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사방이 적이다
후우웅.
겨울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
그에 따라 천무류의 몸도 버들가지처럼 휘청인다.
흔들…… 흔들…….
이따금 산 중턱에서 솟구친 칼바람이 스칠 때면 장삼 자락이 사정없이 펄럭이기도 한다.
하나 천무류는 나뭇가지 위에 굳어버린 석상이 되었다.
아니다. 석상은 전혀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천무류는 움직이고 있다.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가 겨눈 화살촉은 나침반처럼 한 방향으로만 고정된 채로 미세하게 이동한다.
화살촉은 여전히 소공마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그럼에도 천무류는 시위를 놓지 않았다.
거리가 멀다.
비록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철시(鐵矢)를 사용했다지만 겨울바람이 매서운 데다 이만큼 거리가 멀다면 반드시 변수가 작용한다.
천무류는 눈을 감았다.
바람을 느껴야 한다.
바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람은 계산하는 게 아니라 이겨내는 거라지만, 이만큼 거리가 멀어지면 느껴야 한다.
겨울바람은 심술궂다.
이따금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움직임으로 몸부림을 칠 때가 있다.
한 줄기 따스한 햇살을 느끼려고만 하면 삭풍이 불어닥치면서 약을 올린다.
천무류는 온몸으로 바람을 느꼈다.
혼돈은 자연이다.
질서는 혼돈의 또 다른 모습이다.
즉, 모든 흐름은 돌고 돈다.
변덕스러운 바람이지만, 그 안에서도 약속된 것처럼 흐름이 있다.
우연은 없다.
흔들…… 흔들…….
이 순간 천무류는 바람이 되었다.
의식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언덕을 지나고 나무를 지나고 허공을 지나 먼발치의 소공마의 심장까지 닿았다.
번쩍!
천무류가 눈을 떴다.
휘이이이이잉!
다시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천무류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끈질기게 늘어졌다.
하나 천무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화살촉도 이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흔들…… 흔들…….
마침내 화살촉이 소공마의 심장에 맞닿은 순간!
패애애애애앵!
철시가 시위를 떠났다.
쒸에에에엑!
긴 소리가 꼬리처럼 늘어졌다.
공력을 담은 철시였기에 꽤나 시끄럽지만 상관없다.
화살이 소리보다 빠를 테니.
* * *
[나는 처음부터 형이 마음에 들었어. 정말이야.]
소공마가 활짝 웃으며 말을 하니 남궁천이 뭐라고 대답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옆에 앉은 백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읊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으려면 무림칠성만큼이나 공력이 심후한 소공마 정도의 경지가 되어야 하기에.
백묘로서는 그저 남궁천이 여전히 탁자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소공마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전음입밀 역시 소리를 기에 실어 전달하는 수법이다. 때문에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전달할 수는 없는 법.
[내 생각은 그래. 형도 당장은 무림맹에서 기반을 다져야 하잖아? 응? 아, 그건 그렇지. 남궁검 가주님이 맹주님이시지. 하지만 이런 판도를 만들어낸 건 형이잖아. 그리고 형 역시 남궁세가 사람이고. 하하! 내가 원래 예의가 발라.]
남궁천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소공마가 천연덕스럽게 손까지 휘저으며 대꾸한다.
[아무튼 어차피 무림맹에서 기반을 잡아야 할 텐데, 그걸 본 교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이래 봬도 내가 꽤 높은 사람이라서. 헤헤. 알고 있었다고? 역시 형은 참 똑똑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형을 돕고, 형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어울리는 세상. 어때?]
소공마가 천진한 표정으로 대답을 듣더니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에이, 아니지. 그게 왜 묵천악과 같은 방식이야? 묵천악은 본 교의 주인이 되려고 했어. 욕심이 과했지. 우리를 마치 기르는 개새끼 대하듯 했다니까? 형은 그러지 않을 거잖아. 알지, 알아. 형은 훨씬 똑똑…….]
전음을 이어가던 소공마가 일순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백묘가 심상찮음을 느끼고는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쉭!
뭔가가 뺨을 가볍게 스치면서 지나갔다.
‘어……?’
뭐였지?
기분 나쁜 감각이다.
따지고 보면 당연히 기분 나쁠 수밖에.
무인으로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감각을 느꼈다는 건 위험 신호니까.
백묘의 눈이 기적처럼 화살을 좇았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이 느려졌다.
‘철시……?’
소공마의 눈도 찢어질 듯 커졌다. 이미 백묘보다 훨씬 일찍 철시가 날아든다는 것을 파악한 그였다.
하나 움직임이 기감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일찍 눈치를 채긴 했으나, 그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과연 무림칠성에 견줄 만한 경지이긴 한 모양이었다.
세상이 느려진 가운데, 소공마가 허리춤에서 거짓말처럼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물론 백묘의 눈으로 그 과정까지 자세히 좇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 소공마가 이미 손도끼로 철시를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공력이 상당히 실린 탓인지 손도끼 날에 튕긴 철시가 사선으로 방향을 틀면서 소공마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쒸에에에엑!
빠아아아악!
소리가 벌어진 상황의 뒤를 잇는다.
“끄으으읍!”
소공마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공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후우우우우웅!
기풍이 사방으로 불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소공마가 뒤로 주르르륵 밀려났다.
삼면이 튀어나온 바위 언덕이었기에 그대로 밀려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판이었다.
콰가가가가각!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게를 더하니 소공마의 발바닥이 바위에 깊은 발자국을 새겨놓았다.
츠츠츠츳……!
마침내 소공마가 멈춰 섰다.
천진하고 낭창해 보이던 아이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핏대가 서고 잔뜩 충혈된 눈이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다.
“훅, 훅, 훅……!”
“부교주님!”
백묘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만약 소공마의 반응이 반 박자만 늦었더라도 꿰뚫리는 것은 어깨가 아니라 심장이 되었으리라.
우우우웅……! 우우우웅……!
소공마의 손에 들린 손도끼가 늑대 울음처럼 구슬프게 공명했다.
순간 고개를 휙 쳐든 소공마.
쉬팟!
이번에는 철시를 정확히 쳐냈다.
쒸에에에엑!
따아아아앙!
이번에도 소리가 뒤를 이었다.
백묘는 이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튕겨 나간 철시가 그대로 술상으로 날아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산해진미가 차려진 상차림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절벽 아래로 흩날렸다.
우우웅! 우우우웅……!
소공마가 손도끼를 콱 움켜쥐고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슬쩍 훔쳤다.
“밥상을 이런 식으로 엎어버리네.”
“부교주님!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내 뒤로 와서 준비해 백묘.”
“어찌 제가 뒤에 서겠습니까? 앞서서 막아보겠…….”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냐. 말 들어.”
“아…… 알겠습니다!”
백묘가 얼른 대답을 하고는 소공마 뒤로 달려갔다.
소공마가 나직이 일렀다.
“뒤돌아서. 포위됐어.”
“어, 어느 틈에!”
“정신이 없지만 그럴수록 정신 차려야지.”
“헛! 살수군요?”
소공마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백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여기까지 남궁천이 안배한 것인가?
묵천악이 남궁천을 제거하지 못해 안달일 때는 나이가 들어서 조급함이 늘었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그야말로 남궁천은 괴물 같지 않은가?
소공마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다.
단지 소공마와 한 번 손을 섞은 것만으로 여기까지 준비하다니.
소공마가 히죽 웃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녀석이야. 거의 완벽해. 아니, 지금 녀석이 가진 자원으로 가장 완벽해.”
“…….”
“첫 발은 정말 위험했어. 한데 그걸 막을 걸 대비해서 바로 다음 화살을 연이어 날렸지. 이미 첫 발을 막아낸 이상 두 번째 화살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던 거야.”
“그럼에도 쏜 것은……?”
“눈치 못 챘잖아? 살수들.”
“아……!”
“그래, 두 번째 철시는 주의를 흩트리는 용도였던 거지. 두 발의 화살을 방어하는 사이 살수들이 제법 거리를 좁혀왔어.”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기습에 정신이 없어서…….”
“아냐. 백묘가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신속하면서도 치밀하게 준비한 거니까.”
“그런데 부교주님이 여기 계시는 걸 어떻게 이리 빨리 알아챘을까요?”
“묵천악이 정말 천라지망을 뚫은 것이었을까?”
“그럼……?”
“천라지망이 애초에 묵천악을 노리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아!”
소공마가 남궁천이 있던 방향을 힐끔 돌아보았다.
한데 남궁천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쨌거나 소공마가 말을 이었다.
“정말 놀라운 녀석이라니까. 나와 손을 섞은 직후 남궁천은 천라지망을 내게 펼친 것이야.”
“역시 그렇군요.”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궁천은 묵천악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 거겠지.”
“대체 그 방법이 뭐죠? 강호에서 사람 찾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더구나 맹주 정도 되는 인간이라면 더욱 까다로울 텐데…….”
“글쎄…….”
우우웅. 우우웅.
소공마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손도끼가 연신 몸을 떨며 울어댔다.
“이런 걸 가진 게 아닐까 싶은데?”
소공마가 문득 손에 든 손도끼를 들어 보였다.
낭호도(狼號刀).
겉보기에는 그저 시커멓고 투박한 손도끼지만, 명실상부한 신병이기다.
웬만한 무인보다 살기에 민감하게 공명하며 늑대 울음 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다만 반박귀진의 경지까지 오른 소공마는 낭호도보다 기감이 더 뛰어났기에 그런 쪽으로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소공마가 하는 말은 남궁천에게 묵천악을 찾을 수 있는 신병이기가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 뜻을 짐작한 백묘가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보신 적 있으세요?”
“응. 시커먼 단검이었는데 묘하게 요기가 느껴진달까?”
“그렇다면 정말 제대로 걸린 거군요.”
“그렇지.”
소공마가 대답을 하면서 남궁천과 손을 섞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남궁천은 벽라검을 두고도 기어이 단검을 이용해 자신을 노렸다. 그 역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었다.
“남궁천, 다시 봤어. 재미있는 녀석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조심해야겠어요.”
“그 정도가 아냐.”
“……!”
백묘가 표정을 굳히고 소공마를 슬쩍 돌아보았다.
소공마의 얼굴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로환동한 이후로는 정말이지 아이처럼 천진한 모습만 보이던 소공마였다.
한데 이렇게 진중한 태도를 보이니 절로 긴장이 됐다.
소공마가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엔 정말 쉽지 않겠어.”
소공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여차하면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워야 하리라.
소공마가 바위 절벽 아래쪽을 힐끔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야. 미친 괴물 같은 녀석은 무서울 정도로 빨리 달려오고 있고, 무림칠성 중 한 명이 철시로 날 노리고 있어. 내 목과 심장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상당히 먼 거리여서 내가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어. 그런데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살수들까지 떼로 몰려서 포위하고 있네? 아니, 도대체 이 많은 살수 새끼들은 어떻게 모은 거지?”
소공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커먼 철시가 허공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쒸에에에엑!
꽈아아아아앙!
파공성에 이은 폭음이 터지기가 무섭게 살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