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오소리 굴에 연기를 피워라
자박자박…….
장로원의 후원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한 명은 백의 장삼을 걸친 노인이었는데, 백염이 성성하여 가슴께까지 늘어져 있었고, 눈썹도 하얗게 세어 두 눈을 거의 덮을 지경이었다.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가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는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그 곁을 나란히 걷는 사람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강직한 인상이었는데, 눈빛만큼은 깊이가 있어서 그 속을 알기 어려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은 바로 장로원주 우위광과 맹주 남궁검이었다.
두 사람은 장로원 후원을 말없이 걸었다.
후원은 꽤 넓었다.
애초에 무림맹이 지어질 당시에 초대 장로들이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후원만큼은 제대로 꾸며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맹 내에서도 가장 넓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연못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멈춰 섰다.
먼저 걸음을 멈춘 우위광이 난간 너머로 조각 얼음이 떠 있는 연못을 물끄러미 보았다.
“날씨가 꽤 풀렸구려.”
우위광이 백염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많이 녹았군요.”
이번엔 우위광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후원의 풍광만 바라보았다.
더러 눈이 녹지 않아서 얼룩진 곳이 있고, 연못도 때 묻은 듯한 얼음덩어리가 군데군데 떠 있었지만, 여전히 후원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맹주께서 조금 더 일찍 본 원을 방문하셨더라면 더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을 거요. 이곳에서 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답거든. 특히 눈 덮인 후원을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소.”
“그럴 것 같습니다.”
남궁검이 말을 받자, 우위광이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시선을 연못 끝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무심한 듯 말을 툭 던졌다.
“하나 사실 나는 눈이 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소.”
“……?”
남궁검이 이유를 묻는 듯 돌아보자, 우위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일순간 조용해지지.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온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의 착각에 지나지 않소. 보시오. 이렇게 눈 덮였던 연못은 군데군데 얼음덩어리가 어지러이 떠다니고, 발길에 차인 눈 뭉치는 눅눅하게 젖어서 질척이지 않소? 결국 눈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데 일조하고 있소.”
언중유골이었다.
물론 남궁검은 우위광의 속내를 진즉 알아채고 있었다.
여기서 눈은 곧 남궁세가를 뜻하는 것이리라.
남궁세가의 활약으로 세상이 일순간 조용해지고, 모든 것이 정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맹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중이라는 말이리라.
남궁검이 한쪽 입매를 가만히 말아 올리고는 답했다.
“모든 과정에는 고비가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눈이 녹을 때는 지저분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묵은 때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 순간의 어지러움을 참지 못해서 눈을 싫어하신다니, 어쩐지 원주님답지 않은 말씀입니다.”
이번엔 남궁검이 말속에 가시를 넣었다.
우위광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남궁검을 흘깃거리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늙으니까 괜히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 그런가 보오. 맹주의 말씀이 옳소.”
“옳고 그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원주님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묵은 때를 벗길 때 지저분하지 않게 할 방법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한 수 배운 기분입니다.”
“허허, 역시 남궁검 맹주께선 소문대로 훌륭한 분인 것 같소.”
“과찬이십니다.”
“해서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오?”
갑자기 본론으로 훅 들어오자 남궁검이 눈살을 슬쩍 여몄다.
‘확실히 이야기의 흐름이 예측불허군.’
하지만 남궁검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용상회를 열어달라고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아…… 그 내용은 이미 전달받았소. 다만…….”
“…….”
“당장 용상회를 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터라.”
“이미 들으셔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구 조직을 폐쇄하고 신규조직을 편성하고자 합니다.”
“흐음. 맹주.”
“말씀하시지요.”
“다소 서두른다는 기분이 드는구려. 이미 본 맹은 전임 맹주의 비리로 굉장히 어수선한 상태요. 그러니 우선은 맹 내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소?”
“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흐음.”
우위광이 미간을 슬쩍 구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용상회를 개최할 수 없소. 우선 맹의 안정을 도모해 주시길 바라오. 그것이 본 원의 뜻이오.”
“기준이 모호하군요.”
“맹주.”
“말씀하시지요.”
우위광이 남궁검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정치는 칼자루로 하는 것이 아니오. 인덕으로 품어야 하는 것이오. 호법당주를 만인 앞에서 망신을 준 건 분명 경솔하셨소.”
“그 어떤 자리라도 권력이 신변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참에 확실히 알았을 겁니다.”
“그건 맹주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우위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남궁검을 노려보았다.
남궁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임 맹주의 머리가 정문에 효시된 것이지요.”
“맹주. 본 원은 훌륭한 지도자를 원하지, 칼춤이나 출 망나니를 원하는 게 아니오.”
“…….”
“…….”
남궁검과 우위광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역시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군.’
‘남궁가를 위해 장단을 굴릴 줄 아는가? 어림없지!’
결국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언제 다시 오시든 내 뜻은 그대로요.”
“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존체 보존하시길.”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일종의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우위광도 그 속내를 알았기에 냉랭한 웃음으로 답했다.
“맹주께서도.”
* * *
신룡객잔 방 안에서 당우기가 연신 서성였다.
바로 옆 침상에는 당예설이 누워 있었고, 그 곁에 앉은 천독노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진맥을 하는 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당우기가 결국 천독노에게 다가가 물었다.
“좀 어떻소? 누님은 괜찮소?”
“아, 글쎄! 좀 조용히 좀 하라니까! 거, 집중 좀 하려고만 하면 와서 묻네.”
“허어! 도대체 얼마나 오래 진맥을 해야 한단 말이오?”
“아니, 흑성칠주야독을 제 누이에게 쓴 녀석이 뭔 말이 이렇게 많아?”
“크익! 그, 그건……!”
“독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게 흑성칠주야독이야. 그러니 확실히 알아보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좀 기다려!”
“하지만 누님이 괜찮다고 하지 않소? 당사자가 독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데, 굳이 이렇게 오랫동안 진맥을 할 필요가 있소? 혹시 돌팔이…….”
“뭐야? 에라이, 나 안 해! 흑성칠주야독을 치료해 주고 돌팔이 소리나 듣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구먼!”
“어어, 커흠. 내가 말실수했소. 미안하오. 노여움을 푸시오.”
당우기가 거듭 사과하자 천독노가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창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천독노가 다시 당예설의 손목을 잡으면서 말했다.
“내 안에 들어온 기운을 스스로 느끼는 게 쉬운 게 아닐세. 당가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알 것이 아닌가? 의원이 제 몸에 난 병도 잘 눈치채지 못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야.”
“알겠소. 이제 정말 방해하지 않고 기다리겠소.”
“같은 말을 벌써 세 번은 한 것 같은데?”
“이젠 정말이오.”
“커흠! 그럼 저리 썩 꺼져 있게.”
천독노의 말에 당우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까지 물러났다.
그제야 천독노가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당예설을 진맥했다.
세상이 조용하다.
천독노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당예설의 혈맥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코끝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천독노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손목을 놓았다.
앞서 들은 잔소리들이 있었기에 당우기는 얼른 다가오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천독노가 가만히 일어났다.
남궁천과 당예설, 당우기가 모두 천독노의 입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천독노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말했다.
“마침내 독기가 말끔하게 제거된 것 같네. 이젠 안심해도 될 걸세.”
“그, 그게 정말이오?”
당우기의 말에 천독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다음에는 절대로 그런 멍청한 짓일랑 하지 말도록.”
“물, 물론이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당우기가 와락 달려들어 천독노를 끌어안자, 천독노가 버럭 소리쳤다.
“에헤이, 이거 징그럽게 왜 이래?”
“고마워서 그랬소! 하하! 정말 고맙소! 누님! 이제 괜찮답니다!”
“그래, 다행이다.”
당예설도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 두 사람이 대화 나누는 것을 보고는 남궁천이 천독노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
“내 수고를 알긴 아는 것이냐?”
“그래도 만능해독제를 제대로 검증해 볼 수 있었으니 영감에게도 좋은 기회였잖아?”
남궁천의 말에 천독노가 콧방귀를 꼈다.
“흥! 감사할 줄 모르는 건 제 아비랑 똑같구나.”
“영감이 나한테 감사해야지. 만능해독제를 공짜로 검증할 기회를 제공했으니까.”
“허! 뻔뻔하기는 제 아비를 능가하는군!”
“원래 사람은 발전하는 거니까.”
“그게…… 발전인 거냐?”
천독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난 이제 떠날 테니 다시는 날 찾지 마라. 서로 주고받은 게 끝났으니 각자 길을 가자고.”
“싫은데.”
“뭐라?”
“무림공적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데, 적랑단주로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라고?”
“뭐, 뭣이?”
파바밧!
순간 천독노가 튕기듯이 물러나더니 양손을 활짝 펼쳤다.
일순간 천독노의 양손이 독기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 악랄한 새끼! 결국 날 이런 식으로 이용할 셈이었구나! 내 어디 호락호락하게 끌려갈 성싶으냐!”
“흐음.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 가지 영감한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할까 하는데.”
“닥쳐라! 네놈 말은 이제 콩으로 두부를 만든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에이, 그러잖아도 각박한 세상에 너무 그러지 말자고.”
“흥! 각박한 세상에 일조하는 게 네놈 아니었더냐!”
“내가 영감을 잡아가겠다는 건 농담이었어. 만약 그랬을 거면 진작 여기에 적랑단원들이 들이닥쳤겠지.”
“흐음.”
천독노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생각했다.
남궁천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러는 동안 남궁천이 말을 마저 이었다.
“영감에게 정말 좋은 제안을 하려고 해. 들어나 보지 그래?”
“어디 지껄여 보아라. 헛소리를 하는 거라면, 가만있지 않을 터.”
남궁천이 씨익 웃으면서 놀라운 말을 꺼냈다.
“무림공적 명부에서 영감을 지워줄게.”
“……!”
“어때?”
천독노가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뜨고는 한참이나 끔뻑였다.
어떻긴 뭐가 어떤가?
무림공적 명부에서 지워준다는데.
평생 두 다리 펴고 잠도 못 자게 만든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데!
정말이지 말만 들어도 달콤한 소리다.
“그걸 정말 네가 할 수 있다고?”
“이래 봬도 우리 할아버지가 맹주야. 신년에 항상 특사를 발표하지. 그때 무림공적 명단에서 제명하는 것도 이루어지고. 거기에 영감을 포함하려고.”
“허어.”
순간 천독노가 넋을 놓았다.
평생 도망자로 사는 심정을 일반인들은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큰 족쇄가 되는지.
잠을 자다가도 조금만 큰 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한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왜……?”
“그야 뭐 영감이 내 지인을 구해줬잖아. 고마워서 그렇지.”
남궁천의 말에 천독노가 눈을 끔뻑였다.
이 새끼, 알고 보니 꽤 좋은 놈이었던 것인가?
하긴.
따지고 보면 진천랑도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제법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던가?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영감은 사람을 죽이는 독인이 아니라, 살리는 독인이잖아. 그런 사람이 계속 무림공적으로 내몰리는 건 옳지 않다고 봐. 그래서 이번에 신년 특사로 영감도 무림공적에서 제명할 생각이야.”
“너…… 너…… 생각보다 싸가지가 있는 새끼였구나.”
“대신 조건이 하나 있긴 해.”
남궁천이 씨익 웃자, 천독노의 표정이 바삭하게 말랐다.
‘그럼 그렇지, 이 약아빠진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