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부채질
남궁천은 그야말로 무림맹을 제집처럼 활보했다. 그 바람에 맹의 다른 조직들은 마치 벌집을 들쑤셔 놓은 듯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호법당주 안천길뿐만 아니라, 현 맹주에게 반감을 가진 다른 수뇌인사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장로원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천우당주가 당한 수모를 들으셨는지요? 이대로 정녕 두고만 보시겠습니까?”
“남궁가가 마치 본 맹을 제집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앞으로 더 심하면 심해졌지, 절대 얌전해지지 않을 겁니다!”
“원주님! 이제는 나서주십시오!”
“신년 특사를 제 멋대로 선정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팔옥각주는 그저 들러리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약천당까지 들쑤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천하가 제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수뇌 인사들의 불만에도 장로원주 우위광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찌 그리들 심지가 굳지 못한가? 자네들의 이런 행동을 노리는 것이 바로 저들의 속내라는 걸 모르겠나?”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정들 하시게. 겨울이 길다고 봄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닐세.”
결국 장로원을 찾아왔던 이들은 우위광의 뚝심에 두 손 두 발을 들며 물러가 버리곤 했다.
하지만 우위광 역시 남궁검과 남궁천의 행동이 다소 파격적이라는 것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생각보다 더 설쳐대는군.’
남궁가는 지금 선을 타고 있었다.
지켜야 할 적정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맹의 수뇌부를 자극하고 있다.
여차하면 선을 넘어서 맹 내의 반감을 고조시킬 것 같지만, 또 그렇지는 않다.
당근 없이 채찍만 휘두르는 방식인데도 어느새 수뇌부가 적당히 그 채찍을 견디도록 만들어 버린다.
정말로 무서운 자가 아닌가?
남궁검이야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호 노고수니까 그렇다고 쳐도,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남궁천이 의외다.
어린 나이에 무공 수위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아수라 같은 정치판에서 저렇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할 줄이야.
기다리다 보면 실수가 반드시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남궁검보다 더한 것 같지 않은가?
처음에는 맹주인 남궁검과 원주인 자신의 싸움이라 여겼는데, 지금 상황을 찬찬히 살피면 남궁천과 싸우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우위광은 섣불리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남궁천이 바라는 것일 테니까.
‘하나…… 만약을 대비해 두어서 나쁠 건 없을 터. 슬슬 준비 정도는 해두어야겠군.’
우위광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 * *
“불명회에서 첩보가 들어왔다.”
남궁검이 입을 열자 남궁천이 멈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장로원 쪽 소식입니까?”
남궁천의 질문에 남궁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불명회는 신임 맹주인 남궁검에게 눈과 귀가 되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이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무림맹에서 만약 불명회가 없었더라면 남궁세가는 철저하게 고립되고 말았으리라.
하나 그 고립의 벽을 낮춰주는 것이 바로 불명회의 역할이었다.
“확실히 불명회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가 없더구나. 도대체 언제 그런 세력을 규합한 것이냐?”
“으음. 그리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묵천악은 사리사욕을 위해 사파와 결탁하여 추방당했고, 결국 목숨마저 잃었다. 만약 저들이 불명회의 존재를 안다면 우리도 명분이 없다.”
“불명회는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명회는 더러운 일을 도맡지 않습니다. 그저 정보만 취할 뿐이지요. 묵천악에게 비선향이 있었듯이 할아버지에겐 불명회가 있는 거죠. 그리고 비선향은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았지만, 불명회는 그저 눈과 귀가 되어줄 뿐입니다. 그 행위 자체로는 문제 삼을 수 없을 겁니다.”
“등하로는…….”
“발각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발각되면 묻어버리면 됩니다.”
“묻어버려?”
“예, 불명회주의 방에 기폭 장치가 있어서 여차하면 증거 인멸을 할 수 있습니다.”
“허허…….”
남궁검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불명회는 예사로운 조직이 아니다. 더구나 무한 지하에 거미줄 같은 등하로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한마디로 역사가 유구한 조직이란 뜻이다.
한데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은 손자가 어찌 그런 조직을 섭렵했을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자식이라더니.
손자를 이제 좀 알겠다 싶다가도, 이럴 때면 갑자기 먼 곳에 서 있는 것 같다.
남궁천이 넌지시 물었다.
“늙은 오소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까?”
“그렇다. 우위광 원주가 구파일방과 접선을 시도한다는 첩보다.”
“과연 그렇게 나오는군요.”
“어찌 생각하느냐?”
“뒷선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여도, 무림맹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이죠. 아무래도 차선책을 준비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혹여나 용상회가 열리면 구파일방 수뇌부의 힘을 빌려 할아버지와 저를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의도일 겁니다.”
“흐음.”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말을 이었다.
“하면 장로원이 용상회를 열더라도 구파일방의 인사들까지 초청해서 참석시킬 것 같으냐?”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원래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당할 자들은 아닐 게다. 또한 용상회를 열더라도 구파일방의 수뇌들과 연합 전선을 펼쳐서 우리를 압박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도 용상회는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감안해서 준비를 하면 되겠죠.”
“옳은 말이다. 다만 내 생각에 원주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을 대비함일 뿐이다. 용상회를 열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란 뜻이지.”
“역시 좀 더 버틸까요?”
남궁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고 본다. 원래 잔꾀가 많은 늙은 오소리들은 입구에서 연기를 피워도 엉덩이로 굴을 틀어막고 버티는 법이니.”
“찰떡 비유입니다, 할아버지.”
남궁천이 무릎을 탁 치며 말하자,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하면 이제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궁둥짝을 걷어차 버려야죠. 흐흐.”
“그 후에는? 만약 용상회가 뜻대로 열린다면 구파일방의 수뇌를 상대할 방안은 있고?”
“예, 저도 구파일방을 무시하진 않습니다. 다만 덤벼오는 적은 피하지 않는 게 이제 제 방식입니다. 피하는 건 지긋지긋하거든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어떤 계획을 세운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기둥이 되어 옆에 서 있어주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했다.
“어쩌면 구파일방의 수뇌 중 제가 보고 싶은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 *
안천길은 다시 신룡객잔을 찾았다.
최상층 귀빈실에 머문 그는 연신 창가를 서성이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제기랄! 도대체 살곡은 뭘 하는 거야!’
살곡에 남궁천 암살을 의뢰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남궁천은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질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남궁천이 적랑단주의 권력을 휘두르는 꼴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며칠 만에 몇 개의 조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개 같은 놈!”
무심결에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려던 안천길이 가까스로 분을 삭이면서 손을 내렸다.
괜히 엄한 곳에 분풀이를 해서 눈에 띄어봐야 좋을 것은 없을 테니.
그렇게 한참을 씨근거리고 있는데, 마침내 문이 열리면서 부곡주가 귀빈실 안으로 들어섰다.
“또 보오.”
또 보오? 또 보오오오?
다시 보는 일이 없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태연히 또 본다는 인사를 건네다니!
결국 참았던 분노가 터졌다.
“도대체 살곡은 뭘 하고 자빠진 거요?”
“자빠지다니. 우린 늘 서서 일하고 있소.”
“이익! 지금 나하고 말장난하자는 거요!”
“아니, 뭐 그쪽이 말을 이상하게 하니까.”
“그 전에 당신들 일 처리가 영 시원찮지 않소! 내가 돈을 건네줄 때는 사흘 안에 처리하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소이까! 한데 지금 남궁천이 뒈졌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남궁천은 뭐 귀신인가? 엉?”
“어허, 뭘 그리 흥분하시오.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외다.”
“알지! 아니까 오백만 냥씩이나 준 게 아니오!”
“그 오백만 냥 돌려 드리겠소.”
부곡주가 전표 뭉치를 던지자 탁자 위로 툭 떨어졌다.
안천길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이긴? 말했잖소? 실패할 경우에는 환불해 주겠다고. 강호에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살수 단체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시나?”
“아니, 내 말은 시도도 하지 않고 실패라고…….”
“시도를 하지 않았다니? 우린 이미 두 차례 시도를 했소. 하지만 남궁천 그놈은 천운을 타고난 녀석 같았소. 우리의 모든 암살이 실패하고 말았으니까. 우리도 자존심이 상해서 두 번이나 시도한 거요. 원래 한 번 시도해서 실패하면 그만두지만, 한 번은 덤으로 해준 셈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깟 실패한 한 번이 덤이고 나발이고 중요하지 않소!”
“그건 그렇군.”
부곡주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니 안천길은 열불이 뻗쳐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흥! 살곡이 움직이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더니. 말짱 다 옛말이로군! 그깟 애송이 하나 죽이질 못해서 이 모양이라니!”
“글쎄, 그리 쉬운 일이면 직접 하시라니까.”
“입장이라는 게 있지 않소!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려고 이러는 걸……!”
사납게 소리치던 안천길이 어느 순간 말을 뚝 멈추고는 부곡주를 보았다.
부곡주의 표정이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눈빛만 마주해도 왠지 간담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부곡주가 한 걸음 성큼 다가서더니 탁한 음성을 흘려냈다.
“당신은 남궁천에 대해 얼마나 아시오?”
“그야…….”
“남궁천이 하루에 밥을 몇 번이나 먹는지, 똥은 몇 번 싸는지, 맹주는 몇 번 만나며, 방귀는 몇 번 뀌며, 트림은 몇 번 하는지, 밥을 처먹고 이를 쑤시는지 아닌지, 오줌을 싸면 몸을 떠는지 아닌지. 알고 있소?”
“그걸…… 내가 어찌…….”
“우린 아오. 남궁천은 매우 잔인한 자요. 무공 수위가 상당하며 약자든 강자든 걸리적거리면 가차 없이 치워 버리는 자요. 심지어 타인을 굴복시킬 때는 일말의 자비도 없소. 살수든 뭐든 제멋대로 다루려고 하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그자의 목숨을 파리처럼 취급하는 자요. 아주 성격이 더럽고 개 같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안천길이 눈살을 찌푸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눈시울까지 붉히며 말을 쏟던 부곡주가 이내 차분한 이성을 되찾았다.
“커흠. 아무튼 남궁천은 지독한 개새…… 뭐, 그렇소. 그래서 암살이 결코 쉽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다시 우리에게 의뢰한다면 이번만큼은 확실히 해보지.”
“이를 테면?”
“원하는 암살 날짜를 잡으시오. 그날 하루는 횟수에 상관없이 하루 종일 남궁천을 노려보겠소.”
“그걸 내가 어찌 믿고?”
“그날 당신이 남궁천을 따라다니면 될 것 아니오? 우리가 정말 시도하는지, 하지 않는지.”
“흐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대신 두 배의 금액인 천만 냥을 내야 하오.”
“천만이라…….”
확실히 적은 금액이 아니다.
천만 냥이 뉘 집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하지만 그간 비리로 모은 자금을 싹 긁어모은다면 불가능할 일도 아니다.
아깝긴 하지만 남궁천만 제거된다면 숨통이 트이리라.
안천길은 며칠 전 자신을 다시 찾아와서 속삭이던 모용강의 말을 떠올렸다.
“당주님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 만한 분이 아니십니까? 저는 차기 맹주로 당주님만 한 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모용강에게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누가 그 소리를 싫어하겠나?
아닌 게 아니라, 안천길은 모용강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만약 남궁천을 죽이고, 남궁검을 몰아내기만 한다면…….
‘천하가 내 손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지.’
장로원도 동의해 줄 테니 어려운 일은 없다.
그리 되면 천만 냥이 아니라 일억 냥도 우스워지리라.
마침내 안천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좋소, 천만 냥을 드리지. 단, 말한 대로 이번엔 나도 현장을 지켜봐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