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80화 (379/508)

380. 뛰는 놈 위에 나는 놈들

댕……! 댕……! 대앵……!

그야말로 절묘한 순간이었기에 사람들은 마치 그 종소리가 운명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운명은 남궁천이나 남궁검을 향한 것이 아닌, 호법당주 안천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천우당주 유백랑이 저도 모르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 호법당주님……!”

그만큼 호법당주의 운명이 가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호법당주에게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단지 남궁천을 맹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남궁검까지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지 않았나?

촌각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게 정리될 터였다.

그 후에는 다시 맹주를 불러 앉힐 수도 있고, 자신들 중 누군가 맹주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맹주를 다시 소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무림공적 일 호로 낙인찍혔는데 어찌 소환하냐고?

그야 맹 내 권력자들이 이미 맹주를 추종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다.

절대 잊지 않겠다며 소리치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

지금이야 그간 맹주의 비리를 듣고 엄청난 충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만, 일이 년만 지난다면?

하나둘 맹주를 찬양하는 자들이 생기게 될 터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전 맹주님이 방식이 좀 그랬어도 평화로웠잖아.”

“어찌 보면 맹주님이 희생을 하신 셈이지.”

맹의 요직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고 나면 슬슬 맹주의 복권을 시도해도 된다.

몇몇 개돼지들은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랄을 하겠지만, 대세가 이미 기울어 있을 테니 문제는 없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저놈이 지금 나타난 거야!’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남궁천이 등장한 직후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것을.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다.

남궁천이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에이, 뭐야? 다들 모여서 나 빼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환영도 안 해주시고. 이거 서운한데요?”

“어어…… 남궁천 단주. 어서 오시오.”

각주 중 한 명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인사를 건넸다.

남궁천이 풋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뭡니까? 정말로 제가 불청객이라도 된 거예요? 이러면 진짜 서운한데.”

이쯤 되자 천우당주 유백랑이 나서서 궁금한 걸 물었다.

“적랑단주. 어서 오시게. 그러잖아도 많은 이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한데 어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혀 연통이 없었나? 하다못해 시종이 먼저 자네가 도착했음을 알리지도 않았으니 어찌 된 일인가?”

“에이, 보시다시피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다들 조용히 하라고 했죠. 그렇게 살금살금 다가와서 짠! 하고 나타나려고 했습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야말로 천진한 대답이 아닌가?

이렇게 보니 또 이제 약관을 겨우 채운 청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앞을 내다보는 느낌이었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제갈승이 점잖은 목소리로 나섰다.

“하나 다음에는 절차를 거쳐서 오도록 하게. 물론 자네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되지만, 자칫 이런 행동은 적으로 오인받을 수 있으니.”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음에는 주의하겠습니다!”

남궁천이 호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남궁천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은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겉으로는 철없는 견습생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속내는 이 기회에 대적자들을 가려낼 심산이기도 했다.

자신이 자정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으면 필시 친맹주 성향을 가졌던 이들이 설쳐댈 것이 뻔했으니까.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만…….

‘호법당주는 너무 뻔해서 다른 이들이 설쳐주길 바랐는데…….’

뭐, 어쨌거나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으니 나쁘진 않다.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안마당 복판에 멈춰 서서 남궁검을 향해 포권했다.

“맹주님, 적랑단주 남궁천, 맹에 복귀하였습니다!”

“수고했다. 자리에 앉아서 술 한잔 들게.”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고 걸음을 돌리려고 하자, 안천길이 다급히 손을 뻗으며 외쳤다.

“잠, 잠깐!”

“응? 뭡니까? 그러고 보니 왜 아직 대가리를 안 박고…….”

“맹, 맹주님…… 아니, 무림공적 일 호는 어찌 되었는가? 자네가 빈손으로 돌아오면 안 되잖나!”

안천길은 내심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이 내기에서 이겼다고 여전히 확신했다.

남궁천은 분명히 빈손이 아닌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대 맹주는 어설픈 천라지망을 펼치고서 잡아낼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자칫하면 남궁천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 속내를 읽은 것인지 천우당주 유백랑도 얼른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혼자 돌아와서 모든 게 해결된 게 아니잖나? 중요한 건 자네가 무림공적 일 호를 사로잡았느냐는 것일세.”

“아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본 단은 맹주를 생포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안천길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는 얼른 얼버무렸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역시 자네는 성급했다는 말일세! 자넨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오늘 자정까지 맹주를 사로잡겠다고! 이젠 어쩔 텐가? 단주의 자리를 걸었으니 당연히 물러날 생각을 하겠지. 하나 단순히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다 해결될 일이 아닐세! 뭐? 대가리를 박아? 대가리를 박아야 할 건 자네가 아니냔 말일세! 그리고 저 철없는 단주를 맹목적으로 믿기만 했던 남궁검 가주께서도 머리 숙여 사죄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남궁천이 술병을 들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와아. 말 엄청 길다. 다 말했어요?”

“뭐라?”

“그런데 어쩌죠?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요?”

“뭣이? 자네는 분명 오늘까지 맹주를 생포해서…….”

“아니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묵천악의 모가지를 따오겠다고 했죠.”

“흥! 그럼 자네가 정말 전대 맹주의 수급을 가지고 왔단 말인가?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예. 가져왔습니다만.”

“그래, 가져왔…… 응? 뭐라고? 뭘 가져와?”

“가져왔다고요. 묵천악 모가지. 아니, 대가리.”

“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대체 그 머리는 어디에 있단 말이냐! 만약 거짓부렁을 하는 것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일세!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거, 사람 말을 참 못 믿으시네. 부단주, 가져와.”

남궁천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합정관 정문이 벌컥 열리더니 당우기가 목재 상자를 들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당우기에게 쏠렸다.

남궁천이 턱짓으로 안천길을 가리켰다.

“그거 보고 싶으시대. 드려.”

당우기가 안천길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손에 든 목함을 휙 던졌다.

안천길이 목함을 받는 대신 성큼 물러났다. 그 바람에 목함이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콰창!

툭, 데굴데굴……!

“으허억!”

깜짝 놀란 안천길이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맹, 맹주님이……!’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잘려 나간 머리는 정말 묵천악이 아닌가?

반평생 그를 따르면서 충성을 다했던 안천길로서는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극도의 공포심에 몸이 굳어가는 듯했다.

지켜만 보던 제갈승도 미간을 좁혔고, 다른 이들도 술렁거리면서 맹주의 머리를 확인했다.

남궁천이 술병을 들이켜고는 삶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됐죠? 이제 그 옆에 나란히 대가리 박으시면 되겠네요.”

“남궁천……!”

안천길이 복잡해진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는 분노와 공포, 절망과 수치심이 마구 어우러져 있었다.

남궁천이 고기를 우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다가왔다.

남궁천이 발끝까지 다다르자 시커먼 그림자가 안천길을 덮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컸던가?’

달빛을 등진 남궁천의 몸이 태산처럼 높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안천길이 남궁천을 올려다보며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남궁천이 눈을 내려 깐 채로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뭐 하십니까? 대가리 안 박으시고.”

“내, 내게 그걸 정말로 하라는 것이냐?”

“그럼? 호법당주는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까? 그런 하찮은 게 호법당주입니까?”

여전히 목소리는 무겁고 낮게 깔려 있었다.

안천길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분노인 줄 알았는데, 지금 남궁천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드는 생각은 공포에 가까운 듯하다.

‘뭐 이런 새끼가……!’

울분이 치솟지만 공포심이 더 크다.

새삼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이 맹주를 처절하게 짓밟은 자라는 게 느껴진다.

저절로 시선이 맹주의 잘린 얼굴로 향했다.

‘크웁!’

갑자기 속이 뒤집히면서 구토가 쏠린다. 입을 틀어막고 있자 남궁천이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더니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뭐, 자존심을 지킬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

“그냥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라지시는 겁니다. 괜한 욕심 그만 부리시고, 당주 자리에서 내려오시는 거죠. 저도 단주 자리를 걸었고, 맹주님도 자리를 걸지 않았습니까? 좀 과해 보여도 오히려 멋지게 퇴장할 기회라는 거죠.”

“……!”

“자, 선택하시죠? 대가리를 박으실지, 얌전히 사라지실지.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안천길이 남궁천의 눈을 보고는 뺨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녀석은 진심이다.

다른 어떠한 제안을 내밀어도 고개를 저을 놈이다.

지독한 놈!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자신이 호법당주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견뎠던가?

그렇다.

치욕은 잠시지만, 권력의 힘은 영원한 법이다.

후에 복수를 하더라도 당주 자리를 보전해야만 하지 않겠나?

펄럭!

순간 안천길이 벌떡 일어나더니 남궁검을 향해 소리쳤다.

“안 모가 약속을 지켜 이 자리에서 머리를 박아 사죄드립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안천길이 바닥에 이마를 쿵 찧었다.

남궁천이 그 옆에서 입매를 길게 찢고는 귀에 손을 댔다.

“대가리 박았어요? 안 들리는데?”

쿠웅! 쿠웅! 쿠웅……!

안천길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연이어 이마를 박아댔다. 마침내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지만 머리를 박는 짓은 계속됐다.

이건 정말이지 엄청난 사건이었다.

호법당주가 신임 맹주에게 굴복한 대사건!

이로써 맹주의 위신은 좀 더 높아졌을 것이고, 누구도 쉬이 반기를 들지 못하리라.

하지만 남궁천도, 안천길도 오늘로 이 싸움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원래 정적을 처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당장의 치욕과 수치를 겪는다고 완전한 패배가 아니다.

쿵……! 쿠우웅……!

어찌나 세게 찧었는지 안천길이 그대로 픽 쓰러졌다. 그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기만 하자, 유백랑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호, 호법당주! 맹주님, 이제 그만 하심이……!”

순간 남궁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유백랑이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뭐, 뭐야? 도대체……! 남궁세가 사람들은 원래 다 이렇게 지독하리만치 냉엄한 자들이었나?’

그러는 사이 안천길이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서는 기합과 함께 머리를 내려찍었다.

“으아아아압!”

꽈아아앙!

마침내 대리석 바닥도 산산조각 나면서 안천길이 철퍼덕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이제는 미동조차 없었다.

물론 이만한 고수가 대리석 바닥에 머리 좀 찧었다고 의식을 잃기는 힘들다.

다만 이마가 깨진 것보다도 가슴에서 치민 울분 때문에 기혈이 엉망으로 뒤엉킨 것이리라.

남궁천이 옆에 서서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호법당주님도 사내답게 애쓰셨네요.”

반면 장내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백랑은 눈자위를 파들파들 떨기만 했다.

이윽고 남궁검이 유백랑을 보며 턱짓을 했다.

“호법당주를 약천당으로 데려가고, 약천당주는 호법당주를 살펴주시게.”

두 사람이 각각 대답하고는 서둘러 안천길을 부축했다.

그제야 겨우 의식이 돌아온 안천길이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깨진 이마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반짝였다.

‘내 언젠가 남궁세가 놈들은 씨도 남기지 않으리라!’

반면 그의 등을 초견파공안으로 살펴본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칼을 갈아야지. 앞으로 지랄발광할수록 더 깊은 늪에 빠지게 될 거다. 네가 따르던 맹주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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