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오소리 굴에 연기를 피워라
“추후 천독노를 약천당주로 추천하겠다고?”
남궁검이 젓가락질을 뚝 멈추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는 남궁천과 함께 맹주실에서 오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모처럼 조손지간에 오붓한 식사 자리였는데, 남궁천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낸 것이다.
천독노라니.
천독노는 무림공적이 아니던가?
그런 자를 약천당주로 추천하겠다니.
남궁검이 젓가락을 내려두고는 남궁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궁천 역시 수저를 놀리지 않고 바른 자세로 남궁천의 말을 기다렸다.
이미 남궁검의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태도다.
하긴 예상을 못 하는 게 더 이상하리라.
남궁검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본 가의 위상을 끌어올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너와 내가 식사를 하는 것 또한 네가 만든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 다소 우려가 되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자신감은 모든 성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 자신감이 지나쳐 자칫 선을 넘게 되면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수가 있다. 세상을 내 생각 안에 가두는 수가 있다는 뜻이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고 객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때는 필히 실수가 나오는 법.”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천의 담담한 대꾸에 남궁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설득할 생각이구나.”
“사실 그렇습니다.”
“우려되는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천독노는 무림공적이다. 그런 자를 과연 본 맹에서 받아들이겠느냐? 더구나 천독노는 사파로 분류된 자가 아니더냐? 둘째, 그 산을 넘었다고 한들 과연 천독노가 약천당주를 맡으려고 하겠느냐? 내 듣기로 천독노는 강호를 유랑하며 자유롭게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약천당주라는 자리는 권력을 가지는 만큼 제약도 많이 따를 텐데.”
“그래도 약천당주로 맹에 머무는 것이 무림공적으로 뇌옥에 머무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흐음. 천독노를 무림공적 명부에서 삭제하고자 하느냐?”
“예, 할아버지. 나머지는 직접 제가 수뇌인사들을 설득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때쯤엔 판이 깔려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제 설득이 잘 먹혀들 수밖에 없는 판이요.”
“허어.”
남궁검은 잠시 넋을 놓은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이제 약관을 채운 손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지난번만 해도 남궁천은 몇 수 앞을 내다보고 맹주를 궁지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맹주의 수급을 정문에 효시하고, 마교의 수뇌급 무인까지 생포해 왔다.
‘정말이지 내 손자지만 괴물 같은 녀석이로고.’
남궁검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다. 늙은이의 잔소리가 길었구나.”
“아닙니다, 할아버지. 그 잔소리 덕분에 한 번쯤은 제 생각을 검토할 수 있으니까요.”
“허허.”
언제 이리 철이 들었을까?
남궁천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 이제 이 아이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괜한 짓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믿어주고 지켜보면 되리라.
때론 그저 든든한 버팀목처럼 가만히 곁에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른의 역할을 다한 것일 수도 있으니.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것일지도.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보아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활짝 웃으며 대꾸하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참, 장로원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반응이 어떻던가요?”
남궁검이 피식 웃었다.
이미 그 냉소에서 남궁천은 대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역시나 예상한 대답이 남궁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꿈쩍도 하지 않을 생각인 듯하다. 굴 속에 들어앉아서 머리조차 내밀 생각을 하지 않더구나.”
“아예 외면하는 걸로 대응하기로 한 모양이군요.”
“자신들의 권력을 잘 이해하는 것이겠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무림맹 조직 개편은 요원한 일이 될 테니까.”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럼 역시 이쪽에서 더 난리를 쳐야겠군요.”
“어찌할 생각이냐?”
“굴 속에 들어앉은 늙은 오소리들을 꺼내려면…… 역시 연기를 살살 피워야죠.”
남궁천이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히죽 웃어 보였다. 이젠 그 웃음만 마주해도 왠지 근심이 풀리는 남궁검이었다.
‘나도 이제 늙은 모양이군. 이만큼이나 손자를 의지하다니.’
내심 스스로에게 혀를 차면서도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 *
총군사 제갈승이 두터운 책자를 들고 천뇌당 접객실로 들어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했다.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예는 접어두시게. 우선 자네가 요구한 무림공적 명부일세.”
제갈승이 탁자 위로 책자를 내려두었다.
남궁천이 책을 펼쳐 보니 각 무림공적 이름 아래로 죄목과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다행히 무림공적 일 호로 분류되었던 진천랑 부분은 붉은색으로 줄을 그어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표식이 있었다.
그래도 전생의 자신의 이름을 이런 무림공적 명부에서 찾아보게 되니 썩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제갈승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붉은 선으로 그어놓은 것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일세. 죽은 자는 사망했다고 글로 적어둘 뿐이지. 한마디로 자네 아버지는 무림공적 명단에서 제외되었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진 않군요.”
“그렇겠지. 하나 이젠 털어버려야 하지 않겠나?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복수를 이룬 이상 과거에서 빠져나올 때라고 생각하네.”
“그래야겠지요. 총군사님은 어떻습니까?”
“뭐가 말인가?”
“전임 맹주에 대한 애착 같은 건 없는지요?”
“글쎄. 나는 누구든 이 강호의 평화를 잘 유지할 수 있는 자라면 상관없네. 누구의 편도 아닐세. 지금은 남궁검 맹주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으나, 앞일은 또 어찌 될지 알 수 없지. 총군사야말로 어느 한쪽의 편에 서기보다 늘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군요. 그거면 됐습니다.”
“또 궁금한 게 있는가?”
“아, 무림공적 명부에서 제외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자네 아버지처럼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증거가 명백할 경우지. 또 다른 경우라면 이따금씩 맹을 위해 공을 세웠거나, 구파일방을 도와 협의를 실천한 자들일 경우 명단에서 제외한다네. 하지만 대개의 무림공적들이 그럴 일을 할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될 걸세.”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맹주께서 신년 특사로 선정하기 위해 이 명부를 찾으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부디 맹주님께 객관적으로 판단하시라고 전해주게.”
“그러겠습니다.”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총군사가 따라 일어나며 마침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저번에 말한 소공마의 정체를 알아냈네.”
“누구였습니까?”
“현 마교의 부교주인 것 같네.”
“아…….”
남궁천이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만약 소공마를 생포하거나 죽일 수만 있었어도 큰 소득이었으리라.
남궁천이 아쉬움을 달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무림칠성에 대해서 궁금합니다만.”
“무림칠성?”
“예, 무림칠성에 누가 속해 있죠?”
그러자 제갈승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아, 예…… 뭐. 제가 딱히 관심이 없어서.”
남궁천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실 전생에는 눈만 뜨면 도망 다니기 바빴다.
무림칠성이 누구며, 뭐 하는 인간들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알아낼 시간도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 버티는 것만이 최대 관심사였으니까.
뭐, 환생한 후에는 그 나름대로 삶이 바빴고.
“잠시 기다리게.”
말을 남긴 제갈승이 집무실로 들어가더니 곧 책자 한 권을 또 들고 나왔다.
“여기 무림칠성에 대한 정보도 간략하게나마 기술되어 있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구파일방에만 오성이 존재하지. 천천히 읽어보고 반납하게나.”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그렇게 남궁천이 접객실을 빠져 나가자, 제갈승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자가 아닌가?
세상 이치에 통달해서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 같다가도, 지금처럼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물어오다니.
‘남궁천. 참 자네는 묘한 방식으로 흥미를 끄는군.’
하긴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리라.
제갈승은 왠지 좋은 의미로 남궁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승천각주 조순욱은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 순간 폭음처럼 요란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다.
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창문을 열어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흐아암!”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가 눈을 비비며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걸음으로 행랑을 따라 걷다가 승천각 연무장에 다다르고 보니, 아직도 백무극과 모용강이 서로 비무를 하는 중이었다.
조금 전 들렸던 폭음과 같은 소리는 바로 저 두 사람이 격돌하면서 들린 모양이었다.
‘허어, 아직도 저러고 있었나?’
두 사람은 현재 유일하게 승천각에 남아 있는 견습생들이었다.
남궁천을 비롯한 다수의 견습생은 모두 정식 적랑단이 되었고, 운경은 종남파 본산으로 돌아간 후 봉문하는 바람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견습생 신분인 모용강과 백무극만이 매일 승천각으로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하루 일과는 늘 똑같았다.
승천각에 오면 조순욱은 딱히 할 일이 없는 두 사람에게 자유 수련을 시켰고, 하루를 흘려보내곤 했다.
다만 매사에 의욕이 없는 조순욱과 달리 모용강과 백무극은 나름 수련을 열심히 하면서도 이따금씩 살벌한 대련을 펼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자자, 그만. 이제 해가 저물 테니 너희들도 그만 돌아가라.”
그제야 모용강과 백무극이 대련을 멈추고는 조순욱에게 다가왔다.
“다른 조직에서 요청은 없었습니까?”
모용강의 말에 조순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없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맹주님이 새로 오시고 나서, 각 조직이 바짝 긴장한 상태다. 견습생들까지 들여서 가르칠 여력이 없다는 뜻이지. 그러니 너희들도 괜한 기대는 하지 말고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가 들어가라. 나중에 맹이 조용해지면 정식 발령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모용강과 백무극이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모용강은 백무극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던지고는 걸음을 돌렸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신은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벌써 견습생 동기들은 적랑단으로 활약하며 공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특히 남궁천은 적랑단주로서 엄청난 활약을 해냈다.
맹주까지 갈아치울 정도니 말해서 무엇 하랴?
‘괴물 같은 놈.’
애초에 남궁천 따위는 경쟁자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유현 정도면 모를까?
한데 생각지도 못한 호구가 나타나더니 영웅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강호인가?
처음에는 남궁천이 미치도록 미웠는데, 이젠 묘하게도 감정이 사라지고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녀석, 나와 달리 지금쯤 정신없이 바쁘겠지?’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나? 내 생각 하나?”
“윽.”
모용강이 굳은 자세로 돌아서니, 남궁천이 석양을 등진 채로 씨익 웃으며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너…… 네가 왜 여기에……?”
“어허, 단주님에게 너라니. 하극상은 무거운 죄야.”
“시비 걸려고 온 거냐?”
모용강이 차갑게 대꾸하자, 남궁천이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농이다, 농이야. 요즘 형님은 좀 어떠냐?”
“아…….”
모용강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깊은 중상을 당한 후 모용신은 곧바로 본 가로 돌아가 버렸다. 때문에 그 후로 형님을 직접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님은 날 원망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네 부탁으로 네 형님을 살려줬으니, 너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다.”
모용강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역시 이 새끼는…… 부탁도 재수 없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