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오소리 굴에 연기를 피워라
“한심한…….”
늙수레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음성이 공간을 벨 것처럼 흘러나왔다.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의자에 앉은 채로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그는 방 한 가운데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안천길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해서 이마가 그 모양인가?”
“면목없습니다, 원주님.”
바짝 엎드려서 고개를 숙인 안천길은 여전히 분을 이기지 못하는지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아댔다. 꽉 쥔 두 주먹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엄한 곳에서 뺨을 맞고 와서는 여기서 분을 주체 못 하는 건 못난 짓일세.”
“죄송합니다.”
안천길은 다시 한번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그러잖아도 피가 멎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던 터라 바닥이 다시 피에 젖었다.
“그만하게. 그러다 자네 이마가 남아나질 않겠군. 바닥도 더러워지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애초에 죄송할 짓은 하질 말았어야지. 한심하긴.”
“…….”
“그깟 다 쓰러져 가는 남궁가를 어쩌지 못해 본 원까지 쪼르르 달려와서 고자질을 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군.”
“예전의 남궁가가 아닙…….”
“갈.”
“……!”
“예전의 남궁가가 아니다? 자네가 예전의 남궁가를 알기나 아는가? 설마하니 불과 몇 년 전을 ‘예전’이라 표현하는 건 아닐 테지? 예전의 남궁세가는 그야말로 제왕의 가문이었네. 본 맹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아무렴 남궁가가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고 한들 그 당시의 위상을 되찾았겠나? 그것도 불과 몇 개월 만에?”
“그건 아닙니다만 확실히 만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니 한심하다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묵천악은 뭘 했는지 모르겠군.”
“…….”
“하긴. 그 양반도 기력이 쇠할 때가 되긴 했지. 오래 해먹었으니. 그렇더라도 고작 약관을 채운 애송이 하나 어쩌질 못해서 목숨까지 잃다니. 한심한…….”
“원주님. 현재 남궁세가를…….”
“그 입 닥치게.”
“……!”
“다 쓰러져 가는 가문 하나 어쩌질 못해서 쪼르르 달려와 질질 짜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 않아.”
“…….”
“그리고 남궁세가는 얼어 죽을. 이젠 개나 소나 ‘세가’라고 부르는군.”
장로원주 우위광은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성성한 수염을 쓸면서 눈가에 주름을 가득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까?
“맹을 개편하겠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허. 감히…….”
나직이 말을 읊조린 우위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선에서 진행할 것으로 보이던가?”
“정확하진 않으나 한두 개의 조직을 새로 만들고, 기존 조직은 수장을 교체하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위광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와 각주를 교체할 수는 있겠지. 물론 그것도 조심스러운 일이겠지만, 앞서 묵천악이 워낙 개판을 치고 사라졌으니까. 하나 갑자기 조직에 칼을 대면 출혈이 심한 법. 거기에다가 조직을 새로 만든다? 고얀지고. 맹주가 되더니 이젠 하늘이라도 되려고 하는구나.”
“이미 남궁검 가주는 하늘이라도 된 줄 아는 듯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 맹주라는 자리가 그리 만만하지 않건만.”
“조직의 수장을 갈아치우는 것이야 그렇다 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장로원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우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맹의 철칙 중 하나다.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조직을 없앨 때에는 반드시 장로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장로원이지만 이때만큼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이는 맹주가 권한을 남용해서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시 남궁검은 용상회(龍上會)를 요청할 것입니다.”
용상회란 맹주가 장로들을 불러서 회의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장로들은 이 회의를 불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불허하면 그만일세. 만약 용상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신생 조직을 만드는 일은 반대하면 될 테고.”
“하나 장로님들 중 남궁검을 지지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 일은 내게 맡기게. 어차피 장로원의 과반수를 내가 주름잡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게.”
“말씀 듣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몸을 사려야 할 것이네. 매사에 주의를 하란 말일세. 남궁검과 남궁천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한마디로 그들이 실권을 잡은 후로 나아진 것도 변한 것도 없어야 한단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어떠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전임 맹주의 실책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할 것이야. 그러니 혹여나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태워 버리게. 증언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씀 이해했습니다. 다만 천우당이 조금 걱정이긴 하군요. 모든 거래 장부를 남길 수밖에 없으니.”
“천우당주야 알아서 잘하겠지. 그쪽으로는 머리가 밝은 자니까.”
“예, 우선은 제 몸만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다른 수를 준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원주님만 믿겠습니다.”
우위광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탐탁잖은 시선으로 안천길을 노려보았다.
“다음에는 이런 일로 날 찾지 말게. 보는 시선도 많아질 걸세. 저들에게 어떠한 빌미도 넘겨주지 말란 것이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보게.”
안천길이 그제야 어느 정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로원주가 나서준다면 그래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되리라.
괜히 이마가 또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오늘의 그 치욕만큼은 내 절대로 잊지 않으마!’
안천길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 * *
다음 날 아침, 무한 사람들은 무림맹 정문에 효시된 묵천악의 수급을 보고는 저마다 혀를 찼다.
동시에 일사천리로 무림공적을 처리한 적랑단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궁세가의 명성도 덩달아 올라갔다.
연이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적랑단원들에게는 특별 수당이 더해지고, 모처럼 멸마당주가 연회까지 베풀었다.
때문에 그날 저녁 멸마당에 모인 적랑단원들은 저마다 술을 한 잔씩 걸치고는 왁자하게 떠들며 연회를 즐겼다.
특히 팽수혁은 한껏 취해서 기분 좋게 떠들어댔다.
“으하하하! 사실 우리 단주는 내가 절반 키운 셈이지! 암! 단주가 용천관 호구 시절에도 나는 단주를 괴롭힌 적이 없어! 정말이라니까. 응? 윤종승? 그 녀석은 똑같은 호구였다니까. 뭐, 인마? 내가 그놈에게 왜 져? 그건 봐준 거라고! 정 못 믿겠으면 윤종승을 데려와 봐! 엉? 다들 없다고? 어디 간 건데? 몰라? 그럼 다른 대주들은? 뭐? 다 없어? 나만 빼고?”
그제야 팽수혁이 딸꾹질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원들은 모두 왁자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대주들만 다들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단주인 남궁천도 보이지 않았다.
팽수혁이 이맛살을 푹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다들 어디 간 거야?”
* * *
신룡객잔이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
“어? 팽 대주는 안 왔습니까?”
유현의 물음에 윤종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마. 술을 너무 마셔서 지금 혀도 제대로 안 돌아가.”
“하하. 모처럼 한잔 걸치고 기분 좋게 취하신 모양이군요.”
“아주 작정한 것 같더라니까. 괜히 끌고 왔다간 사고 칠까 봐 그냥 내버려 뒀어.”
그러자 옆에 있던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차라리 잘했어. 어차피 네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으니.”
“그나저나 이야기는 잘되고 있나요?”
윤종승의 물음에 손우곤이 턱짓으로 맞은편 객잔을 가리켰다.
“이제 막 만났으니 더 두고 봐야겠지. 우리는 그냥 여기서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으니 기다려 보자고.”
“그나저나 남궁천은 참 대단하네요.”
“단주님이시다.”
“아, 예. 죄송합니다. 단주님은 정말 대단하네요.”
윤종승이 호칭을 정정하며 말하자, 손우곤이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
“전부 다요. 지금도 보세요. 언제 또 흑무련과 저런 거래를 했답니까? 맹주 죽여서 원수 갚은 것만도 기쁠 일인데, 흑무련이 수고했다고 돈까지 준다니. 허참.”
“흐흐흐. 그게 바로 남궁세가 소가주님이시다.”
“예, 정말 대단합니다.”
윤종승이 이번만큼은 토도 달지 않고 인정했다.
* * *
같은 시각 몇몇 대주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신룡객잔 방 안에서는 남궁천이 류난과 지강, 그리고 여신우를 맞이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류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기한을 딱 맞춰서 끝낼 줄이야. 누가 보면 일부러 노린 줄 알겠어.”
“일부러 노린 것 맞아.”
“호오?”
“최대한 남은 기간 동안 아버지가 겪은 고통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죽이는 게 아까웠을 뿐.”
“과연. 그런 이유가 있었군.”
류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이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차피 주기로 했으니 빙글빙글 돌려 말할 것 없고. 가져온 돈을 내놓도록.”
“하하. 성미가 급하군. 자네가 받을 돈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
“알아. 이천오백만 냥이지.”
“잘 아는군. 굉장히 큰돈이지.”
“그래, 그렇게 굉장히 큰돈을 당신들이 주겠다고 했지. 이젠 약속을 지킬 차례고.”
“흐음. 먼저 천만 냥을 주도록 하겠네.”
“먼저?”
“자네도 알다시피 그런 거금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네. 본 련의 운용자금 오 할이 넘는 금액일세.”
“그러게 애초에 무리한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되나?”
“애초에 잔금은 천만 냥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중간에 불쑥 찾아와서 계약서를 변경하고 방해까지 한 게 누구시더라?”
류난이 팔짱을 끼면서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서 준다는 걸세. 다만 시간이 걸리니까…….”
“그런 내용은 계약서에 없을 텐데? 모든 건 일시불이지.”
“…….”
실내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음장을 걷는 것처럼 변했다.
남궁천의 요구가 타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흑무련도 자본금이 많은 조직이 아니었기에 당장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인 것도 사실.
이쯤 되자 여신우가 발끈해서 나섰다.
“어이, 애송아. 우리가 입 닦고 안 주면 어쩔 거냐?”
“무한에서 무사히 나가지 못할걸?”
“뭐?”
“밖에 우리 애들이 대기 중이거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가에 앉아 있던 지강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훅 불어오는 것과 동시에, 맞은편 전각 지붕 위에서 네 명의 대주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여신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무한을 불바다로 만드는 수가 있어.”
“불바다를 만들기 전에 죽을 수도 있어.”
“뭐? 이 새끼가……!”
여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쒜에에엑!
짤막한 화살 한 대가 창밖에서 날아오더니 류난의 뺨을 스치면서 저만치 벽에 꽂히는 게 아닌가?
여신우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고는 흠칫거렸다.
‘편전(片箭)……!’
보통의 화살보다 짧고 가느다란 화살대다. 여느 화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파괴력 또한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벽을 뚫지 않은 것은 기공으로 조절했다는 뜻.
‘패력궁인가……!’
남궁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다음에는 스치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텐데.”
“그래서 자네가 바라는 게 뭔가? 당장 없는 천오백만 냥을 받자고 떼쓰는 건 아닌 것 같고.”
류난의 차분한 말에 남궁천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크으, 역시 흑무련주야. 눈치가 빠르다니까.”
“…….”
“처음 계약한 대로 잔금은 천만 냥만 받도록 하지.”
“호오?”
류난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자,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천오백만 냥을 아끼는 조건으로 볼 때 그쪽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