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 천라지망
“제보자가 사라졌다고?”
팽수혁이 눈을 부라리자 적랑단원이 어깨를 움츠리고는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현상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얌전히 있을 줄 알았는데…….”
“이 멍청한! 잘 지켜보라고 일부러 보냈더니!”
“죄송합니다.”
적랑단원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로서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질풍대로부터 인계받은 제보자는 노인과 아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적랑단원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포상금은 얼마나 되는 건지, 맹주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맹주가 달아났는데도 포상금을 받을 수 있는지, 혹여나 맹주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는데 지켜줄 수는 있는지 등.
정말이지 뜻밖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어서 한껏 들뜬 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한데 남궁천과 팽수혁이 도착하기 직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아이의 천진한 표정에 속아서 경계를 게을리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큰돈을 받는다며 좋아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사라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팽수혁이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단주, 어쩌지?”
“뭐, 어쩔 수 없지. 이미 사라진 사람들인데. 인상착의는 어땠나?”
“노인과 아이였습니다.”
“무공은?”
“둘 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팽수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평범한 양민이었나 본데?”
“글쎄. 평범한 양민이 묵천악을 옮겼다는 건가? 아무리 중독 상태인 데다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데.”
“그럼?”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무공을 익혔을 거야. 게다가 그 노인과 아이를 마을 사람들도 모른다며?”
적랑단원이 깍듯한 자세로 대꾸했다.
“예, 마을 주민들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두어 명 정도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들 모두 한통속일 가능성이 크군.”
“하지만 정말 아무런 공력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다다랐을 수도 있지.”
“허얼. 그럼 보통이 아닌데. 갑자기 판이 커지는 느낌이군.”
팽수혁의 반응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쫓는 건 좀도둑 같은 게 아냐. 수십 년간 천하를 호령했던 맹주야. 맹주의 무공 수위를 떠나서 그만한 권력을 가진 자라는 거지. 그 정도 판이 커지는 건 당연한 거다.”
“그래도 반박귀진이라니…….”
반박귀진은 무공의 성취가 지극하여 오히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평범해 보이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묵천악으로서도 가려낼 수 없을 만큼 고절한 무인이라는 뜻.
팽수혁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며 물었다.
“그 대단한 분이 누구라고 생각해?”
“이 시점에서 접선을 생각하는 곳은 마교밖에 더 있겠나?”
“그런데 마교에서 돕지는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넘겼다는 말이지?”
“일단 떠보겠다는 거겠지.”
“뭘?”
“우리 재량을. 그리고 묵천악의 뒷심을.”
“허! 이것들이 콩고물 주워 먹다가 이젠 주인을 물려고 한단 말이군.”
“애초에 호랑이를 고양이쯤으로 여기고 키운 게 잘못이지.”
“그건 그러네.”
팽수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꾸하는데, 일순 남궁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팽수혁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나직이 물었다.
“왜 그래?”
“그 호랑이가 아직도 어슬렁거리고 있네.”
“응? 어디?”
팽수혁이 미간을 푹 구기고는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표나게 둘러보면 바로 들키잖아, 멍청아.”
“으씨, 멍청하다니! 이젠 단주가 됐다고 대놓고 갈구는 거냐?”
“쳇, 확실히 눈치는 빨라진 것 같단 말이지.”
“이봐! 이봐! 또!”
남궁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이, 먼발치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소공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제법이군. 남궁천이라. 확실히 흥미로운 녀석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천천히 돌아서다가 멈칫거렸다.
“으음?”
왠지 끈적하게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뒤를 돌아본 소공마가 일순 눈을 부릅떴다.
“……!”
쉬이이이잇!
어느새 남궁천이 전각 지붕을 밟아가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호오!”
소공마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지붕의 기왓장을 연거푸 걷어찼다.
타타타탕!
쉬쉬쉬쉭!
기왓장이 허공을 가르며 남궁천에게 날아갔다.
카차차창!
단숨에 벽라검을 휘둘러 기왓장을 가른 남궁천이 곧장 소공마의 품으로 짓쳐들었다.
“과연 놀랍군!”
남궁천의 왼 손바닥을 향해 소공마가 동시에 일장을 뻗어냈다.
콰아아아앙!
응축된 공기가 터지듯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사방으로 기파가 터져 나갔다.
쿠콰콰콰콰!
기왓장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면서 두 사람의 기운이 폭발했다.
촤르르르륵!
촤촤르르륵!
남궁천과 소공마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면서 지붕 위에 버티고 섰다.
마주 본 전각 지붕에 각각 멈춰 선 두 사람.
휘이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싸락눈이 휘날렸다.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소공마를 보았다.
“호랑이 새끼가 나타나셨군.”
“이야아. 형, 멋지다!”
소공마가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자, 남궁천이 싸늘하게 웃었다.
“징그러운 소리는 그만하고.”
“헉, 너무해! 나 같은 어린애한테 징그럽다니!”
“어린애라. 그 나이에 반박귀진이라면 역시 반로환동인가?”
“와아, 멋진데 겁나 똑똑하기까지 하네.”
“어디 그뿐일까? 이 형은 무섭기까지 하단다. 애새끼야.”
파앙!
순간 남궁천이 지붕을 박차고 다시 쏜살같이 날아갔다.
쉬리리리릭!
소공마도 지붕을 차면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날아올랐다.
따다다다당!
두 사람의 검신이 부딪치면서 불꽃을 요란하게 터뜨렸다.
까앙!
마지막으로 검신이 부딪치자 남궁천과 소공마가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소공마가 이번에도 기왓장을 연이어 걷어찼다.
타타타타타탕!
카차차차차창!
남궁천이 벽라검을 바람개비처럼 휘돌리면서 날아드는 기왓장을 쳐냈다.
기왓장이 마치 폭발하듯 터져 나가자 주변이 파편과 먼지로 자욱해졌다.
“와아!”
소공마가 감탄하는 사이, 먼지를 뚫으면서 남궁천이 불쑥 나타났다.
제일 먼저 벽라검이 흩날리듯 떨어져 내렸다.
‘이건……!’
소공마의 눈동자가 다시 커졌다.
매화가 흩날린다.
심지어 매화 향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꽃잎 하나하나가 생동하며 눈발과 어우러진다.
‘초견파공안을 직접 견식하게 될 줄이야.’
소공마는 내심 감탄하면서 춤을 추듯 뒤로 물러났다.
파파파파파!
남궁천 역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공마의 실력으로 짐작해 보자면 역시 반로환동한 무인이 분명하리라. 그러니 묵천악 또한 반박귀진에 이른 소공마의 경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속은 것일 테고.
콰차앙!
소공마의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벽라검이 그대로 지붕에 내려꽂히면서 파편이 튀었다.
타타앙!
쌍장을 펴내며 날아드는 파편을 쳐낸 소공마가 남궁천의 심장을 향해 짓쳐들었다.
쉬이이이익!
일순간 남궁천이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면서 소공마의 검신을 쳐냈다.
쉬까앙!
불꽃이 일어나면서 소공마가 휘청 물러났다.
창졸지간 남궁천이 소공마의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휘둘러 갔다.
단검은 추혈검이었다.
묵천악의 피를 머금은 상태였기에 이 상황에서 소공마를 베면 추혈검은 소공마만 추적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도 감안하여 휘두른 것이다.
묵천악을 놓칠지언정 멀리 내다보면 소공마의 피를 먹여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소공마는 얼른 허리를 젖혀 추혈검을 피했다. 동시에 발끝을 들어 올려 추혈검을 걷어찼다.
탕!
휘리리릭!
손을 떠난 추혈검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칫!”
남궁천이 혀를 차고는 하늘로 솟구쳐 올라 추혈검을 다시 낚아챘다.
촤르르륵!
지붕에 다시 착지한 남궁천이 왼발로 반원을 그리며 미끄러졌다.
“후우.”
숨을 내쉬자 허연 입김이 훅 뿜어져 나왔다.
하마터면 추혈검을 놓칠 뻔했다.
소공마가 정말 아이처럼 박수를 짝짝 쳤다.
“와아, 멋있어! 그런데 그 단검이 꽤 중요한가 봐?”
“애가 가지고 놀 물건은 아니지.”
“하하! 맞아. 검은 위험한 거니까. 그런데 그 검에서 나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네. 왠지 베이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한마디로 마검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애새끼가 예민한 편이구나. 그럼 키가 안 크는데.”
“괜찮아. 난 작고 귀여운 게 좋으니까.”
“작고 징그러워서 문제지.”
“아이참, 형은 아까부터 너무 상처받도록 말하네.”
“닥치고 포상금 받아야지? 얌전히 따라가자꾸나.”
“아아, 그 포상금 이제 필요 없어졌어.”
“왜?”
“이미 충분히 받은 셈 치려고. 형 덕분에 너무 재미있었거든.”
“날 따라가면 더 재미있게 놀아주마.”
“형도 나랑 노는 게 재미있구나? 나도 아쉽지만 다음에.”
“어이, 한창 놀 나이에 벌써 돌아가면 서운하잖아. 빌어먹을 꼬마야.”
“에이, 형은 말 좀 예쁘게 하지. 아무튼 난 이제 가봐야겠어. 너무 늦게 가면 혼나거든. 그럼 다음에 또 봐!”
팟!
순간 소공마가 몸을 튕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서너 채의 전각을 건너뛰며 멀어져 갔다.
남궁천이 바닥을 차고 뒤쫓으려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망가는 수준이 내 전성기 때 같네.”
확실히 상대는 예상 밖의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 팽수혁을 비롯한 적랑단 대주들이 속속 도착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잡았어?”
“놓친 거야?”
“뭐 하는 놈이었어?”
“네가 놓치는 놈도 있어?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우후죽순 쏟아지는 질문에 남궁천이 이맛살을 푹 구겼다.
“지각한 주제에 말들이 많다.”
“말을 해주고 달려 나가야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뛰쳐나가니 따라오기도 급급했다고.”
팽수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꾸했다.
남궁천이 추혈검을 품에 갈무리하며 대꾸했다.
“천뇌당에 알려. 마교 쪽으로 반로환동한 고수가 있는지. 최소 장로나 간부 이상이야.”
“알았어.”
주로 조직 간의 조력을 주 임무로 삼는 윤종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남궁천이 소공마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 또 보겠지.’
* * *
“헉, 헉, 헉……!”
묵천악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산을 기어올랐다.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암벽 위로 올라선 묵천악이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워서는 하늘을 보았다.
“끄으으으……!”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더니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거기에 길도 없는 숲을 가로지르고, 암벽을 무작정 기어올랐더니 손톱이 빠지고 살갗이 부르텄다.
화살이 꽂힌 어깨는 상처가 덧나기 시작해서 연신 욱신거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묵천악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원망했다.
어째서 이 지경이 된 건가?
강호 평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은 늘 필요악인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화가 잔뜩 난 묵천악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은 필수불가결이 아닌가!”
그때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느꼈지만 묵천악은 돌아볼 힘도 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말간 얼굴이 보인다.
생글거리며 예쁜 웃음을 짓는 그녀는 바로 백묘였다.
“그 작은 희생이 이번엔…… 맹주님인가 봐요.”
묵천악이 눈만 끔뻑이다 입을 열었다.
“망할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