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87화 (386/508)

387. 부채질

“모용강……?”

“예, 당주님.”

시종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안천길이 침상으로 걸어가 걸터앉으면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용강이라. 분명 모용신 단주의 동생이었지. 꽤 능력이 있는 후기지수였고. 지금은 견습생이었던가?”

딱히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닌 것 같았기에 시종은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내가 모용강을 마지막으로 본 게…… 아, 그렇군. 그때였군.”

모용신 단주가 비무 대회에서 충격적으로 패했을 때. 당시 모용강이 남궁천을 말리며 나섰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청랑단주를 하루아침에 반병신으로 만든 것 역시 남궁천이 아닌가?

새삼 남궁천에 대한 분노가 뱃속에서부터 끌어오려고 했다.

“저어…… 오늘은 그냥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다.”

“예?”

“안으로 들여라. 아니, 내가 나가는 게 낫겠군. 접객실로 안내해 두어라.”

“알겠습니다.”

시종이 굽실거리고는 나가자, 안천길이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동경으로 걸어갔다.

한바탕 애꿎은 가구를 부수며 분풀이를 했더니 머리카락도 엉망이었다. 그는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음을 정리했다.

모용강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수선한 방 안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 * *

“괜찮으냐?”

남궁검이 남궁천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묻자, 남궁천이 뺨을 쓰다듬으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아그그. 아직도 아파요.”

“많이 아프냐?”

“많이 아프죠! 너무 세게 때리셨어요.”

“커흠. 그 정도는 해야 그놈들도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 당황시키려다간 제 모가지가 돌아갈지도 모르겠네요. 설마 평소에 저한테 감정이 좀 남아 있던 건 아니시죠?”

“허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도 의욕이 좀 과했다.”

멋쩍은 웃음을 짓던 남궁검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느냐?”

“예, 진소홍 대주가 벌써 꽤 많은 비리를 찾아냈어요. 확실히 대상인의 딸이라서 그런지 장부만 보고도 척척 알아내더라고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나?”

“하면 천우당주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하나 그 정도로는 장로원이 움직이진 않을 게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막 불을 피웠을 뿐입니다. 본격적으로 부채질을 해대면 늙은 오소리도 어쩔 수 없이 기어 나올 겁니다.”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 산을 응시했다.

“천아.”

“예?”

“아프지 마라.”

“…….”

진득한 진심이 담긴 소리에 남궁천은 잠시 말을 잃고 남궁검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이 영감은 꼭 한 번씩 이렇게 훅 들어온다니까.’

남궁천이 찡한 코끝을 손으로 스윽 훔치고는 말했다.

“정 신경 쓰이시면 저한테 한 대 맞으시는 것도…….”

“…….”

“농이 지나쳤습니다. 죄송합니다.”

“…….”

* * *

모용강은 호법당 접객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만치 아래에 위치한 연무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청랑단원들이 보였겠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녹은 눈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풍경만 봐도 현재 호법당이 제대로 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도 저곳에서 수련을 하고, 단원들을 훈련시켰을 테지.’

늘 얼음장 같았던 모용신이 저 연무장에서 부하들을 대할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하나 역시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차갑고 냉정한 수장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단주의 부재가 지금 청랑단을 휘청거리게 한다는 것은 지도력이 훌륭했다는 방증이리라.

그런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마침 기척이 들리더니 접객실로 안천길이 들어섰다.

“아니, 이게 누군가? 모용신 단주의 아우님이 아니신가?”

안천길이 안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모용강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안천길을 보았다.

‘잡기를 부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던데 그새 속을 좀 다스린 모양이군.’

생각을 거둔 모용강이 포권을 하며 예를 갖췄다.

“견습생 모용강이 안천길 당주님을 뵙습니다.”

“허허, 거추장스러운 예는 접어두시게. 어서 이리 앉도록 하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차라도 내오지 않고!”

안천길의 호통에 시종과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창가에서 가까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안천길이 창밖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휑하지?”

“유독 추운 날씨니 쉴 때도 있어야지요.”

“허허, 일부러 돌려 말할 필요 없네. 자네 형이 그리되고 나서는 청랑단이 힘을 잃은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청랑단 아닙니까? 무림맹 제일의 타격단 중 하나인데요.”

“말도 마시게. 이젠 하늘이 바뀌었네. 청랑단은 곧 사라질지도 모르네. 오늘만 해도 적랑단주가 청랑단 부단주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가했다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천길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우당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모용강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마침내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런 괘씸한! 남궁천이 기고만장해서 마치 제 세상인 것처럼 설치고 다니는군요! 당주님은 그 꼴을 보고만 계셨던 겁니까?”

“어쩔 수 없었네. 하필 그 순간 맹주님이 나타나셨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맹주님께 더 따졌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모용강이 제 가슴까지 탕탕 치면서 말하자, 안천길은 묘하게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그나저나 모용신은 좀 어떤가?”

“형님은 본 가에서 요양 중입니다. 낙심에 빠져서 누구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긴. 단전을 잃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게 다 남궁천 때문입니다. 저는 남궁천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네 마음을 이해하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당주님! 어찌 그런 모욕까지 당하고 참으시려고만 합니까? 저는 당주님이라면 그래도 뭔가 수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당주님이라면 제 형님의 복수를 대신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한데 이리 무기력하시다니요?”

“나라고 가만히 있고 싶겠는가?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닐세. 섣불리 움직여서 실수라도 했다간 남궁가 놈들에게 책을 잡히고 말 것이야.”

“역시…… 방법이 없는 걸까요?”

“자네의 분한 심정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아네. 모용신 단주는 자네 형이기도 하지만, 내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던 부하였네. 하지만 지금의 실세는 남궁가일세. 오늘 남궁천이 선을 넘으면서 좋은 기회가 생길 뻔했지만, 그것도 맹주가 나타나서 허사가 됐지. 쉽지 않은 상황일세.”

“그렇군요. 하아, 어쩔 수 없죠.”

모용강이 낙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안천길이 모용강의 손을 꼭 맞잡았다.

“나도 자네만큼이나 남궁가 놈들을 씹어 삼키고 싶네. 하나 지금 맹에서 그들을 칠 수 있는 조직은 없네. 오히려 살아남기에 급급한 실정이지.”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괜히 제가 찾아와서 심란하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모용강이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천길도 그저 안타까운 눈길로 모용강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모용강이 순간 멈칫거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들을 칠 수 있는 조직이 맹 내에 없으면…… 바깥은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안천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자, 모용강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굳이 남궁천과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면?”

“당주님은 크게 되실 분입니다. 제 생각에 당주님은 천하를 굽어보실 분입니다. 해서 형님도 당주님을 그토록 따랐을 겁니다.”

“커흠! 하나 지금의 상황을 보면…….”

“이 상황을 뒤집어야지요!”

타앙!

모용강이 느닷없이 탁자를 짚으며 소리치자, 안천길이 움찔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래?’

속내를 갈무리한 안천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으로선 우리가 움직일 방법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당주님처럼 크게 되실 분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강호에 차고 넘치는 게 칼자루입니다.”

“……!”

안천길은 그제야 모용강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설마 자네…… 지금 살수 조직에 청부를 하자는 건가?”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직접 기회를 노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용강이 말을 끊으며 얼른 부추겼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듣기로는 전임 맹주님과 이미 관계를 맺은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살곡!

안천길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자네가 거기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예, 형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모용강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안천길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모용강이 이러한 내막까지 어찌 알고 있겠는가?

“흐음.”

안천길이 침음을 흘리자, 모용강이 더욱 부추기기 시작했다.

“기회를 보자고 하셨지요? 하나 잠자코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남궁천을 막으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맹주님도 진작 남궁천을 제거했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놈은 방치해선 안 될 놈입니다. 절대로! 그랬다간 분명 그 독사 같은 놈이 무림맹을 완전히 장악하고 말 겁니다. 그땐 청랑단은 물론 호법당의 운명도 어찌 될지 알 수 없겠지요.”

듣기만 해도 무서운 말이었다.

하나 안천길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아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남궁천이 어떤 녀석인가?

견습생이었던 주제에 단숨에 맹주를 무림공적으로 몰아내고 적랑단주 자리에 앉아 맹을 좌지우지하는 놈이 아니던가?

그런 녀석이 시간이 흐른다고 제풀에 지칠까?

오히려 자신을 비롯한 기득권을 더욱 궁지로 몰아붙이리라.

지금도 죽을 지경인데, 더 내몰린다면…… 그래서 맹주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모용강이 안천길의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남궁천을 만만히 보았던 제 형님이 어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남궁천을 지켜만 보던 맹주님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주십시오. 손 놓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주님.”

“으음…….”

안천길이 신음처럼 소리를 흘려냈다.

하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무한의 저잣거리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난다. 무림맹이 있는 만큼 옆구리에 칼을 찬 무인도 즐비하고, 인근 삼대 학관에 다니는 생도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손님을 호객하는 점소이, 따끈따끈한 만두를 쪄내는 숙수, 당과를 빨아먹으며 지칠 줄도 모르고 달리는 아이들, 봇짐을 메고 걸음을 옮기는 보부상.

모처럼 저잣거리로 나온 안천길은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모습이지.’

한동안 잊었던 심리적 여유를 잠시나마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도 이런 여유를 느낀 게 꽤 오래전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게 다 그 남궁천 때문이다.’

어금니가 절로 부득부득 갈린다.

모용강이 돌아간 후로도 밤새 안천길은 거듭 고심을 했다.

장로원주는 그에게 섣불리 움직이지 말 것을 권했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특히 일이 잘못되면 장로원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은 처지가 달랐다.

오늘도 천우당주는 녹초가 된 얼굴로 자신을 찾아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적랑단이 아주 작정을 한 듯이 천우당을 탈탈 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로 털어대면 먼지가 아니라 온갖 오물 덩어리도 다 나올 판이었다.

그리되면 무림맹 천우당주라는 명예는 옛말이 되고 만다.

맹에서 쫓겨나기만 하면 다행이다.

자칫 뇌옥에 갇히기라도 하면 당주의 식솔들도 죄인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남궁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 남궁가는 무림맹의 기득권을 모두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이리라.

자신들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것이리라.

‘원주님, 저는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천우당주 다음에는?

자신이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절대 그렇게 당할 수는 없다.

죽립을 눌러쓰고 한참을 걷던 안천길이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발길이 머문 곳에는 한옆에서 노파가 돗자리를 깔고 온갖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다.

“어서 오슈.”

안천길처럼 죽립을 눌러쓴 노파가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대충 인사를 건넸다.

안천길이 냉랭한 목소리를 꺼냈다.

“자네가 파는 것 중에 가장 추악하지만 제일 비싼 것을 주게.”

암어였다.

일순 노파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바로 살곡의 접선책이었다.

노파가 고개를 들고는 안천길과 눈을 마주쳤다.

“어떤 놈을 처리해 드릴까요?”

“남궁천. 반드시 죽여주게.”

죽립 아래로 노파의 입매가 희미하게 치켜 올라갔다.

“제 선에서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군요. 부곡주님께 안내해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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