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 사방이 적이다
“마지막 부탁이라. 싫은데?”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답하자 묵천악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것도 아닐세. 죽은 자의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지 않던가?”
“흐음, 글쎄? 뭐 궁금하니까 일단 들어나 보지.”
남궁천의 대답에 묵천악이 안도의 숨을 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적랑단원들이 사방을 에워싼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시위에 화살을 건 상태였다.
그들이 머금고 있는 흉흉한 살기 때문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한때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던 이들이 이젠 자신을 향해 굶주린 맹수처럼 살기를 잔뜩 드러내고 있다.
얕은 한숨을 내쉰 묵천악이 남궁천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수십 년간 맹주로 살아왔네. 적어도 마지막은 맹주답게 죽고 싶군.”
“맹주답게 죽는다는 건 어떤 거지?”
“일대일의 비무를 신청하는 바이네.”
“호오, 개죽음은 싫다는 거군.”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단한 것도 아니긴 하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활을 겨누고 있던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경계를 풀고 활을 내렸다.
다른 단원들 역시 살기를 거두고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층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묵천악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별말씀을.”
남궁천이 가볍게 대답하고는 뒷걸음질을 쳐서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묵천악은 단전에서부터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다행히 내공이 상하진 않은 상태.
그래도 마지막을 무인으로서 비무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묵천악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진천랑…….’
이제 묵천악의 눈에는 남궁천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진천랑이었다.
일대일의 비무를 받아들인 이상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는 셈.
‘죽을 때 죽더라도 네놈만은 반드시 저승길 동무로 삼아주마.’
결심을 굳힌 묵천악이 서서히 기수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짝다리를 짚은 채 팔짱만 끼고 있다.
‘오만하고 방자하군. 네놈은 원래 그랬지. 하나 그 태도는 내게 곧 기회가 되리라.’
다음 순간!
파앙!
묵천악이 바닥을 차며 포탄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그의 발끝에서 눈보라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쑤아아아아앙!
질풍처럼 내달린 묵천악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내질렀다.
“진천라아아아앙!”
생에 마지막 비무이기 때문일까?
하늘에서 흩날리는 싸락눈은 시간이 늘어난 것처럼 느리게 떨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속도가 답답할 만큼 더디다.
거리를 절반쯤 좁혔을 때, 묵천악이 눈자위를 꿈틀거렸다.
남궁천이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건 기수식 따위가 아니었다.
‘수신호!’
묵천악은 달려가는 와중에도 눈알을 돌려 측면을 보았다.
어느새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기고 있었다.
‘이런 개새……!’
눈알이 다시 돌아가 남궁천을 본다.
남궁천의 입매가 천천히 비틀린다. 곧이어 들어 올렸던 남궁천의 손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투투투투투투퉁!
쏴아아아아아아!
일시에 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낮은 하늘을 빽빽하게 채운다.
고개를 꺾어 든 묵천악의 시야에 죽음의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다. 이윽고 묵천악의 얼굴에도 절망이 스며들었다.
‘진천랑! 네놈이 끝까지 날 속였구나!’
쉬쉬쉬쉬쉭!
푸푸푸푸푹!
매서운 소리에 이어 화살이 살을 뚫고 박혀 들었다.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힌 묵천악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털썩!
한 쪽 무릎을 꿇은 그가 부들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진천랑…….”
“저런, 많이 다치셨네요.”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다.
묵천악이 핏발이 선 눈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이익! 약속하지 않았더냐! 이렇게 비열한……!”
쒸쒸에에엑!
타앙! 푸욱!
“커억!”
느닷없이 날아든 장창을 일장으로 쳐냈지만, 다른 창 하나는 미처 막지 못했다.
그 바람에 장창이 묵천악의 옆구리를 꿰뚫고 말았다.
한참을 비틀거리던 묵천악이 마침내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쿨럭, 쿠웨에엑!”
시커먼 탁혈이 연거푸 토해졌다.
“헉, 헉, 후우. 후우우.”
묵천악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에서는 걸쭉한 피가 침과 섞여서 바닥까지 늘어졌다.
남궁천이 혀를 차며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휴, 꼴이 이게 뭐요? 그래도 한때 맹주라는 자가. 그러게 좀 착하게 사시지.”
“속이…… 후련한가……?”
“후련하지 않을 게 있겠소? 솔직히 말해 드릴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소. 복수하면 허망하다던가? 개소리. 나는 기분이 찢어지게 좋은걸?”
“진천랑…… 마지막은 비무를 약속하…….”
“어휴, 아직도 그 소리요? 거, 보시오. 당신은 아직도 내 삶을 완전히 이해 못 한 거야. 만약 내가 그런 말을 씨불였다면 당신은 들은 척이나 했을까? 말해보시오. 내가 죽던 마지막 날. 당신에게 일대일의 비무를 청했다면?”
“…….”
“거 보시오. 본인이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부탁은 애초에 남에게 하는 게 아니오.”
“그렇군. 쿨럭, 쿠웨에엑!”
“에헤이, 거, 더럽게. 좀 참아보지.”
“진천랑. 자네는 날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만드는군.”
“더 비참해도 돼. 당신은. 뭐? 평화를 위해서? 나도 확실히 말해주지. 내가 당신을 밟아 죽이는 게 강호 평화를 위한 일이야. 알겠어?”
“…….”
“그리고 무림공적이 비무를 신청한다고 덜컥 받아줄 멍청이가 누가 있겠나? 받아준다고 해도 믿으면 안 되지. 무림공적 일 호는 그런 거다.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자리. 세상이 외면해 버린 자리. 그게 무림공적 일 호야. 이렇게 순진해 빠져서야. 다른 의미로 역대 최악의 무림공적 일 호네.”
“클클클. 그렇군. 내 생에 마지막 깨달음이군.”
저벅저벅.
남궁천이 무감한 표정으로 다가서서는 무릎 꿇은 묵천악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큭!”
힘없이 머리가 들린 묵천악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추혈검을 목에 가져다 대며 나직이 혀를 찼다.
“다음 생에는 부디 평범하게 태어나 선행만 베푸시오. 묵천악.”
“……!”
츄아아아아앗!
일순간 빛줄기가 솟구치더니 묵천악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잘린 목의 단면에서 피를 분수처럼 뿌리다가 쿵 쓰러졌다.
남궁천은 묵천악의 수급을 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아니,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부릅뜬 묵천악의 머리는 남궁천의 손에 매달린 채로 피만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남궁천이 한옆으로 묵천악의 수급을 휙 집어 던졌다.
“비싼 거니까 잘 챙겨라.”
“예, 단주님!”
손우곤이 얼른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달려 나와서 묵천악의 수급을 챙겼다.
* * *
소공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네. 자기 아버지가 죽은 방식과 똑같았어.”
“결국 맹주도 그렇게 떠났군요. 그동안 본 교를 위해 나름 잘해주었는데요.”
“이제 새로운 짝이 생겼으니 한 번 구슬려 봐야지. 우리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과연 말이 통할까요?”
“글쎄. 시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소공마가 생글생글 웃으며 먼발치의 남궁천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 *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남궁천이 얕은 숨을 내쉬고는 부서진 사당 쪽을 보았다.
차려진 진수성찬 위로 싸락눈이 덮이고 있었다.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던 산해진미들이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듯했다.
남궁천은 탁자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털썩 앉았다.
술병을 확인하고는 곧장 입으로 나발을 불었다.
“크으, 좋군.”
곧이어 불쑥 손을 뻗어 삶은 닭다리 하나를 쥐고 뜯기 시작했다.
술 한 모금과 닭 다리 한 입, 다시 술 한 모금과 닭 다리 한 입.
“식어도 맛있네.”
남궁천이 너스레를 떨더니 다시 술병을 나발 불면서 한 병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렇게 얼마나 허기진 배를 채웠을까?
돌연 남궁천이 누구에게 건네는 건지도 모를 말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단 말이지. 굳이 이렇게 갖다 바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를 볼 수 있었는데.”
그러자 놀랍게도 남궁천의 귓가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내 선물 마음에 안 들었어? 형아?]
‘역시.’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멈칫했다.
천리전음이다.
말 그대로 천 리 밖까지 전음을 전할 수 있는 무공. 상당한 내가 고수라는 방증이다.
하긴. 반박귀진에 반로환동의 경지까지 올랐다면 이 정도는 당연히 구사하리라.
남궁천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선물은 원래 주고 싶은 것보다 갖고 싶은 걸 전해야 효과가 좋은 법이다, 꼬마.”
[맹주를 갖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건 받아봐야 별로 기쁘지 않지.”
[그렇구나. 그렇다면 정말 괜히 도와줬네.]
“어디 들어나 보자.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뭔지?”
[우선 술부터 한잔해. 술병은 아직 더 있잖아.]
“좋지.”
남궁천이 대답하고는 다시 술병 하나를 들었다.
[나도 지금 형이랑 술 마시는 중이야. 거리는 멀지만 이렇게 대화하면서 마시니까 같이 마시는 것 같다. 그렇지?]
“애새끼가 일찍부터 술을 너무 처먹으면 병신 된다.”
[하하하, 역시 형은 재미있어. 난 형이 마음에 들어. 형은 어때?]
“글쎄. 서로 궁합이 잘 맞는지 알아보려면 가까이에서 얼굴을 봐야 하지 않을까?”
[그건 다음에.]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애새끼네.”
[헤헤. 맞아. 세상이 워낙 무섭기도 하고.]
“겁도 많고.”
[에이, 이왕이면 조심성이 많다고 해줘.]
“그래서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하실 말이 뭘까? 우리 애새끼는.”
[내 생각에 형이랑 나는 서로 잘 맞는 것 같아. 그래서 상부상조할 수 있지 않을까?]
“흐음. 글쎄.”
마침 손우곤이 맹주의 수급을 넣은 목함을 들고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단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그럼 예정대로.”
“예, 단주님.”
언뜻 보면 맹주의 수급을 취하고 나서 나누는 평범한 대화 같았지만, 두 사람의 눈빛만큼은 전에 없이 예리했다.
손우곤이 돌아가자 남궁천이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 우리 동생이 생각하는 게 뭔지 들어볼까?”
* * *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소공마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백묘가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남궁천이요?”
“응. 갑자기 경계심이 허물어진 느낌이랄까?”
“맹주의 수급을 취했으니 마음의 짐을 덜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듣자 하니 오늘 자정까지 맹주를 처리하지 못했다면 단주의 자리까지 위험할 수 있었던 것 같던데.”
“흐음. 그런가? 뭐, 그런 거면 상관없지만.”
“호호. 부교주께선 남궁천을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아요. 무림칠성과 어깨도 견주실 분이면서.”
소공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술잔을 들이켜고는 전음을 흘렸다.
[와아, 역시 형은 대화가 잘 통한다니까.]
* * *
같은 시각.
소공마가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산 중턱의 나뭇가지 위.
커다란 활을 들고 시위를 한껏 당긴 천무류가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대궁이 뻑뻑한 신음을 내면서 금방이라도 큰일을 낼 것처럼 기를 응축하고 있었다.
마침 그의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날렵하게 내려섰다.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신호를 받았습니다.”
천무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화살촉으로 소공마의 심장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