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부채질
“오히려 더 거칠게 나갈 생각입니다.”
남궁천의 말에 남궁검이 뒷짐을 진 채 눈을 가늘게 뜨고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거칠게라. 반발심을 더 불러일으키겠다는 심산이더냐?”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남궁검이 돌아보자, 남궁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차피 장로원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어지간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에야.”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막말로 사람 하나 죽어나가지 않는 이상 장로원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예, 할아버지가 직접 보셨으니 분명 그럴 겁니다.”
남궁검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자다. 게다가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때문에 남궁천은 남궁검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쓰기로 더욱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래서?”
남궁검의 물음에 남궁천이 찬 바람을 맞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말씀하신 대로 누구 하나 죽어나가지 않는 이상 꿈쩍도 하지 않겠지요. 하면 누구 하나 죽으면 됩니다.”
“아무나 죽어서는 안 될 텐데?”
“물론이죠. 전임 맹주와 친분이 두터운 자가 좋을 테지요.”
“하나 그렇다고 정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너무 과격하게 나가면 장로원을 끌어들이기 전에 맹원들의 반발이 견디기 힘들 만큼 극심해질 것이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해서 무턱대고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원칙과 규율에 맞게 죽일 생각입니다.”
“원칙과 규율이라.”
“상대는 지금 이를 잔뜩 드러내고 으르렁대고 있어요. 바짝 약이 오른 짐승일수록 잡기가 수월하죠.”
남궁검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다 대답했다.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구나.”
“예, 할아버지. 원하신다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남궁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다시 먼 산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됐다. 일일이 내게 말할 필요 없다. 너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다. 그러니 어디 한 번 그 뜻을 마음껏 펼쳐보아라. 나는 그저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마. 위태로울 때 네가 의지할 수 있는 벽이 되어주마.”
담담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하나 남궁천에게는 그 말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다.
이것이…… 보호받는 기분인가?
평생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주 오래전 남궁선이 살아 있을 때, 그녀로부터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나 그때는 보호해 주겠다는 마음이 더 앞섰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온전히 누군가 뒤를 받쳐주는 느낌이다.
마치 안전한 그물망을 저 아래에 펼쳐둘 테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마음껏 즐기라고 하는 것만 같다.
남궁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 * *
남궁천이 대문으로 들어오는 안천길과 유백랑을 보면서 눈살을 찡그렸다.
“감히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적랑단주는 대체 뭐 하는 작자인가? 이 엄중한 시기에 마교나 흑무련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어째서 내부에서 이리 칼춤을 춰대는 것인가!”
“앞서 맹주님의 지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금 맹주님께 ‘감히’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맹주님은 하늘이라도 된단 말인가! 모든 일에는 명분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천우당에 이 같은 모욕을 준단 말인가!”
“신년입니다. 마침 맹주님도 바뀌었습니다. 그럼 제일 먼저 재정의 건전함을 확인하는 게 절차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천뇌당을 통해 일을 처리했어도 될 일. 하필이면 자네가 나선 저의가 무엇인가?”
“그건 맹주님 마음이지요. 원래 충의대가 할 일을 천뇌당에 맡겨야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끈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하! 이젠 아주 권력 놀이에 취했구나!”
남궁천이 말을 삼키고는 안천길을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안천길도 물러나지 않고 그 시선을 냉랭하게 맞받았다.
마침내 남궁천이 걸음을 저벅저벅 옮기더니 안천길 앞으로 걸어갔다. 남궁천이 지척에 다다르자 최팔이 얼른 그 앞을 막아서며 험악한 인상을 드러냈다.
“물러나시……!”
퍼억!
슈우우욱, 콰당탕!
이번에도 단 일격.
남궁천의 주먹을 얻어맞은 최팔이 그대로 튕겨 나가더니 대문마저 부수며 외원을 나뒹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청랑단원들은 움찔거리면서도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못했다.
이미 청랑단주인 모용신이 만신창이가 된 후로 청랑단원의 조직력은 예전만 못한 상황.
다들 당혹감에 휩싸여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안천길이 분노로 뺨을 파르르 떨었다.
“이게 뭐 하는 짓……!”
철썩!
순간 안천길의 뺨이 휙 돌아갔다.
댕그렁……!
지켜보던 수라검대 중 누군가 검을 떨어뜨린 것인지 바닥에서 금속성이 울린다.
안천길은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남궁천에게 뺨을 맞았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남궁천의 느닷없는 행동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때문에 곁에 있던 천우당주 유백랑도 입을 쩍 벌린 채 돌처럼 굳어서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저 이 황당한 상황에 애꿎은 눈썹만 파들파들 떨 뿐이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안천길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이런 개 같은……!”
“정신 차려요. 여러 번 말했을 텐데.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전부 뇌옥에 처넣는 수가 있어요.”
“뭐, 뭐……? 이익……!”
“내가 이렇게 계속 경고를 해주는 것도 마음이 약해서 그래요. 그래도 직위가 나보다 높은데, 내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것도 자존심 상할 테고. 이렇게 말로 할 때 고분고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 냐…….”
“으응?”
“오냐! 어디 한번 처넣어 보아라! 네놈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 뭐든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래, 네놈 말이 백번 옳다고 하자! 하나 우리가 무력을 썼느냐? 전부 네놈이 먼저 시작했어! 이런 짓이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금은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을 지라도 그 끝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호오, 지금 또 반역스러운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냥 다 처넣어 버릴까?”
“흥! 네놈이 권력에 취해 이렇듯 건방지게 나오면 그 누구도 네놈을 지지하지 않을 터! 청랑단!”
“예, 당주님!”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무력을 먼저 쓴 것은 이 녀석이다! 맹 내에서 무력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라!”
“존명!”
차차차차앙!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면서 투기를 끌어 올렸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청랑단원들을 훑었다.
“여기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하시겠다?”
“후후.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맹주님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맞는 말이다.
신임 맹주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맹 내에서 혈전이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통솔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그런 일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이 양반아.’
남궁천이 속내를 떠올리는 사이, 마침내 대문에서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무슨 일인가?”
귀에 익은 음성에 모두가 흠칫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부서져 나간 대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맹주 남궁검이었다.
후우우우웅!
일순간 공력을 끌어 올렸던 것인지 남궁검의 장삼이 부풀면서 후끈한 기운이 사방으로 불었다.
그 등장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맹주……!’
안천길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남궁검을 노려보았다.
한편으로는 남궁검의 등장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남궁천이 망나니처럼 설쳐대는 게 나았을지도…….’
그랬다면 확실히 맹주와 적랑단의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으리라.
분명 처음에는 남궁천에게 명분이 더 있었다.
하지만 남궁천이 무력을 쓴 후부터는 분위기가 반전됐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남궁검이 자기 손자를 두둔하고 나선다면 맹 내의 반발심은 극에 달하리라.
‘그래, 이왕 나타났다면 어디 손자를 두둔해 보시지.’
안천길이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가운데, 남궁천이 남궁검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맹주님 오셨습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남궁검이 한쪽 구석에 쓰러진 장인걸과 바깥마당에 널브러진 최팔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남궁천이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맹주님의 명에 따라 천우당의 재정 관리 상태를 점검하려던 중 저항이 극심하여 어쩔 수 없이 손을 썼습니다.”
“흐음. 호법당주께선 여기 어인 일로?”
“천우당주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맹주님, 이런 무분별한 억압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전 통보를 생략한 것은 그렇다 치고 항의를 좀 했다고 해서 먼저 무력까지 쓰다니요? 이게 정녕 맹주님의 뜻입니까? 제가 이 나이 먹고 뺨까지 얻어맞을 줄은 몰랐습니다!”
“뺨을 맞아……?”
남궁검이 설명을 바라는 눈치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계속해서 저항하기에 피치 못해…….”
짜악!
순간 남궁천의 뺨이 휙 돌아갔다.
워낙 뜻밖이었기에 주변의 모두가 눈을 찢을 듯 부릅뜨고는 숨도 쉬지 못했다.
안천길과 유백랑도 마찬가지.
당연히 손자를 두둔하고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뺨을 후려치다니?
“내 아무리 너에게 권한을 주었다지만, 예는 갖췄어야 할 일이다. 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며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 우선이어야 했다.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서 걱정이라고.”
“죄송합니다.”
남궁천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천길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남궁검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속은 좀 풀리셨소? 적랑단주가 의욕이 앞서는 바람에 실수를 한 것 같소. 호법당주께서 받은 모욕은 내가 대신하여 돌려주었소. 그러니 당주께선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또한 재정 관리 상태는 맹을 안전히 이끌기 위한 점검이니 이해해 주길 바라겠소.”
“끄음…….”
안천길이 굳은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런 것이었나!’
남궁천이 권력에 취해 자신의 뺨을 때린 것은 분명 충격적인 일이다. 세간에 떠돌 만한 일이다.
한데…….
‘빌어먹을!’
남궁검의 지금 행동으로 그 충격적인 일이 죄다 묻혀 버렸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꺼낸 뒤에 분명 이렇게 말하리라.
“남궁검 맹주님이 손자도 봐주지 않고 똑같이 뺨을 올려붙였다더군.”
“크으, 역시 맹주님이시다. 정에 이끌려서 봐주지 않고 오히려 냉정하게 잘잘못을 가리시다니!”
한마디로 자신이 맞은 뺨은 남궁검의 공명정대함을 드높여 주는 역할만 하게 되리라.
까드득.
‘애초에 이것들이 작당을 한 것이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기가 막힌 순간에 하필 맹주가 나타났을까?
게다가 맹주가 적랑단주의 뺨까지 후려치면서 저리 정중히 말하니 누가 거기에 대고 반박을 할까?
마침 남궁검이 모두가 또렷하게 들을 수 있도록 공력까지 실어서 말했다.
“맹주로서 명한다. 지금부터 맹의 건전한 재무를 확인하기 위해 천우당의 재정 관리 상태를 조사할 것이다! 이는 신년을 맞아 당연한 절차이기도 하니 그 누구도 반대하지 말도록! 또한 모든 조사는 남궁천 적랑단주에게 일임한다!”
“존명!”
맹주가 직접 내린 명이다.
누가 반기를 들까?
모든 무인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고 나니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안천길 곁을 지나쳤다.
“그럼. 저는 이만. 대가리도 박으셨는데, 저한테 뺨까지 맞으시고. 죄송했습니다.”
‘이 개새끼……!’
까드득.
맞은 뺨이 뒤늦게 욱신거린다.
남궁천을 필두로 적랑단원들이 우르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검의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적랑단원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이래서야 마치 범죄 집단을 조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안천길과 유백랑은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 *
콰장!
“이 개새끼!”
탁자가 무참히 부서져 나갔다.
안천길이 욕지거리를 뱉어내면서 의자마저 집어 던졌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콰장창창!
의자가 완전히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시종이 놀라서 뛰어왔다.
“당, 당주님! 괜찮으십니까? 제발 고정하십시오.”
“시끄럽다! 물러가 있어라!”
안천길이 버럭 소리 지르고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남궁천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썩 꺼지라니까!”
“예, 예. 그런데 저어…….”
“뭐냐?”
“손님이 찾아와서…….”
“손님? 누구냐?”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모용신 단주의 동생분이신 모용강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