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79화 (378/508)

379. 뛰는 놈 위에 나는 놈들

안천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안마당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다.

“한데 벌써 자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궁천 단주에게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있으니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군요. 물론, 우리 강호신룡이 무림공적 일 호를 놓칠 리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도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마친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그 시커먼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탓에 남궁검은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안천길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맹주님께선 남궁천 단주로부터 받은 연락이 있으신지요? 이젠 슬슬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직 아무런 소식 없소.”

“저런! 그럼 무림공적 일 호를 놓친 건 아닙니까? 만약 그를 사로잡거나 죽였다면 반드시 연락을 해왔을 텐데요.”

“나는 적랑단주를 믿고 있소. 오히려 무림공적을 놓쳤다면 연락이 왔을 거요.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흐음.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시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자정이 안 됐으니까.”

“그렇지요. 아직 자정은 되지 않았지요.”

안천길이 빙그레 웃는다.

사실 그건 승리의 미소였다.

이제 자정까지는 일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남궁천이 돌아왔다면 무림맹 정문에서부터 떠들썩해야 한다.

정문에서 여기까지 평범한 걸음으로 일각은 족히 걸린다.

‘역시 실패한 게 틀림없다!’

내심 쾌재를 부른 안천길이 술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맹주님,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만.”

“…….”

“만약 남궁천 단주가 자정까지 돌아오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렇다고 정말 적랑단주를 물러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만큼 막중한 부담감도 있을 테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하나 적랑단주의 자리는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매사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적랑단주가 동네 파락호는 아니지 않습니까?”

각주 중 누군가 버럭 소리쳤다.

안천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한마디로 적랑단주라는 자리는 패기와 열정만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충분한 경험과 노련함으로 이끌어야 할 자리라는 뜻이지요. 그게 단원과 맹의 신뢰를 얻는 방법이고, 나아가 양민들도 경외감을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남궁검이 냉랭하게 묻자, 안천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맹주께서는 적랑단주의 호언장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생각이 짧다고 여기시진 않는지요?”

“그만큼 자신이 있다고 여겼소.”

역시.

안천길의 예상대로 반응이 나온다.

남궁검이라면 저리 말할 줄 알았다. 고집이 세고 대쪽같은 성품이니까.

저런 성격을 지닌 자들은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실수를 깨우치기 힘들다.

안천길은 그 부분을 파고든 것이다.

이제 반각 정도 남은 상황.

남궁천은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도 남궁검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안천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맹주께선 아랫사람을 대하는 맹주의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요?”

“그대는 무엇이라 생각하오?”

“정확한 기준과 잣대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 보시오.”

“팔이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맹주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객관적으로 대할 줄 알고, 아랫사람의 잘못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미 결과가 그르쳤을 때는 늦었기 때문입니다. 하나 콩깍지가 씌어서 내 새끼만 감싸는 자라면 맹주의 자질이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 자는 언젠간 본 맹을 위기로 몰아넣고 패망의 지름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하나하나 틀린 말이 없다. 때문에 그에게 동조한 몇몇 당주와 각주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공감하는 척했다.

하나 남궁검은 말속에 숨은 뼈를 알고 있었다.

이건 언중유골(言中有骨) 수준이 아니다.

소리장도(笑裏藏刀)다.

저 희미한 웃음 속에 칼을 숨긴 것이다.

남궁검은 애써 돌려 말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지금 내 새끼를 감싼다는 거요? 콩깍지가 씌었으니 맹주로서 자질이 없다는 말이오?”

“물론 강호신룡은 그간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나 무림공적 일 호를 잡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천하대살성 진천랑도 수십 년에 걸쳐…….”

“진천랑은 대살성이 아니었소. 호법당주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대살성을 구분하지 못하는가?”

남궁검의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가 깔리자 안천길의 표정이 살짝 경직됐다.

‘이 상황에도 기도만큼은 날카롭구나.’

확실히 남궁검은 함부로 대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딱히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님에도 눈빛과 말 한마디에 상대를 기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안천길이 그 기에 눌리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쭉 펴고는 답했다.

이럴 때일수록 뻔뻔해야 한다.

“이런, 제가 실수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진천랑을 천하대살성으로 쫓다 보니 입에 밴 모양입니다.”

“흐음. 적랑단주의 입은 무거워야 하고,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라는 말에 공감하오.”

“오오, 그렇다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하나 아직 적랑단주는 그대 말대로 돌아오지 않았소. 그러니 기다려 봐야겠지. 그리고 그 전에.”

“……?”

“호법당주의 자리는 어떻소?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요?”

“그럴 리가요. 맹 내에 그리 가벼운 자리는 없습니다.”

“한데 방금 무고한 사람을 천하대살성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건…….”

“말 한마디로 무림공적을 만들고, 산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자리가 호법당주요. 한데 무심결에 뱉은 말이라서 실수했다? 죽은 자를 한 번 더 죽여놓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딱히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님에도 장내는 숨결마저 들릴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간간이 젓가락을 놀리던 인사들도 슬쩍 눈치를 보다가 손을 놓았다.

남궁검의 칼날 같은 시선을 받은 안천길이 결국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요? 책임을 그리 강조하던 자가?”

“그건…….”

어쩌다 보니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안천길이 남궁검을 보며 물었다.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할지요?”

“뭐, 우선은 적랑단주의 복귀가 시급한 문제이니, 호법당주의 징계에 대해서는 이후 생각해 보지.”

‘징계……?’

허! 지금 징계라고 했나?

자신을 징계하겠다고?

오냐, 그럼 그렇게 해라.

하나 그 전에 당신이 먼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거다!

이제 오기를 넘어 독기까지 품은 안천길이 작심하고 발언을 이어갔다.

“하면 본 맹에서 가장 책임이 큰 자리는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제 질문에 대한 맹주님의 생각입니다만.”

“물론 그것은 맹주의 자리겠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 식구 감싸기를 하다가 결국 모든 이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긴 맹주는 어찌 해야 합니까? 누가 어떤 징계를 내릴 수 있을까요?”

이쯤 되자 장내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맹 내에는 안천길처럼 전대 맹주를 두둔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수맹당주처럼 전대 맹주의 야비함에 실망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의견이 부딪치면서 술렁임이 조금씩 커졌다.

다만 총군사 제갈승만이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새 맹주가 정해진 후부터 내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곧 이어진 남궁검의 대답에 분위기는 다시 조용해졌다.

“해서 지금 나보고 어찌 책임을 질지 묻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적랑단주의 철없는 호언장담으로 어느 순간 맹이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겁니다. 하나 맹주께선 오직 적랑단주를 철저히 믿고 계시니…….”

스르르릉!

갑자기 남궁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안천길은 물론, 제갈승도 흠칫하고는 남궁검을 주시했다.

안천길의 눈동자가 떨렸다.

‘검을 뽑아? 남궁검 가주가 이 정도로 과격한 자였던가?’

오히려 그렇다면 다행이다.

감정 조절을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빈틈이 많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남궁검 가주는 감정 조절이 철저한 자였다.

그래서 바위 같은 자.

그러다 보니 남궁검이 왜 검을 뽑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오히려 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남궁검이 안천길을 마주 보고 섰다.

척!

남궁검이 검신을 안천길의 목에 겨누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지켜보던 각주 중 누군가 딸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히꾹.”

안천길이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검이 내 목을 벨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맹주께서 자결할 일은 없겠지요.”

“하면 이 검이 자네 목을 벨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

“…….”

“모르겠습니다만.”

휘리릭, 철컥!

다음 순간 남궁검이 검을 거두더니 순식간에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 일련의 동작만 보더라도 남궁검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 수 있었기에 몇몇 이들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남궁검이 돌아서며 말했다.

“그와 같다.”

“……?”

“올바른 강호 조직이란 한마음, 한 몸과 같아야 하는 법. 무림맹도 그래야 할 것이다. 적랑단주를 무작정 신뢰한다고 했나? 그럴 수밖에. 내가 맹주가 된 이상 단주들은 나의 손발이나 마찬가지. 내가 내 손발을 믿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자네처럼 다른 자의 손에 검이 들렸다고 생각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을 테지.”

“……!”

남궁검이 자리로 돌아와 서서 장내를 둘러보았다.

“날씨도 찬데 이런 어색한 환영식, 그걸 굳이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할 말이 있어서였소.”

“…….”

“무림에선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은 것. 본 맹 역시 옆구리에 칼 찬 무인들로 득실거리는 곳이오. 이런 조직에서는 뜻을 모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하나 남의 손에 칼을 맡기고서 편한 잠을 잘 수는 없는 법 아니겠소? 하여, 나는 내일부로 무림맹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생각이오.”

웅성웅성……!

지켜보던 제갈승도 놀란 것인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보았다.

마침 안천길이 미간을 팍 구기며 소리쳤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맹주라지만……!”

“물론 그 전에 자네가 말한 책임도 확실히 지도록 하지. 만약 적랑단주가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 역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네.”

“……!”

다시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그제야 안천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진심이십니까?”

“맹주의 자리는 무겁다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책임을 질 걸세.”

“흥! 맹주께선 지금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정이라고 해봐야 이제 반의반 각도 남지 않았습니다만.”

안천길이 노골적인 조소를 지었다.

자정이 되는 순간 맹에서는 종이 세 번 울릴 것이다.

그때까지 남궁천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파란은 끝난다.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시작되었던 남궁검의 시대가 삼일천하로 끝나는 셈이다.

남궁검이 안천길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대신 자네는 어찌할 텐가?”

“무얼 말입니까?”

“적랑단주가 시간 내에 돌아오면? 한마음으로 신뢰를 주지 못한 자네는 어찌할 텐가?”

“그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지. 적어도 나에 대한 불경죄가 되겠지. 아직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호법당주가 내 말끝마다 따박따박 반기를 들며 따지는데, 누가 진실로 나를 따르겠는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안천길이 표정을 굳히고는 물었다.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흐음. 글쎄.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니 벌을 내리는 것도 애매하고…… 역시 이 정도면…….”

“……?”

“대가리 박으시게.”

“그러…… 으응? 예에?”

“내 믿음에 나는 맹주 자리를 걸었네. 자네도 내 믿음을 의심한 대가로 대가리 정도는 박아야겠지?”

뭐, 이런…….

안천길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흥! 좋습니다. 그러지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합정관 담벼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그럼 이제 호법당주님, 대가리 박는 거예요? 진짜?”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돌아본 곳에는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담벼락에 척 걸터앉아 있었다.

‘아, 아니, 어째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저런 곳에?’

안천길의 눈썹이 격하게 떨리는 가운데, 남궁천이 상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정을 알리는 웅장한 종소리가 맹 내에 울렸다.

댕…… 댕…… 대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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