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오소리 굴에 연기를 피워라
청랑단 부단주는 연신 씨근거리면서 행랑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마침 빗자루를 들고 지나가던 시종과 어깨를 부딪치자 그가 눈썹을 성큼 추켜올리며 소리쳤다.
“썩 비키지 못해?”
“죄, 죄송합니다!”
“한심한!”
최팔이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고는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장 호법당주실로 들어갔다.
“당주님!”
마침 창가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호법당주 안천길이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도 이젠 내가 우스운 건가?”
칼날 같은 음성에 최팔이 움찔거리고는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내가 우스워도 기본적인 예는 지켜야지.”
“제가 어찌 당주님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흐음. 앉게.”
그제야 안천길도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맞은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사실 그도 요즘 심기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일도 지금은 까칠하게 반응했다.
시녀가 찻잔을 두고 돌아가자, 안천길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당주님.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신임 맹주가 맹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청랑단도 거의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벌써 며칠째 아무런 임무도 하달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이대로면 청랑단이 해체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어디 위태로운 조직이 청랑단뿐이던가?”
“그러니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예?”
“못 참으면 어쩔 텐가? 식물 조직이 되어버린 청랑단 부단주인 자네가 뭘 할 수 있나? 청랑단을 이끌고 반역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그런……!”
“적랑단을 상대할 수는 있고?”
“끄음. 하지만 그렇다고 식물인 채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최팔이 분통이 터지는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안천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때를 기다려 보세. 아직은 섣불리 움직일 때가 아니야.”
“맹주와 적랑단주가 지금 맹을 들쑤시고 다니는데도요?”
“그래 봐야 한계가 있을 걸세. 이미 장로원에는 내가 말씀을 올려두었네. 해서 지금 장로원도 꿈쩍하지 않는 것이고. 조직을 해체하고 설립하는 것은 장로원의 동의가 필수일세. 장로원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청랑단이 사라질 염려는 할 필요가 없어.”
“만약 엉뚱한 인물을 청랑단주로 임명하면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가?”
“예?”
안천길이 깊어진 눈으로 최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재차 물었다.
“원치 않는 인물이 단주로 임명되면 자네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냐고 물었네.”
“그거야…….”
“이미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추지 않았나? 자네라면 대주들을 쉽게 통솔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결국 고립되는 건 신임 단주가 될 테지.”
“흐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는 아니란 말일세. 얼마든지 대응할 방도는 있을 거란 말이야.”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도 당주님이 그리 말씀해 주시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군요.”
“모용신 단주가 모용세가로 돌아간 후 청랑단은 여러모로 어려운 실정일세. 하나 때가 되면 재기할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야. 시간은 우리 편일세. 나 역시 남궁세가 놈들을 전부 씹어 먹고 싶지만 참고 있는 거라네.”
사실이었다.
특히 안천길은 그 누구보다 남궁세가 사람들이 싫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박지 않았던가?
그 치욕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끝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안천길이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한 번 더 가라앉히고는 말을 이었다.
“다행히 장로원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네. 진정한 권력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지. 바로 장로원처럼.”
“확실히 장로원이 계속 외면한다면 남궁가 놈들도 제풀에 지치겠군요.”
“그뿐만 아니라 맹 내에서 점점 고립이 될 테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것이야. 그때쯤엔 남궁 놈들이 먼저 두 손을 들 테고.”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몸이 근질근질하지만 참고 있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지금은 섣불리 움직여서 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좋아.”
“예, 당주님.”
하지만 상황은 두 사람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은 남궁천이 파놓은 늪에 빠진 상황.
남궁천은 그들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안 당주님! 큰일 났습니다!”
느닷없이 실내로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친 사람은 다름 아닌 천우당주 유백랑이었다.
유백랑이 호법당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안천길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오?”
“적랑단주가 천우당을 찾아왔습니다!”
“적랑단주가? 남궁천이 왜요?”
“천우당의 재정 관리 실태를 조사하겠다는 이유입니다!”
“뭐요?”
안천길이 눈썹을 성큼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도대체 왜 적랑단이 천우당을 조사한단 말인가?
적랑단은 어디까지나 사파나 마교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한데 느닷없이 천우당을 조사해?
내부 칼질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도대체 그게 무슨 횡포란 말이오?” 적랑단이 무슨 자격으로 천우당을 조사한단 말입니까?”
“그게…… 맹주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뭣이? 허 참!”
안천길이 뺨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떨결에 맹주 자리에 오른 자가 이젠 아주 작정을 하고 맹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안천길의 두 눈은 이제 불이라도 뿜을 것처럼 벌겋게 충혈되었다.
‘원주님!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참고만 있어야 합니까? 진정 참고 견디는 것이 답입니까?’
그는 최팔에게 해준 말도 잊은 채 같은 질문을 속으로 던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건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어쩐지 불안하다 싶었건만.’
천우당은 맹에서 기획과 재정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장부를 남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만큼 작정하고 털어버린다면 가장 먼지가 많이 날 곳이 바로 천우당이기도 했다.
“해서 지금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선 본 당의 수라검대가 나서서 맞서는 중입니다. 하지만 명분이 부족합니다. 저쪽은 맹주님의 명이라고 하니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달려오는 사이 벌써 뚫렸을지도 모르겠고요.”
“명분은 무슨 명분! 적랑단이 내부 칼질이나 하라고 만든 조직이 아니잖소? 명분을 따진다면 그쪽이 먼저 선을 넘은 게지! 갑시다! 내 직접 적랑단주를 만나 봐야겠소!”
“앞장서겠습니다.”
천우당주 유백랑이 휙 돌아서자, 안천길이 그 뒤를 곧장 따랐다.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 최팔을 돌아보곤 말했다.
“자네도 청랑단을 이끌고 따르게!”
“알겠습니다, 당주님!”
최팔이 속 시원하게 대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 * *
천우당 안마당에 살벌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남궁천을 필두로 한 적랑단 대주들이 당장에라도 천우당으로 쳐들어갈 것처럼 기운을 끌어 올렸고, 전각을 등진 수라검대는 어떻게든 막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수라검대주 장인걸이 한 걸음 앞서면서 묵직한 목소리를 꺼냈다.
“이건 월권행위요. 적랑단주.”
“내 마음대로 천우당을 들쑤신다면 분명 월권이겠죠. 하지만 전 그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비켜주시죠? 이러면 반역 행위입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맹주님의 명령인데 명분이 필요합니까?”
“아무리 맹주님이더라도 지켜야 할 절차와 규율이 있는 것이오!”
“안 지킨 것도 없습니다만.”
“이건 너무하지 않소! 어떠한 예고도 없이…….”
“에이, 감사를 할 때 예고를 해버리면 의미가 없죠. 이렇게 불쑥 들어 와야 비리도 밝히고 잘못된 점도 찾아내지 않겠습니까?”
“내부 칼질도 적당히 하시오!”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도 있죠. 저는 그 진정한 적을 가리려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그 적이오!”
“흐음. 말씀이 심하시네요.”
“이익……!”
“…….”
장인걸이 당장 검이라도 뽑을 것처럼 공력을 끌어 올렸고, 남궁천 역시 차디찬 시선으로 대응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방해하시면 무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감히!”
차아앙!
결국 장인걸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그러자 배후에 도열해 있던 수라검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차차아앙!
예기를 머금은 검신이 뽑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안마당에 칼바람이 불었다.
휘이이이잉!
남궁천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슬쩍 쓸어 넘기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먼저 뽑으신 겁니다?”
“뭐, 뭣이?”
“떳떳하면 순순히 조사를 받으시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흥! 아무리 맹주님의 지시라고 해도 이렇게 집안사람에게 권한을 주고 칼자루를 휘두른다면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소.”
“아시다시피 지금 맹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기관이 없습니다. 제가 집안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피치 못한 것일 뿐이에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원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맹주의 직속 부대인 충의대였다.
하지만 충의대 양하진은 전임 맹주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양하진은 맹주를 도와 온갖 불법적인 일을 행한 것이 드러나 뇌옥에 갇힌 신세였다.
남궁천이 수라검대를 싸늘하게 훑어보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이렇게 방해를 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스르르릉.
순간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었다.
단지 검신을 뽑았을 뿐인데도 그 단순한 행위로 안마당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차차차아앙!
남궁천 뒤로 도열한 대주들과 적랑단원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숨 막힐 듯한 투기가 팽팽하게 느껴졌다.
장인걸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명분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남궁천이 더 유리한 상황이다.
신임 맹주가 각 조직이 제 구실을 제대로 하는지 알기 위해 적랑단을 파견했을 뿐이니까.
‘당주님……!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천우당주 유백랑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남궁천을 저지해 달라고 말했다.
하나 이대로 가다간 정말 칼부림이 날 판이 아닌가?
남궁천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비켜주시죠, 대주님. 더 이상 본 단을 막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반, 반역이라니……!”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남궁천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장인걸은 점점 다가오는 남궁천을 보며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쩐다? 남궁천이 들어가면 본 당의 비리가 낱낱이 파헤쳐질 터. 그렇다고 막아선다면 반역으로 내몰릴 판이고. 만약 남궁천을 막으면 당주님이 날 빼낼 수 있을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남궁천이 바로 코앞까지 다다르자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그만! 더는 들어갈 수 없……!”
슈카앙!
슈우우우욱, 콰다앙!
남궁천이 무심히 휘두른 검에 장인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가면서 한쪽 벽에 처박혔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장인걸이 몸을 꿈틀거리다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지자, 수라검대가 움찔거리고는 투기를 끌어 올렸다.
하나 다음 순간 남궁천이 살기마저 뿜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까불지들 마라. 전부 반역으로 뒈지고 싶나?”
이쯤 되자 수라검대도 전의를 상실하고는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상대는 맹주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장은 단 일격에 튕겨 나가서 한쪽 구석에 처참히 쓰러져 있다.
이렇듯 상황에 압도되어 버리니 누구도 남궁천을 막아서지 못했다.
남궁천이 걸음을 멈추지 않자, 수라검대가 자연스럽게 양 갈래로 나뉘면서 길을 터주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남궁천이 문득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진 대주, 같이 가지.”
“예.”
진소홍이 얼른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상재가 있는 진소홍이었기에 재정 장부를 본다면 문제점도 훨씬 빨리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전각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앗!”
날카로운 고함이 등을 찔렀다.
남궁천과 진소홍이 돌아보자, 언제 온 것인지 천우당주와 호법당주가 대문으로 들어서면서 씨근거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최팔이 청랑단을 우르르 이끌고 들이닥쳤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천우당을 들쑤시는가!”
안천길의 호통에 남궁천이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