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뛰는 놈 위에 나는 놈들
“후우우.”
소공마가 긴 숨을 내쉬었다.
징그러운 꼬마 새끼라니.
지금 누가 누구보고 징그럽다고 하는 건가?
‘이래서야 정말 징그러운 쪽은 너 아니냐고.’
정말이지 어떻게 된 꼬마 새끼가 약관을 채우자마자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한단 말인가?
소공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형은 진짜 말을 예쁘게 안 해서 탈이야.”
“예쁜 구석이 있어야 예쁘게 말하지. 이 새끼야.”
“나는 형이 참 좋은데, 형은 내가 싫은가 봐.”
“아냐. 누가 그래? 내가 널 안 좋아한다고?”
남궁천이 놀란 척 표정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공마가 어깨와 옆구리를 가리켰다.
“이것 봐. 형 때문에 이만큼이나 다쳤잖아. 형이 날 좋아하면 이렇게 했겠어?”
“으이그, 이 멍청한 꼬마 새끼야. 좋아하니까 그러지. 사랑의 매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사랑의 매?”
“그래, 이 새끼야. 네가 얌전히 날 따라가면 이렇게까지 안 했지. 그러게 지난번에 형이랑 같이 갔으면 좋았잖아?”
“형, 집착은 사랑이 아니야. 이건 명백한 집착이라고.”
“집착인지 사랑인지 같이 연구해보자고. 자, 지금이라도 순순히 이 형을 따라가는 게 어떠냐?”
소공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 정말 약관 맞나?
아니, 뭔 놈의 새끼가 던지는 말마다 한발 앞서서 다 받아치지?
소공마가 피식 웃었다.
“역시 형은 말이 잘 안 통하네.”
“원래 사랑에 빠진 인간은 말이 안 통하는 법이다. 꼬마 새끼야.”
소공마는 진심으로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강호를 살다 보면 경험과 연륜이 필연적으로 묻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사투를 앞두고 대화를 나눌 때다.
대개가 이럴 경우 본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공포심이 드러나거나, 조급함이나 절망감이 드러난다. 또는 들뜬 기색이 역력해진다.
한데 남궁천은 그렇지 않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태도다.
정말이지 살면서 사투를 앞두고 대화를 나눈 경험이 수십 번은 되는 인간 같다.
어쨌거나 상황은 최악에 빠졌다.
이제 막 실권을 잡은 남궁천을 제대로 꼬드겨 보려고 했는데, 완벽한 함정에 빠진 셈이 됐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뛰는 놈을 묵천악이라 생각했고, 스스로 나는 놈이라고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묵천악은 기어가는 놈이고, 밟히는 놈이었다.
자신이 뛰는 동안 진짜 날고 있던 놈은 남궁천이 아닌가?
이제 어쩐다?
살수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남궁천이 눈앞에 서 있다.
그리고 언제든 철시를 쏠 수 있는 패력궁이 손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
어쩌면 남궁천과 패력궁의 호흡이 맞지 않아서 오히려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건 헛된 희망이다.
허황된 희망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괜한 기대는 체력만 더 소모하게 만들 수 있다.
남궁천은 초견파공안의 재능을 지녔고, 패력궁은 무림칠성 중 한 명이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저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어깨가 뚫렸고, 옆구리는 깊게 베여서 지혈한 상태다.
역시 신이 돕지 않는 이상 가망이 없다.
그렇다면 역시……!
소공마가 백묘에게 전음을 흘렸다.
[엄호.]
[복명!]
백묘의 전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타앗!
소공마가 바닥을 차며 날아올랐다.
파라라라라라!
촤라라라라라!
소공마를 뒤쫓으며 살수들이 일제히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슈캉! 땅! 쩌엉! 푹푹푹!
“커윽!”
“윽!”
낭호도에 찍히거나 베인 살수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마구 쓰러져 간다. 그러는 사이 백묘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부채춤을 추었다.
“하아아앗!”
촤라라라락!
츄츄츄츄핏!
“크악!”
“아악!”
살수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진다. 남궁천도 바닥을 차고 백묘에게 날아들었다.
휘리리리릭!
파앙!
남궁천이 발로 걷어차자, 백묘가 반사적으로 부채를 펼쳐 막으면서 멀어졌다.
츠츠츠츠츳!
발자국을 길게 남기며 멀어진 백묘가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남궁천에게 달려들었다.
촤촤악!
부채 두 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비도처럼 날아들었다.
샤샤아아악!
파라라라라!
남궁천이 몸을 눕히면서 빠르게 회전하자, 두 개의 부채가 아래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살수의 비도 한 자루가 소공마의 등을 노리며 날아갔다.
“어딜!”
백묘가 얼른 몸을 날렸다.
부채가 손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쌍장을 펼치면서 비도를 쳐냈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철시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투투!
파팍!
남궁천과 백묘가 서로 장을 펼쳐 멀어지면서 바닥에 엎드렸다.
철시가 바닥에 꽂히고 바위를 부수고 나뭇가지를 관통한다.
휘리리리리릭!
달아나던 소공마도 발이 묶이면서 몸을 회전해 철시를 피해냈다.
츄핏! 츄핏!
하지만 두 자루의 철시가 그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스치면서 피를 뿌렸다.
“크읍!”
남궁천이 그 틈을 이용해서 몸을 훌쩍 날렸다.
“거기 서라! 꼬마 새끼!”
하지만 이번에도 백묘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촤라라라라!
펼쳐진 부채가 춤을 추듯 남궁천에게 날아들었다.
슈캉! 땅!
벽라검과 추혈검을 휘둘러서 날아드는 부채를 연이어 쳐냈다.
“하앗!”
백묘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일장을 뻗어냈다.
하지만 이미 백묘의 공력 흐름을 파악하고 있던 남궁천이 곧장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벽라검을 내질러 갔다.
“헛!”
찰나지간 위기를 느낀 백묘가 얼른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벽라검이 그녀의 등을 사선으로 베어 들어가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아아악!”
그러잖아도 자잘한 상처가 무수히 남은 백묘였는데, 이번 검상은 꽤나 치명적이었다.
남궁천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어쩌지? 난 여자라고 봐주질 않는데.”
말을 마친 남궁천이 그대로 달려들면서 주먹을 백묘의 안면에 꽂았다.
꽈아앙!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는데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백묘가 휘청거리며 물러나자, 남궁천이 그대로 돌아서며 발을 내질렀다.
퍼억!
슈우우우욱, 꽈다앙!
그대로 포탄처럼 튕겨 나간 백묘가 나무둥치에 처박히면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끄륵……!”
눈을 허옇게 뒤집은 백묘는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남궁천이 돌아서는 사이,
핏!
한 줄기 섬광이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이번엔 소공마가 튕겨 날아가더니 나무둥치에 처박혔다.
콰당!.
쒜에에에엑!
뒤늦게 소리가 울렸다
패력궁이 쏜 철시였다.
“끄읍……!”
소공마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가린 나뭇잎.
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흔들린다. 그 찰나의 순간에 소공마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자신을 향해 시위를 놓는 패력궁을 확인했다.
파바밧!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옆구리가 관통된 상태에서 몸을 굴렸다. 곧이어 철시 한 자루가 날아와 나무 둥치에 박혀들었다.
쒜에에에엑! 꽈아아앙!
조금 전까지 소공마가 있던 자리가 완전히 박살 났다.
시커먼 구덩이가 생겼다.
남궁천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휴, 하마터면 나도 맞는 줄 알았네.”
새삼 간담이 서늘하다.
만약 전생에 패력궁이 자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정말이지 천적이 되었을 것 같다.
초견파공안으로 확인도 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곳에서 이렇게 화살을 쏘아대면 어찌 그걸 막겠나?
“으으, 생각도 하기 싫네.”
남궁천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소공마가 쓰러진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런데 쓰러진 백묘 앞을 지나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의식이 돌아온 백묘가 남궁천의 바짓단을 잡고 있었다.
“못 가.”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좁히다가 피식 웃었다.
“아니, 어울리지도 않게 왜 이래? 이러면 마음 약해져서 못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교면 마교답게 굴어야지.”
퍼억!
가차 없이 백묘를 걷어찬 남궁천이 마침내 소공마 앞에 쪼그려 앉았다.
철썩!
남궁천이 소공마의 뺨을 후려쳤다.
“어이, 동생. 이게 뭐야? 형아 속상하게. 많이 다쳤잖아.”
“헤헤. 형…… 진짜 대단하네. 내 생각보다 훨씬 멋졌어.”
“그래, 그럼 이 형을 따라서 같이 갔어야지. 그럼 이렇게 다치지도 않을 텐데.”
“괜찮아. 형 정도면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신명나게 한바탕 놀았으니까.”
“어린 새끼가 꿈이 없네. 꿈이 없어.”
“어서 죽여, 형.”
“흐음.”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민 좀 해보자.”
“무슨 고민?”
“널 산 채로 끌고 가는 게 좋을지, 죽여서 목만 들고 가는 게 좋을지.”
“산 채로 끌고 가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내가 이래 봬도 성깔이 더러워서.”
“역시 그렇겠지?”
남궁천의 말에 소공마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혈도 하고 공진철로 구속도 해야 할 거야. 아니면 독약도 먹여야 할 거고. 그런데 난 생각보다 강해서 어지간한 점혈은 혼자서 풀 수도 있고, 공진철도 통하지 않는 마공을 익혔거든. 게다가 독약 정도도 뭐 어쩌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소공마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남궁천은 그것이 허세나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반로환동에 반박귀진의 경지까지 오른 인간이다.
무림칠성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럼에도 오늘 이렇게 사로잡은 것은 치밀한 작전 덕분이었다.
거기에 무림칠성 중 한 명인 패력궁이 큰 도움을 주었고.
남궁천이 결심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인질은 하나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너보단 저기 쓰러진 여자가 여러모로 다루기도 쉽겠고. 결심했다. 동생, 너는 여기서 죽자.”
“응. 그래도 우리 집안을 얕보진 마. 내가 죽으면 아마 나보다 성깔 더러운 사람들이 무림맹을 노릴 테니까.”
“충고 새겨듣지.”
“역시 화끈한 형이야. 그럼 죽여줘.”
소공마가 목을 길게 빼고는 웃었다.
정말이지 생사를 초월한 심지를 가진 자였다.
남궁천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품에서 벽라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음 순간,
샤아아아악!
검신이 떨어져 내릴 때!
쉬이이이잇!
느닷없이 바람 한 줄기가 날아들었다.
“……!”
남궁천이 얼른 몸을 돌려 벽라검의 방향을 비틀었다.
쩌까아아앙!
청명한 금속성에 이어 웬 인영이 남궁천을 향해 일장을 뻗어내는 게 아닌가?
남궁천이 반사적으로 품에서 추혈검을 뽑아 들고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퍼차아악!
장력이 터지면서 강기를 머금은 추혈검도 솟구쳐 올랐다.
핏줄기도 튀어 올랐다.
하나 남궁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기를 튕겨내?’
최소한 손목은 잘라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바닥을 아주 얇게 베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최소한 자신과 비등한 경지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촤츠츠츠츳!
미끄러지다시피 물러선 남궁천이 벽라검과 추혈검을 양손에 나눠 쥐고는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온통 금칠한 가면을 쓴 자가 남궁천을 마주 보고 서더니 수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바람처럼 날아와 소공마를 부축했다.
남궁천이 미간을 푹 찡그리고는 물었다.
“마공도 아닌 것이…… 누구냐?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