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좀 뒈져라! 좀!
천우당주 유백랑은 번잡한 밤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그의 머릿속에 안천길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모든 게 잘되면 당주께 더 큰 기회가 오지 않겠소? 내 힘을 써보리다.”
유백랑의 입매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더 큰 기회라.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래, 병신같이 당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이 뭐가 아쉽단 말인가?
지금은 모진 풍파가 일어나고 있지만, 이 고비만 잘 견디면 다시 일어설 기회는 충분하다.
유백랑은 품속으로 손을 넣고 증표 하나를 꺼내 보았다. 붉은 수실이 달린 증표에는 세 마리 용이 뒤엉키며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다.
삼룡패.
묵천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증표다.
‘그래, 내게는 힘이 있다.’
맹의 재정을 담당하는 유백랑은 묵천악이 살아 있을 때, 그의 비자금도 함께 관리해 왔다.
‘지금은 몸을 사릴 때가 아니다. 더 뻔뻔하게 부딪쳐 갈 때다.’
유백랑은 안천길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입으로는 자신에게 맹주의 자리를 맡길 것처럼 떠들지만, 안천길도 야망이 큰 자다.
그런 큰 먹이를 자신에게 선뜻 넘겨줄 리가 없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만, 모든 고비를 넘기고 나면 태도를 싹 바꾸고도 남을 자다.
‘그 전에 손을 써야겠지.’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에 유백랑은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골목을 한참이나 따라가니 암금각(暗金閣)이라는 수상한 편액이 걸린 문이 나타났다.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자, ‘끼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거한이 유백랑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없이 옆으로 물러났다.
유백랑은 곧 행랑을 지나 문을 열고 너른 방으로 들어섰다.
순간 고요함이 싹 물러가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훅 덮쳐왔다.
거기에 후끈한 열기까지.
“어이! 거기 치사한 수법 쓰지 말라고!”
“뭔 소리야? 돈을 잃으니 이젠 딴소리를 하는 것이냐!”
“으하하! 오늘은 내게 재신이 강림했구나!”
“젠장! 인정 못 해! 이번 판은 무효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렇다. 이곳은 도박장이다.
유백랑은 도박장에서 일희일비하는 이들에게 눈길도 던지지 않은 채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계단 입구에 서서 앞을 가로막던 거한이 유백랑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곧 슬쩍 물러났다.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니 어둑한 복도가 나타났고, 양쪽으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를 방문이 보였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유백랑이 세 번째 방문 앞에 멈춰 서 문을 두드렸다.
마침 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유백랑일세.”
철컹.
쇳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마침 커다란 집무 책상에 앉아 있던 사내가 유백랑을 알아보고는 두 팔을 벌렸다. 눈이 족제비처럼 찢어져서 어딘지 야비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오랜만이십니다, 당주님. 요즘 공사다망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닐세.”
“뭐,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유백랑이 긴말하지 않겠다는 듯 품에서 삼룡패를 꺼내 책상에 툭 내려두었다.
사내의 입매가 슬쩍 뒤틀렸다.
“드디어 손을 대기 시작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이젠 주인이 바뀐 셈이니까.”
“클클. 그렇지요. 그럼 안내를 해드리지요.”
말을 마친 사내가 증표를 들고 일어나서는 옆방으로 건너갔다. 유백랑이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책장이 빼곡했는데, 서책을 몇 권 빼낸 사내가 증표를 책장 바닥에 꽂더니 힘을 실었다.
구구구구궁……!
순간 육중한 소리가 울리면서 벽면이 통째로 회전했다.
유백랑은 책장 한쪽에 장식된 야명주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아아아아!
빛이 밝아지자 눈부신 금괴가 사방에 가득 쌓인 게 보였다.
바로 묵천악의 비밀 금고였다.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결국 그리 가실 거면서 어찌 이리도 모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당주님은 그런 실수 하지 마십시오. 자고로 돈은 쓰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꾸역꾸역 모아봐야 체하기만 하지요. 아까다 똥 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요? 킥킥.”
“자네 혓바닥이 생각보다 길군.”
“이크,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헤헤.”
“흐음.”
유백랑이 어딘지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금괴를 훑어보았다.
얼마나 될까?
일억 냥은 족히 넘을 것이다.
이억? 삼억……?
‘후후후.’
호법당주 안천길이 지금 천하를 노리고 있다.
하나 그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천하를 움켜쥘 자는 자신이 될 것이니까.
이 세상을 진정으로 장악하는 것은 무공이나 권력 따위가 아니다.
바로 돈이다. 돈!
무공으로 돈을 살 수 없다.
권력으로 돈을 얻기도 쉽지 않다.
하나 돈으로 무인을 사거나, 권력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결정적인 기회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자신이 되리라.
옆에 선 사내가 손을 맞비비며 물었다.
“얼마를 찾으실 건지?”
“우선 삼천만 냥 준비해 주게.”
“분부 받들지요.”
사내가 굽실거리며 대꾸했다.
* * *
“이천만 냥이 들어왔습니다, 곡주님.”
부곡주의 보고에 남궁천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역시 안천길이 천우당주와 손을 잡은 거겠지?”
“그렇습니다. 안천길이 오백만 냥, 나머지 천오백만 냥은 천우당주 유백랑이 보탠 듯합니다.”
“천오백만이라. 비자금이 어마어마하거나, 묵천악의 비자금까지 꿀꺽했거나.”
“저어…… 그런데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의뢰?”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부곡주를 돌아보았다.
“한동안 새 의뢰는 받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게…… 안천길과 관련된 것이라.”
“안천길하고? 자세히.”
“예, 의뢰자는 유백랑입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안천길을 죽여달라는 의뢰입니다.”
순간 남궁천이 멍한 표정으로 부곡주를 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천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대단한 전개네. 욕망의 거미줄이 얽히고설켜서 난리도 아니야. 크크.”
과연 유백랑도 생각이 없진 않다는 것인가?
만약 자신이 정말 죽게 되면 유백랑은 안천길을 제거해서 완전 범죄를 이룰 속셈이리라. 거기에 유백랑의 욕망도 실현할 생각일 테고.
물론 안천길도 유백랑을 가만둘 생각은 아닐 테지만, 음흉한 면에 있어서는 유백랑이 한발 앞선 셈이다.
‘뭐, 안천길은 당장 돈도 없었을 테니.’
생각을 마친 남궁천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우선 곡주님과 상의한 후에 의뢰 수락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상의할 게 뭐 있어? 당연히 수락해야지. 후후.”
“그럼 금액은 얼마나……?”
“천만 냥 불러.”
부곡주가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너무 큰 금액 아닐까요? 만약 의뢰를 철회하면…….”
부곡주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그는 남궁천의 사업 수완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래전 흑무련의 의뢰를 맡을 때부터 그 기질은 다분해 보였으니까.
정말이지 남궁천이 곡주가 되고 나서부터 살곡이 벌어들이는 비용은 상상 초월이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예전의 방식은 박리다매나 다름없지 않은가?
살행 한 번에 천만 냥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까다로운 인물 백여 명은 죽여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날 죽이는 데 천오백만 냥을 선뜻 내놓은 자야. 아마도 돈 좀 만진다는 뜻이겠지. 그런 놈들의 가치관을 너 같은 놈이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적랑단주를 이천만 냥에 제거하는 것이니, 호법당주는 최소 천만 냥이라고 말해. 이미 배에 올라탄 자야. 뛰어내려서 빠져 뒈지기 싫으면 지불할 거다.”
“호오. 그럼 차라리 이천만 냥을 부르는 게…….”
따악!
남궁천이 뒤통수를 후려치자 부곡주가 얼른 머리를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인마, 뭐든 정도가 있어야지. 그렇게 되면 호법당주 목숨값이 나하고 같잖아.”
“아…… 죄송합니다.”
부곡주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가봐.”
“그런데 곡주님.”
“뭐야?”
“이대로 정말 살곡을 지우실 겁니까?”
남궁천이 부곡주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만약 남궁천의 계획대로 모든 게 흘러간다면 살곡의 역사는 이제 끊어진다고 봐야 한다.
“왜? 아쉬워?”
“솔직히 그렇습니다.”
부곡주가 맞을 각오까지 하고선 대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의 손이 번쩍 올라가자, 부곡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남궁천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염병, 뭔 좋은 역사라고 아쉬워? 하여튼 웃긴 새끼들이라니까. 자랑스럽고 떳떳할 일은 평생 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시궁창 같은 일을 계속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이래서 관성이 무섭다니까. 뭐든 오래 해오면 왠지 모르게 그걸 계속해야만 할 것 같은 멍청한 생각이 드는 거지. 그 삶이 스스로를 좀 먹어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목돈 벌고 접을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살곡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지만 너희들은 내가 요긴하게 써주마. 이왕 파리 같은 목숨이라면 좋은 세상 만드는데 거름이라도 되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꺼져라.”
“예, 곡주님.”
“이제부턴 주군이라고 불러. 살곡이 사라지면 너희들 조직명도 바꿀 거다.”
“무엇입니까?”
“이제 너희들의 목숨은 이 세상의 거름이 될 테니 비료단(肥料團)이라고 하자.”
“알겠습니다, 주군.”
고개를 깊이 숙인 부곡주, 아니, 비료단주가 곧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 * *
무림맹 인근에 위치한 안천길의 가장에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천길은 대문까지 나와서 방문자들을 일일이 미소로 맞이했다.
마침 유백랑이 대문으로 다가오자 안천길이 손을 덥석 맞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유 당주. 이번 연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유 당주의 도움이 컸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판은 안 당주님이 깔아두신 게 아닙니까? 저야 안 당주님의 뜻을 따랐을 뿐이지요.”
“허허허. 겸양이 지나치시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손을 맞잡고 흔드는 두 사람은 겉과 달리 속으로 칼을 갈았다.
‘판을 내가 깔았다? 벌써부터 실패를 염두에 두고 선 긋기를 하는 것인가? 약아빠진 것 같으니.’
‘안 당주님, 당신이 가진 연못은 제가 놀기에 좁습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편히 보내 드리지요.’
그렇게 속내를 감춘 미소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내 손을 놓고 떨어졌다.
마침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남궁천이 대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천길이 안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이게 누구요? 남궁 단주께서 와주었구려.”
“일부러 초대장까지 보내주셨는데 와야지요.”
“허허, 고맙소. 내 그러지 않아도 남궁 단주만큼은 꼭 모시고 싶었소.”
“감사합니다. 신년회를 이리 거하게 열어주시니, 맹주님도 맹을 대표해서 감사의 뜻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허허허, 맹주님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요즘 여러모로 정신이 없으셔서요.”
“하긴. 이런 가벼운 자리까지 참석하시기엔 워낙 무거운 일을 맡으시니. 아무튼 이왕 이리 오신 것 편히 즐기다가 가시오.”
“그러겠습니다.”
남궁천의 대답을 들으며 안천길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나 두 사람의 속내도 겉과 달랐다.
‘마지막 만찬을 즐겨라, 남궁천. 이후에 네가 받을 상차림은 제사상이 될 테니.’
‘다 차려진 밥상이 엎어지면 당신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너무 기대가 되는군.’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