막 들 것 같아서요. 갑자기 경험도 일천한 새파란 애송이가 나타나서 오랫동안 친분을 쌓은 맹주를 갈아치우더니, 맹 내를 제집 안마당 드나들 듯하며 벌집 들쑤시듯 하고, 이런 자리에 와서는 제가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떠벌리고 있는. 뭐, 그런 생각?”

“허허…… 왜 그런 말씀을?”

“제가 눈치를 엄청 보면서 자랐거든요.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았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지금 보니까 당주님이 딱 그런 기분 같아서요. ‘아, 이 새끼 주둥아리를 콱 뭉개 버리고 싶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이런 눈이랄까요?”

“허…….”

안천길은 진심으로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아무리 예의와 격식을 차리지 않는 나이라지만,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저런 막말을 지껄여?

그렇다고 이걸 아랫사람 꾸짖듯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늘 돌려서 말하는 정치에 익숙했던 안천길은 남궁천의 대책 없는 직설에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커흠흠!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소. 물론 남궁 단주의 쇄신이 다소 과하게 보일 때가 없진 않았지만, 맹이 나아갈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을…….”

“아아, 과하게 보일 때가 있으셨군요? 그래서 불쾌하셨어요? 혹시 ‘저런 녀석은 그냥 죽여 버리면 좋겠다.’거나 ‘차라리 내가 맹주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아니, 이 미친놈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대책 없는 화법에 당황한 안천길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악사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친 그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오늘 있을 일을 눈치챈 건가?’

악사 중 금을 연주하는 자는 바로 인피면구를 쓴 부곡주였다.

오늘의 계획은 간단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살곡의 무인들이 안가장을 쳐들어올 것이다.

이때 안가장의 무인들이 방어를 하려고 나서겠지만 몇몇 이들은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후원까지 쳐들어온 복면인들이 남궁천을 급습하려고 할 때, 자신이 용감하게 나서서 앞을 막아선다.

하나 안천길은 대개의 당주나 각주가 그렇듯 무공 수위가 엄청 고절한 수준은 아니다.

형장에서 물러난 맹의 요직을 무공 순으로 맡진 않기에.

어쨌거나 그런 까닭에 안천길은 가벼운 부상을 당하게 되고, 남궁천은 어수선한 틈에 접근한 부곡주에게 암살을 당한다.

모든 일이 끝나면 사망자는 남궁천이 될 것이고,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은 자신이 될 것이었다.

나름 빈틈없는 이야기다.

물론 습격자는 흑무련으로 조작될 것이고.

그런데 설마…….

‘이놈이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

하긴 그럴 리가 없다.

남궁천이 생각 없이 말을 툭툭 내뱉는 건 이미 유명하지 않던가?

안천길이 애써 미소 지으며 남궁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허. 남궁 단주의 농이 좀 지나치시오. 내 어찌 백도무림의 영웅인 남궁 단주를 그리 생각하겠소? 사실 뭐든 개혁을 이루려면 처음엔 다소 과하게 힘을 실어야 하는 법 아니겠소?”

“오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자자, 오늘처럼 좋은 날은 실컷 마십시다.”

“좋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출발할 맹을 위하여!”

“위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치며 잔을 높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술자리는 무르익어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석에 앉은 안천길은 다소 초조한 마음으로 때가 되길 기다렸다. 이따금씩 유백랑과 눈짓을 주고받았고, 악사로 위장한 부곡주와도 시선을 교환했다.

‘언제 시작하는 거요? 이쯤 되면 술자리도 꽤 무르익은 것 같은데!’

‘조금 더 기다리시오. 뭐든 절정에 다다랐을 때 일이 터지기 쉬운 법이니.’

‘하지만 이러다간 자리를 파하겠소!’

‘그 전에 거사를 치를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안천길과 부곡주는 그렇게 무언의 대화를 눈빛으로 이어갔다.

안천길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눈앞에 차려진 화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렇게 취기가 올라서 정신이 알딸딸해질 때쯤이었다.

“웬 놈들이냐!”

“막아랏!”

까깡! 깡! 퍽! 챙챙!

“크아악!”

“아악!”

순간 전각 뒤편에서 성난 고함이 들리더니 금속성에 이어 비명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소란에 후원에 모인 수뇌인사들이 표정을 굳히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뭔 소리지?”

“안 당주! 장원에 침입자가 있는 것 같소!”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사람들이 분개하며 소리쳤지만, 안천길은 내심 여유가 흘러넘쳤다.

‘후후. 드디어 시작됐구나!’

안천길이 휙 돌아보자, 악사로 위장한 부곡주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천길이 그 시선을 받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탕!

“모두 진정하십시오!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까지 나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날 믿고 편히 자리를 즐기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친 안천길이 몸을 휙 돌리고는 전각을 끼고 돌아나가…… 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질러진 발길질에 안천길은 그대로 포탄처럼 튕겨 나가 버렸다.

퍼억!

슈우우욱, 콰당탕!

탁자마저 부수며 널브러진 안천길이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복면을 덮어쓴 절체불명의 괴한들이 후원으로 우르르 들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안천길이 발에 걷어차인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눈살을 슬쩍 구겼다.

‘니미럴, 적당히 할 것이지! 늑골이 부서지는 줄 알았잖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진 않았다. 뭐든 진짜 같아야 속는 법이 아니겠나?

하긴 남궁천 정도 되는 고수라면 어설픈 연기가 통하지 않으리라.

안천길이 공력을 끌어 올리며 버럭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온 것이야!”

하나 괴한들이 일일이 대꾸해 줄 리가 만무하다.

괴한들은 후원의 인사들을 슬쩍 둘러보더니 남궁천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다른 고수들이 나서기도 전에 이번에도 안천길이 몸을 튕기듯 날아가서 앞을 막아섰다.

“노오오옴!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감히 본 가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인 네놈들은 누구……!”

퍼억!

이번에도 문답무용.

가장 앞장섰던 괴한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오더니 안천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버리는 게 아닌가?

슈우우욱, 탁!

그대로 튕겨 나간 안천길은 남궁천이 떠받치는 바람에 겨우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크웁, 쿠웨에에엑!”

내장이 뒤틀리면서 구토가 올라와 토하고 보니 시뻘건 핏물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크헉, 헉, 헉……!”

이런, 니미럴! 작작 좀 하라니까!

안천길이 성난 눈길로 악사들이 있는 쪽을 휙 돌아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부곡주가 먼 산을 응시한 채 외면하는 게 아닌가?

마침 남궁천이 안천길을 부축하며 물었다.

“안 당주님.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소. 이 정도쯤은!”

안천길이 가까스로 허리를 펴고 섰다.

그러자 괴한이 다시 이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안천길이 뒤에 선 남궁천에게 말했다.

“남궁 단주는 물러나 계시오. 내가 해결해 보리다.”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응?”

그냥 이대로 정말 물러나 있겠다고?

이쯤 되면 나설 만도 하지 않나?

하지만 남궁천은 전혀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안천길이 성큼성큼 다가서는 괴한에게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냈다.

‘대충 때리는 시늉이나 해, 이 새끼야! 피를 토했다고, 피를!’

그러나 괴한은 ‘적당히’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했다.

쒸에에엑! 빠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날아든 괴한이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안천길의 안면을 가격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아찔한 고통을 느낀 안천길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하아, 이 육시럴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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