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93화 (392/508)

393. 좀 뒈져라! 좀!

똑…… 똑…….

이따금씩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린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맑은지 한 번 그 소리에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묘한 중독성.

똑…… 똑…….

백묘는 습기 찬 벽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공마는 총타까지 무사히 돌아갔을까?

걱정이다.

마지막으로 본 소공마는 정체불명의 고수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터였다.

과연 그들이 소공마를 데리고 천라지망을 벗어났을까?

천라지망은 말 그대로 사람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천라지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일반인도 가능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번화한 거리에서 천라지망을 펼친다고 행인들이 지나다니지 못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표적이 천라지망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이다.

그러니 정체불명의 고수가 천라지망 안에 나타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천라지망을 빠져나갔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래도 패력궁의 철시를 막아낸 자야. 그 정도면 가능할 거야.’

무림칠성 수준의 무위를 보인 자였다.

적어도 소공마와 비슷한 수준이리라.

소공마는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상대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후에 개입했다.

게다가 경공이 유난히도 빠른 자.

그와 함께 나타난 무인들도 하나같이 경공이 특출 났다.

그들이 일시에 흩어져서 움직인다면 몇 명은 죽더라도 소공마를 업은 고수는 무난히 빠져나가리라.

“하아아.”

긴 한숨이 흘러나오는데 마침 맞은편 뇌옥에서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파묻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자지만 요 며칠 뇌옥에서 지내다 보니 몇 마디 대화는 나누었던 자였다.

“또 비웃는 건가요?”

백묘가 슬쩍 눈을 흘기자, 어둠 속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숨에 시름이 녹았다. 그리 한숨을 습관처럼 쉬면 간장이 녹을 게다. 계집아, 무릇 걱정이라는 건 아래로 흘러야 하는 법이다. 위에서 노는 자들은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분수를 모르는 게지.”

“그렇게 잘나신 분이 어쩌다 뇌옥에 갇히셨대요?”

“이 몸은 무림공적이었다. 뭐, 사실 나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른다.”

“무림공적이면 필시 여러 사람을 죽이고 다니셨겠지요.”

“네년은 그러지 않은 것처럼 씨불여대는구나.”

“아뇨. 저도 그랬죠. 후후.”

백묘가 서늘한 웃음을 흘리자,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같은 취급을 하지 마라. 나는 아무나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무림공적이셨을까?”

“백도 무인들만 골라 죽였으니까.”

“더 나쁜 짓 아니에요? 착한 사람만 골라 죽였으니까?”

“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백도 무인은 착한 놈이라더냐? 사람의 인성은 조직이 정의하는 게 아니다. 이 몸은 백도에 몸을 담으면서도 걸핏하면 갑질하고, 약자를 핍박하며, 제힘만 믿고 으스대는 것들만 골라 죽였다.”

“한마디로 정의의 사도?”

“클클. 정의의 사도는 무슨. 악귀를 골라 죽이는 악귀지.”

백묘가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노인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무림맹 뇌옥에 갇히고 나서 유일하게 숨통 트이게 하는 것은 바로 저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노인은 살날이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비록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지만, 이따금씩 각혈할 정도로 기침을 했고, 숨결에 생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저렇게 말을 던져올 때면 또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소공마를 구한 그 고수는 누구였을까?

막연한 추측을 떠올리면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다시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듣지 마.”

“아…….”

백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갤르 끄덕였다.

그렇다.

저 물방울 소리는 들어서는 안 될 소리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는 묘하게 공력을 흩트린다. 그 사실도 노인이 먼저 알려주었다.

“듣기 좋지? 원래 듣기 좋은 소리가 나를 망치는 게지. 아첨처럼. 저 물방울 소리가 정신을 맑게 만드는 게 아니라 멍청하게 만드는 게다. 그러니 소리에 집중하지 마라. 자칫 빠져들면 산 송장이 될 테니까.”

백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맹이 죄수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상당히 영악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물방울에 그러한 술법이 녹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백묘가 맞은편 어둠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은 어디가 아프세요?”

“몇 달 전에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더니 반위(反胃:위암)라더군. 한 석 달 남았으려나?”

“그렇군요.”

적당히 위안이 될 만한 말을 꺼내려는데 마침 인기척이 들리더니 간수가 죄수 하나를 끌고 나가고 있었다.

간수에게 끌려나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총관이었다.

‘은마령…… 풀려나는 건가?’

백묘가 눈길을 주면서도 어떠한 사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같은 마교 출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했으니까.

일부러 백묘가 도발하듯 말을 던졌다.

“평생을 충성하더니, 꼴이 우습게 됐네요.”

“흥,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맹주님이 당신들과 손 잡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오.”

백묘가 그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 * *

팔옥각주와 대면하고 있던 남궁천은 마침 문이 열리면서 총관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총관님.”

“언제 적 총관인가?”

총관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짓자 남궁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예나 지금이나 총관이시죠.”

“그건 또 무슨……?”

총관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자,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모든 일은 묵천악이 주도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총관님의 협조가 아니었다면 묵천악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 꽤 까다로워졌을 겁니다. 기나긴 세월 묵천악에게 진심 어린 충언을 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너른 의미로 보면 총관님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자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가?”

“사실 총관님은 묵천악의 본성을 밝히는 데 공을 세우신 분이기도 합니다. 하여 징계는 오늘로 끝이고, 앞으로는 맹주님 측근에서 총관 일을 이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

총관이 눈을 크게 뜨고는 흠칫거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사실 자신이 맹주를 배신하면서 죽음은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맹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그래서 근신 기간이 끝나면 몸을 바짝 낮추고 최대한 맹내에 남아 있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했다.

그런데…… 다시 총관이라니?

“그건 맹주님의…… 뜻인가?”

“예, 총관님이 그래도 일은 잘 처리하신다고.”

“끄음. 정말 괜찮겠나? 나로……?”

“하하!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모든 결정은 맹주님이 직접 하시는 겁니다.”

“그렇군…….”

총관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면 팔옥각주 탁붕호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총관은 전임 맹주를 배신한 인물이 아닌가?

그가 괜히 구시렁거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

“뭐든 한 번이 쉽지, 두 번이 어려울까? 배신도 습관이라는 말이 있지!”

하지만 남궁천은 탁붕호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뜻밖의 처우에 당황해하는 총관을 보며 남궁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총관을 이대로 내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총관이야말로 썩은 뿌리를 밝힐 핵심 인물이지.”

“예, 묵천악의 지근거리에 있던 자입니다. 근신 기간이 끝나고 석방이 되면 다시 총관으로 고용해서 지난 과오를 씻을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총관으로 다시 고용하자는 것이냐? 그자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중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묵천악 측근들의 입장에서 총관은 그저 배신자일 뿐입니다. 그런 자를 다시 총관으로 고용하면 아마 겉으로 말은 하지 못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겁니다.”

“초조하게 만들자는 전략이구나.”

“예, 할아버지. 뭐든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조급해지는 법이잖아요. 또 조급해지면 실수도 자주 나오게 되고요.”

“네 말이 옳다. 그 작은 실수가 모여서 크게 책임질 일을 만드는 법이지.”

“맞아요. 그러니 이번엔 총관이 우리의 칼자루가 되어줄 거예요.”

상념을 거둔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총관에게 말했다.

“그럼 따라오시지요. 맹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남궁천이 앞장서자 총관이 그 뒤를 가만히 따랐다.

‘이들이 무엇을 원하든 먼저 들어주어야겠지. 은마령으로서 다시 임무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남궁검 맹주의 신임을 다시 얻는 게 중요할 터.’

고개 숙인 총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 * *

“뭣이? 총관을 복직시켰단 말이오?”

안천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 바람에 입에 머금고 있던 밥풀이 마구 튀었다.

하필이면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에 급히 찾아온 천우당주 유백랑의 말을 들은 것이다.

유백랑도 밥풀 따위는 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방금 적랑단주가 석방된 총관을 데리고 곧장 맹주전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아니, 이 미친 것들이! 이거 완전 제멋대로구먼! 묵 맹주님을 무림공적으로 만들어놓고, 그 측근을 다시 복직시키는 건 또 뭔 개뼈다귀 같은 상황이야!”

“제 말이 그겁니다! 이건 뭐 원칙도 없고, 기준도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니. 기준은 있소.”

안천길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유백랑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기준이요? 무슨 기준입니까?”

“총관은 묵 맹주님의 최측근이었소.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알고 있는 자요. 그만큼 우리에겐 위험할 수 있는 자요. 만약 남궁 맹주가 무림맹을 개편하면서 찍어내기를 할 생각이라면…….”

“아! 총관을 이용해서 우리의 은밀한 치부까지 다 알아낼 수도 있겠군요!”

“그렇소. 묵 맹주가 알고 있는 건 총관도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거요.”

“허어…… 산 넘어 산이로군요.”

“천우당의 사정은 좀 어떻소? 여전히 적랑단에서 조사 중이오?”

“예, 썩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천우당주는 그래도 꼼꼼하신 분이 아니오? 장부를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주셨을 것 같은데.”

사실이었다.

무림맹의 기획과 재정을 담당하는 천우당주는 무공보다는 주판을 잘 굴리는 자였다.

그만큼 철두철미한 자이기도 했다.

해서 웬만해서는 장부를 들여다봐도 비리를 알아채기 힘들도록 조치해두었다.

한데…….

“진소홍이라는 대주가 금왕의 여식이라더군요. 상재를 타고난 것인지, 장부를 보는 족족 틀린 부분을 죄다 잡아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대로는 제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

“정말 이대로 방법이 없을까요? 이러다가 다 죽습니다, 당주님!”

“끄음. 사실 나도 요즘 고민이 많소. 해서 말인데……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오.”

“오오! 방법이 있긴 한 겁니까? 남궁가를 막을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해야지요! 그게 뭡니까?”

“좀 지저분한 방법이오. 물론 우리 손을 더럽히진 않을 거요. 내가 앞장선 일이기도 하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할 수 있는 걸 해야지요.”

“흐음. 천우당주, 돈 좀 있소?”

“돈…… 이요?”

안천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귓속말로 한참 동안 이야기를 전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천우당주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안천길이 유백랑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어떻소? 어차피 실패하면 전액 환불이긴 하오.”

“흐음. 나쁘진 않은 조건이군요.”

“하면 힘을 좀 보태보시겠소? 어차피 내 집 안마당에서 벌어질 일이오. 천우당주께선 자금만 보태주면 될 일이고.”

유백랑이 생각 끝에 결심이 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얼마가 더 필요하신지요?”

“천만 냥 남짓.”

“확실히 출혈이 있군요.”

“하나 모든 게 잘되면 당주께 더 큰 기회가 오지 않겠소? 내 힘을 써보리다.”

순간 유백랑의 눈이 번뜩였다.

큰 기회란 맹주가 될 기회밖에 더 있겠는가?

물론 안천길은 맹주 자리를 유백랑에게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천만 냥은 거금이다.

일단은 유백랑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당근을 먼저 던져주어야 하지 않겠나?

유백랑이 입매를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습니다.”

“고맙소! 이제 곧 천하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뀔 거요.”

안천길이 씨익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