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천라지망
묵천악의 손아귀에 붙들린 노인이 허공에 매달린 채로 몸부림을 쳤다.
“커억, 컥! 컥!”
“감히…… 날 속여?”
“왜…… 이게 무슨……! 컥!”
노인은 고통에 겨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연신 몸부림을 쳤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듯했다.
화들짝 놀란 소동이 달려와선 묵천악의 허리를 마구 손으로 때렸다.
“놔! 놔줘! 이 나쁜 놈아! 우리 할부지한테 왜 그래!”
“갈! 네놈들이 감히 날 속이려고 들다니!”
노인이 허옇게 질려가는 얼굴로 간신히 목소리를 흘려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컥……!”
“오냐, 죽기 전에 변명할 기회는 주마.”
휘리리릭, 탁탁!
묵천악이 소동의 팔을 잡고 휘돌리더니 순식간에 손을 뻗어 마혈을 점해 버렸다.
“어……?”
소동이 그대로 돌처럼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곧이어 묵천악은 노인의 혈도마저 점해 버렸다.
탁탁탁!
“큽……!”
노인 역시 석상처럼 굳어서 빳빳하게 서 있자, 그제야 묵천악이 손을 놓고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쿨럭, 쿠웨에엑!”
갑자기 공력을 끌어 올렸더니 기혈이 제대로 꼬인 모양이었다. 격한 기침과 함께 탁혈이 터져 나왔다.
“제길!”
욕지거리를 뱉은 묵천악이 소매로 입가를 훔쳐내고는 노인과 소동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소동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묵천악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흥!”
묵천악이 콧방귀를 뀌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불쑥 뻗었다.
쉬리리리릭, 탁!
마침 수레 한쪽에 잡동사니 아래에 끼워져 있던 종이가 바람에 나부끼듯 날아와서는 묵천악의 손에 사로잡혔다.
그건 바로 무림맹에서 배포한 것이었다.
달아난 맹주 묵천악을 신고한 자에게 두둑한 포상금을 주겠다고 써 있었다.
묵천악이 이맛살을 팍 구기고는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 어디 변명을 해보실까?”
“콜록, 콜록……! 그, 그게 뭔데 그러슈? 쿨럭, 쿨럭!”
“할부지…….”
노인이 연신 기침을 해대며 대꾸하자, 소동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묵천악을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다.
묵천악이 냉소를 짓고는 종이를 흔들었다.
“내가 물었을 텐데. 무림맹에서 내건 방을 보지 못했냐고.”
“그게 그거였소?”
“하면 이게 방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누가 봐도 무림맹에서 내건 게 아니더냐!”
묵천악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자, 노인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린 그게 뭔지도 몰랐소. 손자 녀석이 종이를 접으며 놀고 싶다고 해서 한 장 가져왔을 뿐이오.”
“흥!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여기 버젓이 적힌 내용을 보면 누구라도……!”
“글쎄, 글을 읽을 줄 알아야 뭔 내용인지 알 것 아니오!”
“글을 모른다……?”
“허참, 어디 높으신 양반인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촌부들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소? 그럼 여기서 이 고생하며 살지 않겠지!”
“흐음. 정녕 이 글이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그렇소!”
“허튼소리!”
묵천악이 발끈해서 한 걸음 내딛자, 소동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할부지! 이 나쁜 놈아! 할부지 때리지 마!”
“닥쳐라, 꼬마야!”
“이익……!”
묵천악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소동을 노려보면서 성큼성큼 다가섰다. 묵천악이 손을 휙 들어 올리자, 노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멈추시오! 차라리 날 죽이시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날 죽이시오!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단 말이오!”
묵천악이 그대로 멈춰 서서는 노인을 다시 노려보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그렇소! 나는 그저 죽어가는 자를 두고 볼 수 없어서 수레에 실어 옮겼을 뿐이오! 어찌 이리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이오!”
묵천악이 냉랭한 표정으로 노인과 소동을 번갈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지. 부교주가 소동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을. 아마 반로환동을 했다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 아이는 그저 이 시골에 처박혀서 세상 구경도 못 해본 아이요! 아까 마을에서 만난 이웃의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셨소?”
“닥쳐라! 확인을 해보면 알 일.”
묵천악이 휙 돌아서더니 노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어 노인의 손목을 진맥했다.
“이게 무슨…….”
“조용.”
“……!”
묵천악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손 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다음 순간 그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인의 혈맥에서는 그 어떠한 공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정말 일반 양민이란 말인가?’
때마침 지켜보던 소동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우리 할부지를 때리면 맹주님한테 다 이를 거야! 내가 맹주님한테 일러서 혼내주라고 할 거야!”
“……뭐라고 했느냐?”
묵천악이 돌아서서 소동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소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소리쳤다.
“묵천악 맹주님은 공명정대하셔서 너 같은 악당을 처벌하시는 분이야! 내가 반드시 널 처벌해 달라고 이를 거야!”
“허!”
묵천악이 헛웃음을 짓자, 노인이 소동을 타일렀다.
“그만 얘기하거라. 보시오.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오. 대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저지르려거든 이 늙은이만 손 보시오. 아직 살날이 창창한 아이 아니오?”
“…….”
묵천악이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소동의 손목을 낚아챘다.
역시나 공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진맥을 했을 뿐인데도 노인이 기겁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보시오! 어찌 아이에게 손을 쓰려고 하시오! 차라리 나만 손 보란 말이오! 그 아이는 아무 죄도 없소! 이보시오!”
“시끄럽다.”
묵천악이 차갑게 말을 뱉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소동은 서럽게 울면서 중얼거렸다.
“맹주님께 다 말해 버릴 거야. 으흐흑!”
“꼬마야.”
묵천악이 소동을 부르자, 울음을 삼킨 소동이 가까스로 답했다.
“왜, 왜 불러?”
“네가 믿는 그 맹주가 날 찾아서 처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맹주님은 강호를 굽어보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면 당연히 도와주실 거야.”
피식.
묵천악이 맥 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욱씬거리는 어깨를 매만지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 힘도 없는 양민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니.
그래도 지금껏 온갖 음모를 꾸미면서도 양민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건만.
그것은 그로서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묵천악은 허탈한 눈길로 잔뜩 겁 먹은 노인과 울고 있는 소동을 보았다.
그가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손에 든 종이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지풍을 날려 두 사람의 혈을 풀어주었다.
툭툭툭!
“으허엉! 할부지!”
“아이고, 내 새끼!”
두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엉엉 울었다.
묵천악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수레에 걸터앉았다.
“미안하게 됐소. 내가 오해했소.”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이오.”
노인은 은근히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안도하는 듯했다.
묵천악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을 붙들며 말했다.
“그 의원은 정말 이 마을에서만 지낸 자요?”
“그렇소.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뭐겠소?”
“죽어간다라…….”
묵천악이 다시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자신은 죽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가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가서 중독 증세도 있다고 말하시오. 서둘러 주시오. 잠시 쉬고 있겠소.”
“알, 알겠소.”
“아이는 두고 가시오. 만약 허튼 생각이라도 하면…….”
“걱정하지 마시오. 손자 앞에서 부끄러운 할아비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자 소동이 얼른 노인의 팔에 매달렸다.
“할부지, 같이 가요. 무서워요.”
“이젠 괜찮을 게다. 아무래도 저 어르신이 오해를 한 모양이니. 할아비가 후딱 다녀올 테니 손님을 방으로 모시거라.”
“네…… 할아버지.”
소동이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사이, 노인이 묵천악을 한 번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약조해 주시오. 아이는 절대로…….”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그럼.”
노인이 그제야 돌아서서 마굿간을 나가자, 묵천악은 그대로 수레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일어나야 하는데…… 움직임이 쉽지 않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 * *
“헉!”
잠에서 깬 묵천악이 눈을 부릅떴다.
낯선 천장.
벌써 낯선 환경에서 눈을 뜬 게 몇 번째인가?
그래도 이번엔 곧장 현실을 자각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낡은 방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닫힌 창틈 사이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얘야. 어디에 있느냐?”
대답이 없다.
일순 묵천악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래, 소동과 노인을 의심했다.
한데 두 사람에게서 공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 생각하니 왜 그리 쉽게 넘어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심신이 지쳤기 때문이리라.
순간 밖에서 기척을 느낀 묵천악이 얼른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곧이어 밖을 본 묵천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찢어 죽일……!’
안마당에는 노인이 돌아와 있었는데, 그 곁으로는 소동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질풍대주!’
노인이 종이를 들고 열심히 이쪽 방을 가리키며 질풍대주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기어이 포상금을 노리고 날 넘긴 게로구나!’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퇴로가 없다.
역시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다.
어째서 마음이 약해졌던가?
심신이 지쳐 있을수록 더욱 긴장해야 하건만!
이를 꽉 깨물은 묵천악이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어차피 가만히 기다리면 잡히고 만다.
그럴 바엔 먼저 움직이는 게 나으리라.
파밧!
콰차앙!
순간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날아간 묵천악이 경공을 펼치며 순식간에 지붕 위로 솟구쳐 올랐다.
“엇! 잡아랏!”
“무림공적이다!”
질풍대주의 명에 이어 질풍대원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뒤를 쫓아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동이 할아버지와 둘만 남게 되자 피식 웃었다.
“재미있네요. 이렇게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도.”
* * *
“정말 안 가도 돼?”
팽수혁이 실내를 서성이다가 물었다.
남궁천이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지막 날 움직일 거라니까.”
“그만큼 자신 있단 말이지?”
“그래, 도망자의 심리는 내가 잘 아니까.”
“누가 보면 일평생 도망만 다닌 녀석인 줄 알겠네.”
팽수혁의 말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그 말 어디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기에.
남궁천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제보가 있었다고?”
“그래. 지금 질풍대가 추격하고 있다는군. 뭐, 네 말대로 아주 느슨하게.”
“그래, 그렇게 시달려야지. 지금쯤은 세상 모든 인간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온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처절히 느끼게 될 거다. 흔들리는 꽃잎조차 의심해야 할 상황이 될 테지. 맹주 인생에서 가장 길고 잔혹한 사흘이 될 거다.”
“하여튼 성격이 아주 못됐다니까.”
팽수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흐뭇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독 안에 든 쥐가 퇴로를 찾으려고 발악하다 보면 숨겨둔 발톱이 드러나는 법이지. 이틀밖에 안 남은 이 소중한 시간을 즐겨보자고.”
“그래서 어떻게 즐길 건데?”
“우선 제보자에게 현상금을 줘야지. 제보자부터 만나보러 갈까?”
남궁천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