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부채질
신룡객잔 최상층 귀빈실.
호법당주 안천길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끄음. 하필 이런 곳을…….’
마침 마주 앉은 흑립인이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그가 바로 살곡의 부곡주였다.
“여기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오.”
“즐겨 찾진 않소.”
“클클, 여기가 운영방식이 좀 독특하긴 하지. 하나 일종의 재미로 설정한 것 같으니 마음에 두진 마시오. 나는 신선해서 좋던데.”
“흥, 주인장이나 점소이가 싸가지 없어서 그런 게 아니외다. 그런 꼼수로 유명한 곳이니까 이미 신경도 쓰지 않소.”
“한데 왜?”
“객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소! 객잔 이름이! 하필 신룡객잔이라니.”
“클클. 뭐 어떻소? 오늘의 주제와 딱 맞지 않소이까?”
“흐음.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체 왜 그 노파를 통해서 접수하지 못한다는 거요? 그깟 놈 때문에 부교주가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요?”
“흐음. ‘그깟 놈’이 좀 복잡한 상황이라서 말이외다.”
“복잡한 상황?”
“뭐, 복잡한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남궁천은 과거의 견습생이 아니지 않소? 적랑단주인 데다 맹주의 손자요. 남궁세가의 소가주이기도 하고. 후우, 말만 들어도 살 떨리는 배경이지.”
“흥! 언제적 남궁세가란 말이오? 지금은 그저 바닥을 치고 겨우 고개를 드는 남궁가의 망나니일 뿐이지!”
안천길의 비아냥거림에 흑립을 쓴 사내가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 별것 아닌 녀석이면 직접 처리하시면 될 일 아닌가?”
“그야……!”
발끈해서 소리치던 안천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 모습을 보던 흑립인이 피식 웃으며 달랬다.
“열 올리지 마시고 구체적인 의뢰 내용을 들어봅시다.”
“구체적일 것도 없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남궁천을 죽여주길 바라오.”
“흐음.”
“왜 그러시오? 어렵소? 선수금은 넉넉히 드리지.”
“사실 우리 방침이 좀 바뀌었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천에 대한 방침이 바뀌었소.”
“남궁천만?”
“그렇소. 남궁천만.”
웃기고 자빠졌네.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아는가?
안천길이 내심 비웃으면서도 더 따지지는 않았다.
사실 급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그래 봐야 선수금을 더 달라는 소리 아니오? 얼마면 되겠소? 십만 냥? 이십? 아니면 삼십?”
부곡주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다가 대꾸했다.
“말하지 않았소? 방침이 바뀌었다고.”
“그러니까 방침이 어떻게 바뀌었단 말인지 묻지 않소?”
“선수금은 없소.”
“하면?”
“일시불이오.”
“일시불? 한꺼번에?”
“그렇소.”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왜 하필 남궁천만 일시불이라는 거요?”
부곡주가 씨근거리는 안천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시는 모양인데, 남궁천에 대한 의뢰는 이미 묵 맹주가 한 적이 있었소.”
“맹주님이?”
“그렇소. 우리는 남궁천을 죽일 만반의 준비를 갖췄소. 살행을 시도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었지. 한데 그 전에 문제가 생겼소. 갑자기 맹주가 무림공적 일 호가 되어버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소. 한마디로 잔금을 치를 사람이 사라진 거지. 하여 방침을 바꾼 거요.”
“한마디로 내가 의뢰를 했다가 죽어버리면 잔금을 못 받을 테니 일시불로 받겠다?”
“역시 머리가 비상하시군.”
“갈!”
안천길이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남궁천이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일은 절대 없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안천길이 흥분해서 외쳤지만 부곡주는 그저 묵묵히 화주를 들이킬 뿐이었다.
그가 술잔을 비우고는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마치 저승사자의 미소처럼 느껴져 안천길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기분 나쁜 놈…….’
술잔을 내려둔 부곡주가 탁한 음성을 흘렸다.
“맹주는 그리 죽을 줄 알았겠소? 묵천악은 최장기 맹주 직을 유지하던 자가 아니오?”
“끄음.”
“남궁천을 노린 자는 금방 뒈져 버리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일시불로 받기로 했소.”
“한데 그걸 왜 부곡주가 말하시오? 곡주는 뭐 하시고?”
“곡주님은 일선 업무를 맡지 않고 계시오.”
“흐음.”
안천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살곡주의 나이가 괘 지긋하단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결국 결심을 굳힌 그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좋소, 일시불로 드리지. 백만 냥이면 되겠소?”
“오백만 냥이오.”
“알겠소. 그럼 오…… 뭐, 뭐라고? 오백? 오백만이라고 했소?”
“말했다시피 이제 남궁천은 맹주의 손자요. 적랑단주이자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지. 결코 쉬운 의뢰가 아니오.”
“아니, 돈도 일시불로 받는다면서 실패라도 하면…….”
“실패하면 전액 환불.”
“……!”
“단, 다시 의뢰를 하게 되면 두 배를 내셔야 하오.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는 뜻이니까.”
“으음. 금액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실패하는 건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든다면 환불받은 후 의뢰를 안 하면 그만이오.”
“흐음.”
나쁘지 않은 조건이긴 하다.
사실 강호에서 살수 단체가 이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부곡주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쩌시겠소?”
“의뢰하겠소.”
안천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실패하면 환불받을 금액이다. 오백만 냥이든, 천만 냥이든 확실히 죽여만 준다면야.
당장 오백만 냥을 아끼려다가 추후에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가만, 목숨을 잃다니. 내가 왜?
‘젠장, 괜한 이야기를 들어서…….’
아무래도 조금 전 부곡주가 한 말이 신경 쓰였나 보다. 남궁천을 죽이려는 자가 먼저 죽는다고?
웃기지 마라.
언젠가 남궁천의 모가지가 날아가는 꼴을 보고 말리라.
부곡주가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소. 의뢰를 수락하지. 돈은 오늘 중으로 마련해 주시고, 모쪼록 조심하시오.”
“돈 걱정은 말고 맡은 일이나 잘 처리해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소. 뭐, 실패 시에는 전액 환불이니 염려 마시고. 사실 요즘 들어 이상한 소문도 들리더라고.”
“이상한 소문이라니?”
“남궁천은 하늘이 돕는다나? 아무래도 약관의 나이로 적랑단주 자리까지 올라서 나도는 소리겠지. 하나 정말로 천운을 타고난 자라면 우리도 꽤 고생하긴 할 거요.”
살수들은 원래 운을 중요하게 여긴다.
철두철미하게 계획해서 진행하는 암살에서 실패할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럼에도 실패할 경우는 정말이지 우연찮게 뜻밖의 변수가 발생할 때다.
그러다 보니 타고난 운이라는 걸 어느 정도 믿는 게 살수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부곡주가 흑립을 깊이 눌러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또 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건 그쪽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겠지.”
피식.
부곡주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고는 귀빈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안천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화주를 들이켰다. 뜨끈한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남궁천. 넌 곧 뒈진다.”
* * *
무림맹에서 형벌을 제정하고 죄수들을 압송하거나 뇌옥에 가두는 등의 역할을 하는 정검당.
그중에서도 팔옥각(八獄閣)은 맹내 뇌옥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팔옥각주 탁붕호는 인상이 몹시 험한 사내였는데, 뇌옥에 갇힌 죄수들 사이에서는 염라도(閻邏刀)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성질도 사나웠다.
그런 그가 팔짱을 끼고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씨근거리고 있으니, 실내 공기는 말 그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태연한 얼굴로 부단주인 당우기로부터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이 정도가 신년 특사로 석방을 해도 될 만한 인물들이야.”
당우기가 내민 명부를 훑어본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붕호를 힐끗 보았다.
“탁 각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침내 잔뜩 골이 난 탁붕호의 입이 거칠게 열렸다.
“염병. 이미 다 정해놓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하겠소? 뜻대로 하시오.”
“흐음. 탁 각주는 당 부단주의 명부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결국 탁붕호가 참았던 성질을 터뜨렸다.
“예로부터 신년 특사만큼은 맹주님이 직접 팔옥각주의 의견을 먼저 듣고 결정하셨소! 그게 관례였소! 한데 이번엔 어찌 된 것이 그런 과정을 싹 생략한 채 적랑단에서 진행하지 않았소? 엄밀히 말해서 이건 월권행위요! 그러니 내가 기분이 좋을 리가!”
정말이지 코에서 김이 식식 뿜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남궁천이 그런 탁붕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맹주님이 직접 권한을 주셨소. 엄밀히 말하면 월권이 아니지. 그리고 관례라고 하기엔 고작 몇십 년이 아니오? 지난 몇십 년은 무림공적 일 호가 마교와 손을 잡고 호의호식하며 지낸 세월이었소. 바람직하지 않은 시절에 이어져 온 관례는 이제 깨져야 하지 않겠소?”
“그럼 내가 신년 특사를 결정할 때 비리라도 저질렀단 말이오?”
탁붕호가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치자,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말까지 한 적은 없는데. 설마 뇌물을 받고 풀어준 죄수라도 있는 거요?”
“그럴 리가 없잖소!”
“그럼 됐지, 뭘 그리 화를 내시나?”
“그게 말을 꼭……!”
말을 쏟아내던 탁붕호가 눈알만 부라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왠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자신이 말려 들어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견습생에 불과했던 녀석이 두 눈 말똥말똥 뜨고 찾아와서는 팔옥각을 뒤적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탁붕호는 남궁천이 내민 명부를 대충 훑어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도로 건네주었다.
“뭐, 이미 다 정해진 사안 같은데 맘대로 하시오.”
“그럼 탁 각주도 동의한 것으로 알고 진행하겠소. 참, 얼마 전에 잡아넣은 여자는 잘 있소?”
백묘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다만 아직 백묘의 신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기에, 탁붕호도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적랑단의 임무를 방해한 혐의로 갇힌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탁붕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충 대꾸했다.
“잘 감시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다행이군. 총관은? 곧 근신 기간이 끝날 텐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지내오.”
“좋군.”
“그럼 난 이만 업무가 바빠서 나가봐야겠소.”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돌리자, 당우기가 뒤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팔옥각을 벗어났을 때, 당우기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뇌옥에 갇힌 자들을 조사하던 중에 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뭔데?”
“지난달에 죄수 두 명이 사망했어. 그리고 두 달 전에도 그랬지. 석 달 전에도 세 명이 죽었고.”
“뭐, 뇌옥의 환경이 좋지 않으니까 수감자들이 죽는 건 흔한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하리만치 죄수들의 죽음이 규칙적으로 일어난다는 거야. 이걸 한 번 봐.”
당우기가 다른 명부를 슬쩍 내밀었다.
수감 중에 사망한 죄수들의 명단이었다.
남궁천이 명단을 찬찬히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좀 이상하긴 하네. 다만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알 수가 없네.”
“팔옥각주를 한 번 쪼아볼까?”
당우기의 말에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쪼아서 될 인간이 아냐. 저런 놈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만큼 고집도 세지. 우선 급한 건 아니니 차차 알아보자고.”
“그러지. 가끔 네가 사람 파악하는 걸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 같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남궁천이 내심 웃어넘기며 걷는데, 마침 저만치에서 손우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손 대주.”
남궁천의 물음에 손우곤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침내 그놈…… 그러니까 안천길이 살곡에 의뢰를 했습니다. 주군을 죽여달라고요.”
“호오, 그런데 넌 다른 사람이 날 죽여달라고 한 게 몹시 반가운가 보다?”
“엇, 그게 그렇게 되나요?”
손우곤이 당황해서 뒤통수를 긁적이는데,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조만간 늙은 오소리가 굴에서 나오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