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사방이 적이다
뽀드득. 뽀드득.
묵천악이 눈길을 밟으면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산기슭을 따라 묵천악의 발자국이 하얀 눈밭 위에 길게 이어졌다.
어느 정도 걸어간 묵천악이 돌아서서는 일장을 뻗어내며 장풍을 쏘았다.
파앙!
후우우우우우웅!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눈밭을 한 차례 휘저었다.
그 바람에 눈길 위로 난 발자국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다시 하얀 눈에 덮였다.
“쳇, 귀찮군.”
지금쯤이면 무림맹에서 기를 쓰고 자신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하나 자신이 누군가?
자신이야말로 무림맹의 구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맹주였다.
천라단의 반응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특히 이렇게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이동이 쉽지 않다.
가는 곳마다 흔적이 남을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한 번씩 돌아서서 흔적을 말끔히 지워줘야 한다.
묵천악이 고개를 들고 눈앞의 사당을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사당.
지붕이 내려앉아서 천장이 훤하다.
벽도 허물어져 있고, 문짝도 비스듬히 기울어서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다.
굳이 안으로 들어가 볼 것도 없다.
폭약이라도 터진 것처럼 휑한 실내가 밖에서도 훤히 보이니까.
묵천악은 눈살을 여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안 온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이 자신을 속인 것일까?
만약 속인 거라면 굳이 속일 이유가 있을까?
무엇을 위해서?
모르겠다.
하지만 무림공적 일 호가 되고 나니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의심스럽다.
특히 마교는 원래 믿을 게 못 되는 부류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지금 의탁할 곳은 마교밖에 없다.
맹에서 자신에게 충성하던 자들?
묵천악은 무심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충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볍게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권력을 잃은 자에게 충성이라?
백무극처럼 세뇌를 시켜도 고장이 날 때가 있다.
한데 머리가 있고, 실리를 따질 줄 아는 것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어쩔 수 없다.
마교의 힘을 빌릴 수밖에.
묵천악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왔다!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은 모습을 드러내라!”
고요하다.
휘이이이잉.
찬바람만이 사당 앞을 휩쓸며 지나간다.
묵천악은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공력을 운기하면 되기에 딱히 추위를 타진 않았다.
그럼에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최근 사흘간 그는 몸보다 마음이 추웠던 것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
하늘이 자신을 버린 엿 같은 기분.
그것이 자신을 너무나 작게 만들고 있었다.
묵천악이 다시 소리쳤다.
“약속하지 않았나! 나도 약속하지! 나를 돕는다면 너희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어서 나와!”
역시나 대답이 없다.
묵천악이 눈살을 잔뜩 구기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묘가 자신을 속인 걸까?
아니면 백묘가 윗선을 설득하지 못한 것일까?
마치 세상 전체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다.
표출하기도 힘든 울분이 가슴 속에 차오른다.
그때였다.
삐리리리.
구슬픈 퉁소 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묵천악이 흠칫거리고는 휙 돌아섰다.
하지만 퉁소 소리는 마치 육합전성처럼 어디에서 울리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사방에서 동시에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삐리리리리.
구슬픈 가락이 계속 이어진다.
처음에는 잠깐 주의를 집중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듣다 보니 점점 빠져들어 감정이 동한다.
“누군가? 연주 실력이 제법이구나.”
묵천악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에게 거친 말을 뱉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들려오는 음율이 마치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착 가라앉고 있었다.
삐리리리.
대답 대신 퉁소 소리가 이어진다.
묵천악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대답을 듣고 싶다기보다는 퉁소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싶었다.
취한다.
음악에 취한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울컥 감정이 치민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살면서 지금처럼 감성적인 적이 있었던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모든 시간 최선을 다했네. 내 인생을 허투루 쓴 적이 없지.”
삐리리리리.
묵천악의 독백을 달래주듯 부드러운 음율이 감싼다.
마침내 묵천악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느샌가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뺨이 축축하다.
희뿌연 시야 너머로 나무 사이로 한 여인이 나타났다.
퉁소를 부는 여인이다.
묵천악이 허망한 눈길로 여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대였군. 퉁소는 언제부터 배운 것인가?”
삐리리리.
“그렇군. 자네의 퉁소 소리는 꽤 듣기가 좋아.”
묵천악이 눈을 감았다.
내리쬐는 햇살이 그의 심신을 달래주고 있었다. 이따금 스치는 바람은 시원한 느낌이 든다.
감미로운 음율과 함께 세상이 변했다.
갑자기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이대로 잠들고만 싶다. 추위도 배고픔도 잊은 채로.
“잠시…… 쉬었다가…… 얘기하세.”
묵천악이 희미한 음성을 흘리고는 앉은 자세로 눈을 감았다.
그후로도 구슬픈 퉁소 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 * *
까마득히 묵천악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언덕.
그곳에 진수성찬을 차려두고 술을 마시던 소공마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여기가 명당이네.”
“소공마도 참. 짓궂어요.”
옆에 나란히 앉은 백묘가 눈을 곱게 흘겼다.
소공마가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돌아보았다.
“뭐가 짓궂은데?”
“곧 죽을 사람에게 너무 희망을 주잖아요.”
“희망이 나쁜 건가?”
“좋은 거죠.”
“그런데 왜?”
“으음. 그래도 죽을 거니까요.”
“그러니까 선물이지. 게다가 나는 마지막 만찬 대신 생애 마지막 안식을 준 셈이야. 나중에 죽어서도 고마워해야지.”
“하여튼 속을 알 수 없는 분.”
“자자, 어차피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를 두고 떠들 말도 없잖아? 저 쓰레기가 어떻게 소각되는지 지켜보자고.”
“호호. 그래도 한때 본 교를 살려준 사람인데 매정하시네요.”
“본 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이익을 위해서였겠지.”
“그런데 정말 남궁천과 대화해 보시려고요?”
“안 될 것도 없잖아?”
“맹주는 남궁검이잖아요.”
“모든 건 그 아이가 설치기 시작할 때부터 변했어. 내가 볼 때 열쇠를 쥔 자는 남궁천이야. 대화를 해봐야지.”
“부디 우리 뇌물이 통했으면 좋겠네요.”
“에헤이, 뇌물이 아니라 선물.”
“호호. 맹주는 참 다양하게 불리네요. 쓰레기였다가 뇌물이었다가 선물까지.”
“하하. 그럼 우린 쓰레기를 남궁천에게 선물한 셈인가?”
“그러게요.”
두 사람이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소공마가 젓가락으로 전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도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니까. 남궁천이 앞으로 본 교를 어찌 상대할 생각인지 떠볼 겸.”
“쓰레기 소각하는 모습 구경도 할 겸.”
“그렇지.”
백묘가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음마의 음공은 정말 대단하군요.”
“대단하지. 음마의 자장가를 들으면 불면증이 있는 나도 반각 이내로 잠든다니까.”
“어? 초대 손님이 온 것 같네요. 정말 빨리 왔군요.”
“그렇군. 한번 지켜보자고.”
말을 마친 소공마가 안력을 키워서 먼발치의 묵천악을 내려다보았다.
* * *
“이쪽.”
남궁천이 추혈검을 보며 가볍게 발을 놀렸다.
샤샤샥!
그가 나무숲을 헤치며 앞으로 쭉쭉 뻗어가자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남궁천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도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천라단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망을 펼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고 나니 저만치 너른 공터가 보였다. 그곳에는 부서진 사당이 있었다.
그리고…….
“저게 뭐죠?”
손우곤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물었다.
사당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앞에는 마치 제물처럼 묵천악이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눈밭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무림맹에 남기는 선물
남궁천이 손을 들어 올리자 뒤를 따르던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곧이어 수신호를 보내자 숲속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여기서 대기. 나 혼자 가보지.”
“존명!”
각 대주들의 대답을 들은 남궁천이 너른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운명의 시간이었다.
* * *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에 묵천악은 흠칫거리고는 눈을 떴다.
구름이 끼어 잔뜩 낮아진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분명 맑은 하늘이었는데 어느새 구름이 끼어서 금방이라도 눈이든 비든 뿌려댈 것만 같았다.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위기를 직감한 묵천악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팟!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네놈은…….”
“지금 잠이 옵니까?”
남궁천이 씨익 웃으면서 묻는다.
묵천악이 눈자위를 파르르 떨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당 앞에는 어울리지 않게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잠들기 전이 떠오른다.
아름다웠던 여인. 그보다 더 아름다웠던 퉁소 소리.
“허허! 허허허!”
공허하고 허탈한 웃음이 허공을 채운다.
또 속았다. 이번에도 이용당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은 이런 기분인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간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인간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뿐이다.
때마침 하늘에서 다시 싸락눈을 뿌린다. 좁쌀 같은 눈송이가 떨어지면서 안면에 부딪힌다.
남궁천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중얼거렸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진천랑.”
“말하시오.”
“우린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묵천악은 피식 웃었다.
그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막상 인정하고 나니 두려움과 고독은 사라진 듯했다.
묵천악이 묵묵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혹시 그것 아는가?”
“그게 뭐요?”
“자네가 죽었을 때, 사실 나는 다소 슬펐다네. 내 유일한 친구가 사라진 기분이랄까?”
“정신병자군.”
“클클클. 그럴지도 모르겠네. 평생을 자네와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는데…… 자네가 이젠 없다고 생각하니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허전하더군.”
“하면 내가 살아 돌아와서 즐거웠소?”
“그건 또 아니었지. 이미 허탈감에 익숙해졌는데, 자네가 다시 나타났으니 짜증이 나더군.”
“뭐, 엉망진창이네.”
“클클. 맞아. 자네는 항상 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그런데 이 순간, 또 자네가 나의 유일한 친구 같군.”
“나와 생각이 좀 다르군. 저승에 가면 내 아내와 아들을 만나 무릎 꿇고 사죄나 하시오.”
“저승이라…… 거긴 욕망이 없는 곳일까?”
“나도 가다 돌아와서 모르겠소.”
“만약 두 사람을 만나면 그러도록 하지. 하나 나는 어디까지나 대의를 위한 선택이었네. 자네의 기준과 달랐을 뿐.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강호의 평화를 지켰어.”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건 평화가 아니라 권력이었어. 마지막 순간까지 악착같이 포장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정도인처럼 보이는군. 어떻게든 명분을 내세우는 꼴이라니.”
묵천악이 쓴웃음을 짓더니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좋을 대로 생각하게. 다만 죽기 전에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