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사방이 적이다
“이게 뭐야, 조심 좀 하시지.”
백묘가 묵천악의 어깨에 금창약을 바르면서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묵천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꾸했다.
“잔말 말고 뽑기나 해라.”
“좀 아플 거예요.”
“빨리 뽑아!”
“네에, 네. 그럼 뽑을게요.”
백묘가 화살촉 부분을 단칼에 잘라내 버리고는 화살의 깃대를 잡았다.
묵천악이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 표정을 굳히고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쑤욱!
“끄으읍!”
화살이 뽑혀 나오자 참았던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온다.
백묘가 생글 웃더니 벌겋게 달궈진 단검을 들고 돌아왔다.
“이제부터 더 아플 텐데.”
“잔말이 많…… 끄아압!”
묵천악도 이번만큼은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치이이익!
달궈진 검신이 어깨의 상처에 닿으면서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헉,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쉰 묵천악이 얼른 바닥에 쌓인 눈 뭉치를 들어 검신으로 지진 상처 부위를 문질렀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묘는 천진한 표정으로 단검을 들어 올려 보더니 낭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오, 사람 살을 지져도 고기 굽는 냄새랑 비슷하네. 맛있는 냄새.”
“미친년…….”
묵천악이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재빨리 운기행공을 이어갔다.
백묘로부터 받은 해독제를 복용한 탓에 몸은 생각보다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긴 숨을 내뱉은 묵천악이 천천히 눈을 떴다.
높은 바위산에 오른 탓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저만치 아래로 깔린 구름뿐이었다.
극심한 고통을 넘겼더니 말로 형용하기 힘든 쓸쓸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인생무상이로군.”
“맹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요.”
백묘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했다.
묵천악이 매서운 눈길로 백묘를 노려보았다.
“망할 년. 네놈들이 감히 나를 배신해?”
“어머, 어찌 그런 서운한 말씀을. 어떤 배신자가 상처도 치료해 주고 해독제도 챙겨주나요?”
“닥쳐라! 그 기루에서 내가 네놈들을 불렀거늘! 오히려 나만 두고 쏙 빠져나가지 않았더냐!”
“맹주님, 우리도 살아야죠? 천라단을 그렇게 줄줄이 달고 오시면 어찌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그날 맹주님은 정말 민폐였다고요.”
“민, 민폐?”
묵천악이 눈썹을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이 같잖은 것들이 이제 자신을 우습게 알지 않는가?
그간 명맥을 이어온 것이 다 누구 덕인데!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지만 지금 그걸 따져서 무엇하랴.
그러는 사이 백묘가 하얀 천을 가져와서 맹주의 가슴과 어깨를 감기 시작했다.
“가만있어요. 상처 덧나지 않게 해드릴 테니.”
“흥!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사과해 봐야…….”
“호호호!”
상처를 감싸다 말고 백묘가 깔깔거리며 웃자, 묵천악이 눈을 가자미처럼 뜨고는 흘겨보았다.
“뭔 웃음이 그리 경박한가?”
“너무 웃기잖아요.”
“뭐가?”
“사과라니요. 호호. 제가 왜 맹주님께 사과를 하죠? 맹주님은 사과와 동정을 구분 못 하시나요?”
“뭐라? 동정?”
“예, 지금 맹주님을 보세요. 불쌍해 죽겠다고요. 금방 픽 쓰러져서 저승으로 건너간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잖아요. 그래도 그간 쌓은 정이 있는데 제 앞에서 죽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왠지 재수도 없을 것 같고.”
“이년이…… 정녕 뒈지고 싶어서…….”
“쉬이, 쉬. 너무 열 내지 말아요. 건강에 해롭답니다.”
묵천악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묘를 노려보다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내 비록 쫓기는 신세지만 머지않아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돕도록 해라.”
“그건 제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결정할 녀석을 데려와!”
묵천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백묘가 천을 마지막까지 잘 매듭짓고는 싱긋 웃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가야죠. 맹주님이 늘 말씀하신 것처럼.”
“그래서 지금 날 아랫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냐?”
“언제 적 맹주님이신가요? 지금은 그저 도망자에 불과하잖아요? 무림공적 일 호님.”
“이 쳐 죽일 년이…….”
“아이참, 말을 너무 예쁘지 않게 하신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선 이미 맹주님을 찾아갔었죠. 아마 그간의 정 때문이 아닐까요?”
“뭐? 언제? 날 찾아왔다고?”
“그럼요. 강가에 쓰러져서 물고기밥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부교주님이 친히 구하신 걸로 아는데.”
“뭐라? 부교주가? 설마 그럼 그 소동과 늙은이가…….”
“기억하시는군요. 치매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런 개 같은 새끼들! 그럼 너희들이 두 번씩이나 날 맹에 팔아넘겼단 말이더냐!”
묵천악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백묘가 다시 깔깔 웃었다.
“맹주를 맹에 돌려보내는 건데 팔아넘겼다고 하니 너무 웃기네요.”
“닥쳐라! 역시 그 늙은이가 부교주였구나!”
“이런, 감이 많이 떨어지셨네요, 우리 맹주님.”
“하면…… 소동이?”
“네, 그 늙은이는 교인이긴 하지만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노인이죠.”
“그럼 소동은…….”
“반로환동하신 부교주님이시고요.”
“……!”
묵천악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마교 부교주가 반로환동을 했던 건가?
거기까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마교는 재활용하는 쓰레기 같은 집단이었으니까.
필요할 때 한 번씩 꺼내 쓰는 녀석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한데 이것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랐다면 자신이 진맥을 해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게다가 함께 있던 노인은 그저 평범한 이였다니…….
“제대로 날 가지고 놀았군.”
“가지고 놀다뇨? 부교주님이 하시는 일을 그렇게 폄하하지 말아주세요.”
“허! 그럼 너희 부교주가 날 가지고 논 게 아니라면 무엇이더냐?”
“부교주님은 그저 맹주님을 검증해 보신 거죠.”
“검증이라?”
“재활용이 될 만한지, 아니면 그저 버려야 할 쓰레기인지.”
“이년이!”
파밧! 쉬이이익!
급기야 분을 참지 못한 묵천악이 빛살처럼 날아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가 백묘의 가느다란 목에 얹혔다.
하나 그는 더 이상 손가락을 까딱할 수 없었다.
어느새 백묘의 하얀 쥘부채가 활짝 펼쳐진 채로 목젖에 닿았기에.
누구 하나라도 손에 힘을 실었다간 사달이 나리라.
묵천악이 콧잔등을 씰룩였다.
“건방진…….”
“아직도 맹주 놀이에 취해 계신 것 같군요.”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지금은 비록…….”
“예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말 보단 결과를 가져오라고. 결과 나오면 얘기하시죠.”
“이익……!”
묵천악이 이를 빠드득 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다.
지금은 현실을 자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은 현재 맹주가 아니다.
온 세상이 외면하는 무림공적 일 호다.
묵천악이 손아귀에 힘을 풀고 물러나자, 백묘도 부채를 접어 갈무리했다.
묵천악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쥐어짜는 것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와주게…….”
“뭐라고요?”
“도와…… 주게.”
“뭘요?”
“날…… 도와달란 말이야. 나를!”
“부탁하는 자세의 기본이 안 되어 있으시네요. 늘 높은 자리에서 아래만 내려다보셔서 그런가?”
“뭘 바라는가?”
“글쎄요. 진정성?”
“날 치료해 주지 않았나? 어째서 병 주고 약 주는 것인가?”
“호호.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니라, 약 주고 병 주는 거죠.”
말을 마친 백묘가 뭐가 그리 웃긴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깔깔거렸다. 이윽고 그녀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하신다면 생각해 볼게요. 물론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고, 위에 되도록 좋게 말해 본다는 뜻이죠.”
“백묘오오오!”
“아이, 저 귀 안 먹었어요. 그럼 거절하신 것으로 알고.”
백묘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묵천악은 멀어져 가는 백묘를 보며 뺨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릎을 꿇으라니.
지금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나?
백도 무림의 하늘인 자신에게?
강호 그 자체인 자신에게?
묵천악의 무릎이 달달 떨린다.
백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묵천악이 주먹을 콱 말아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털썩!
묵천악이 무릎을 꿇었다.
치욕은 짧으리라.
이 치욕을 견디고 나면 기나긴 복수의 시간이 주어지리라.
그땐 마교도 빼먹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와주시게.”
백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낭랑한 목소리는 들려왔다.
“호호호! 이 모습을 교주님이 보셨어야 하는 건데. 내일까지 영산의 부서진 사당으로 오세요. 단, 꼬리를 달고 오시면 저희들도 도와드릴 수가 없답니다.”
“알겠네.”
묵천악의 무거운 대답을 끝으로 바위산 위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휘이이잉.
칼바람만이 매섭게 불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호법당주 안천길과 천우당주 유백랑이 만났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백랑이었다.
“어찌 되고 있습니까?”
“적랑단이 오늘 아침 출정식을 가진다고 하오.”
“이제야?”
유백랑의 말에 안천길이 피식 웃었다.
“간이 배 밖에 나온 게지. 적랑단주가 되더니 배짱이 넘치다 못해 무모한 지경에 이르렀소. 사흘의 시간에 잡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마지막인 오늘에서야 적랑단을 이끌고 나가다니.”
“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이미 천라지망도 벗어난 것으로 아는데요.”
“나도 모르겠소. 천라단이 놓치고, 질풍대가 아직 꼬리도 밟지 못했는데 저리 적랑단을 이끌고 간다는 건…….”
“제법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기회가 아니겠소? 오늘 밤 자정까지요. 그때까지 맹주님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맹주의 퇴진을 요구할 수 있겠군요.”
“그렇소. 적랑단주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우리가 뜻을 모은다면 남궁검 가주가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까지 도모할 수도 있을 거요.”
“동조할 사람을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안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 * *
대연무장에 적랑단원들이 모였다.
남궁천이 단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무림공적 일 호를 추격할 것이다. 내가 앞장서서 이끌 테니 모두 나를 따르도록 한다.”
“존명!”
적랑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마침 대연무장으로 들어선 패력궁 천무류가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출정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한데 날 보자고 한 이유는?”
“선배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맹주를 사로잡는 일과 관련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남궁천의 대답에 천무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들어보지.”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맹주, 마침내 마지막 날이 밝았소. 지금 당신 심정은 어떤지 묻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