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오소리 굴에 연기를 피워라
남궁천은 남궁검과 함께 행랑을 따라 걸으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남궁검이 얕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웃고 싶으면 차라리 웃어라.”
“아닙…… 푸흡! 아닙니다! 크흐흡!”
“그 짓이 더 실례가 되느니라.”
“하지만…… 흡! 참을 수 있습니…… 푸흡! 푸하하하!”
“끄음.”
결국 남궁천이 배를 쥐고 웃기 시작하자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게 그리 웃기더냐?”
“그럼요! 낄낄낄. 어떻게 그런 말을 그토록 근엄한 표정으로…… 푸하하! 에고, 배야.”
“웃음이 헤프구나.”
“에이, 그건 아니죠. 푸흐흐흐. 할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웃었을걸요? 제가 이모님이나 숙조부님께 말씀을 드려볼까요? 푸흐흐흐!”
“됐다. 별걸 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별게 아니라니까요? 푸흐흐흡!”
애써 웃음을 참은 남궁천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칼날 같은 남궁검의 표정을 닮도록. 그러더니 목소리를 쫙 깔고 남궁검의 흉내를 냈다.
“대가리 박으시게. 쿠후후후훕!”
“그만해라.”
“아아, 이건 정말 다른 사람들도 봤어야 하는 건데. 저 혼자 보고 듣기엔 너무나 아까운…… 푸흐흐흐!”
“사내 녀석이 말이 가벼우면 못 쓴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걸요! 으하하하!”
“커흠! 흠!”
“대가리 박으시게.”
“그쯤 하거라.”
“대가리 박으시게. 크으으!”
“끄음.”
남궁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말이지 그 순간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엇하겠나?
그래도…….
“속은 후련하더구나.”
“헤헤. 역시 그렇죠?”
남궁천이 상큼하게 웃으며 묻는다.
남궁검이 그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적을 대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 같다가, 이럴 때 보면 천진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한데 그 천진함이 여느 또래들과는 좀 다르다.
단지 단순하고 생각이 없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생각을 단순하게 보이도록 정리를 잘한다는 느낌이다.
남궁천은 이제 약관을 지났다.
강호 경험이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이토록 때와 장소를 가려서 적절한 가면을 쓴다.
그렇다.
이건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쓴다고 해야겠다.
지금의 남궁천은 천진한 손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쁜 뜻은 아니다.
좋게 말한다면 처세술이 좋은 것이다.
‘너는 그간 어떤 강호를 견뎌 온 것이더냐?’
남궁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진하게 웃는 모습.
하나 때때로 저 속에서 비정할 정도로 냉혹함이 묻어나올 때가 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단순하게 행동해야만 살아남는 인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마치 네 아비 진천랑처럼 고단한 삶이었던 게냐?’
알 수가 없다.
참으로 우습다.
한낱 스무 해를 산 청년에게서 이토록 유구한 삶을 느끼게 될 줄이야.
남궁천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할아버지가 속 시원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흐흐흐.”
“그래, 한 번쯤 해보고 싶더구나.”
“제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더 의심스럽구나.”
“헤헤. 그럼 조금만 말할게요?”
남궁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남문각주까지 데려갔다지?”
“예, 할아버지.”
“맹주를 잡는 데 패력궁의 도움까지 필요했던 것이냐?”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패력궁은 맹주를 잡기 위한 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면……?”
“마교 놈들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교라?”
남궁검이 심상찮음을 느끼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이제야 웃음기를 거두고는 말했다.
“맹주가 달아나면 분명히 마교와 접선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간 서로 먹이를 나눠 먹는 사이였으니까요. 물론 마교는 맹주를 달갑게 여기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연결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거든요.”
“해서 마교 놈들과 조우했느냐?”
“예, 할아버지.”
남궁검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손자는 상상 이상을 보여주는 재능이 있다.
맹주만 잡아와도 업고 다닐 판인데, 거기에 더해 마교 놈들까지 찾아내다니.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아쉽게도 정말 잡고 싶은 물고기는 놓쳤습니다. 그래도 잡은 물고기가 피라미는 아닌 것 같아요.”
“하면…… 마인을 잡은 것이더냐?”
남궁검이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묻자, 남궁천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아버지.”
“한데 어째서 모두가 있을 때 말하지 않았느냐?”
“으음. 어차피 맹주를 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서요. 누가 가로챌 수 있는 공도 아니니 좀 더 중요한 순간에 꺼내 들 패로 아껴둔 겁니다.”
“허허.”
남궁검이 실소를 흘렸다.
나이가 어릴수록 자신이 세운 공을 까발리지 못해 안달인 법이다.
더구나 지금 상황에서 마인을 사로잡았다고 공표하면 그 명성이 드높아지고 맹 내의 입지를 더욱 굳힐 수 있었으리라.
한데 남궁천은 자신이 세운 공로조차 중요한 순간에 이용할 패로 남겨두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치밀한 삶을 살아오면 이렇게까지 안배를 한단 말인가?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이냐?”
“무림맹을 개편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야겠지. 지금으로서는 적아를 구분하기도 힘드니까.”
“저도 그 일에 앞장설까 합니다.”
“그래, 집안이 조용해야 밖도 다스리는 법일 테니. 우선은 맹을 정리하는 것부터 힘을 쏟아야겠다. 하면 마교는…….”
“제가 놓친 물고기가 누군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곧 밝혀질 겁니다. 아마 신분이 상당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렇겠군. 무림칠성인 패력궁을 동원하고도 놓칠 정도라면…….”
“한데…… 자력으로 달아난 것은 아닙니다.”
순간 남궁검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마인들이 네 계획을 알고 협공을 했단 것이냐?”
“아뇨. 마인도 아니었습니다.”
“하면?”
“저도 아직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다만…… 저보다 강해 보였습니다.”
“……!”
남궁검이 미간을 좁히고는 생각에 잠겼다.
남궁천보다도 강하다니.
자신도 이젠 남궁천을 이길 수 없다.
그만큼 손자는 상당한 수준으로 무공이 발전했다.
그럼에도 남궁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상대는 무림칠성에 준하는 수준이리라.
아니면 무림칠성 중 한 명인가?
남궁천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정체불명인의 개입으로 대어는 놓쳤지만, 꽤나 부상을 입어서 회복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뜨거운 불에 데이면 조심하는 법이니까요.”
“당분간 마교는 잠잠할 것이다?”
“예, 제대로 물려봤으니 쉽게 근처에서 기웃거리진 못할 겁니다.”
“그러는 사이 맹을 좀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군.”
“그렇습니다. 물론 어떠한 조직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눈에 거슬리는 건 없어야겠죠.”
“옳은 말이다. 하면 네 생각에 맹을 개편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 것 같으냐?”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남궁천이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남궁검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이미 숙조부님께 장로원 명단을 받으신 걸로 압니다만.”
“허어. 표야가 입이 가볍군.”
“헤헤. 제가 은근히 맹 내에 눈과 귀가 많습니다.”
“해서 너 역시 장로원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느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아버지. 장로원은 평소 맹의 실정에 개입하지 않지만, 그들이 한 번 나서면 꽤나 바람이 분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묵천악도 장로원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더군요.”
“확실히 맹에 눈과 귀가 많은 것 같구나.”
“그렇다니까요.”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사실 이러한 정보는 모두 불명회를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남궁천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장로원은 묵천악 체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죠. 원래 맹주의 권위를 견제하고, 맹이 바른 길로 가도록 보조하는 곳이 장로원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방치한 셈이죠.”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장로원주를 비롯해 장로원에서 입김 좀 있는 자들이…….”
“묵천악에게 매수되었을 거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도 그 정도까지는 생각했다.
장로원이야말로 가장 높은 산이 될 테니까.
그들이 지금껏 맹의 실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곧 전임 맹주였던 묵천악이 손을 써두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데 남궁천을 통해서 그 얘기를 들으니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이 아이가 내게 확신을 주는 존재가 되었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맹주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은 맹주실로 들어가서 창가에 앉아 차를 마셨다.
남궁천이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물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딱히 없다.”
“침구류만 교체하셨네요. 탁자, 의자, 수납장…… 잡기는 전부 그대로고요.”
“동선에 맞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손대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싹 수리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맹주 놈이 쓰던 방을 그대로 쓰시기에는…….”
“상관없다.”
남궁검의 말에 남궁천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궁검이 냉랭한 시선으로 주변 사물을 한차례 훑더니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이곳은 원수가 쓰던 방이지. 하나 그 원수는 네게 목이 잘리지 않았더냐? 무림맹 정문에 효시할 것이다. 그걸로 된 거다.”
“하지만 그놈이 쓰던 물건들을 보면…….”
“물건은 죄가 없지 않느냐? 네 부모를 죽인 놈은 이미 세상에 없다. 하나 그놈이 쓰던 물건까지 감정을 쏟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놈이 사용하던 의자, 놈이 머물던 방, 놈이 일하던 전각, 놈이 생활하던 무림맹, 놈이 거닐었던 무한, 놈이 몸담은 백도무림, 심지어 이 땅 어디든 같은 하늘 아래겠지. 그렇게 감정을 모든 것에 쏟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나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경계를 분명히 해두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다.”
“……그렇군요.”
남궁천은 순간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자신은 물론 아내와 아들마저 죽음으로 내몬 원수의 방에서 태연히 잠들 수 있었을까?
탁자를 부수고, 의자를 집어 던지고, 수납장을 박살 내진 않았을까?
하나 그건 결국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행위였을 뿐이리라.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기억과 고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걸 지우는 건 이제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리라.
새삼 남궁검이 대단해 보인다.
세월을 그저 허투루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영감, 가끔씩 영혼의 울림을 준단 말이지.’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 장로원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마침 네게 좋은 패가 있다고 하니 회의를 열 생각이다. 물론 장로원이 수락을 해줘야만 열리겠지만.”
장로 소집은 맹주의 권한 밖이라고 볼 수 있었다.
소집회를 열 수는 있지만, 참여 결정은 오로지 장로회에서 결정한다.
때문에 장로회가 소환에 불응한다면 방법이 없다.
“뭐,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되겠죠. 그게 우리 방식이잖아요.”
“네 방식이겠지.”
“헤헤. 그런가요?”
남궁천이 다시 천진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밉지 않은 모습에 남궁검도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 * *
어두컴컴한 방 안.
촛불 하나만이 힘겹게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 가운데에서는 이마가 깨진 호법당주 안천길이 납작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안천길이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원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