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천라지망
남궁천의 호언장담으로 묵천악을 사로잡는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 문제가 남아 있었다.
무림맹은 강호 최대 집단이다. 한데 돌발적인 사고로 하루아침에 수장이 바뀌었으니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지금껏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천뇌당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총관은 어찌하실 생각인지요?”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
남궁검이 차분한 어조로 묻자, 당주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궁검이 서슬 퍼런 표정으로 호통을 쳤으니, 괜히 섣불리 나서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다.
수맹당주가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쨌거나 묵천악의 과오를 알고도 묵묵히 따랐던 자입니다.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남궁검이 시선을 돌려 정검당주를 바라보았다.
“정검당주의 생각은?”
정검당은 원래 맹 내의 모든 형벌을 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이다.
실제로 총관에 대한 징계 수위도 정검당주의 혀 끝에 달려 있는 셈이기도 했다.
“엄벌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 지금으로서는 신중해서 나쁠 것이 없지요.”
“이유는?”
“전임 맹주의 과오가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입니다. 전임 맹주에게 충성했던 자들은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런 자들이 지금쯤 눈치를 보고 있겠지요. 이들을 모두 엄벌로 다스리게 된다면 필시 부작용이 따를 것입니다. 맹주의 자리는 강호 정점이라 할 수 있으나, 결코 통솔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통치하는 자리입니다.”
확실히 정검당주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내뱉은 발언은 귀담아 둘 필요가 있었다.
공포 정치로는 그 한계가 있으리라.
어느 정도 숨통을 틔워야 앞으로 맹을 이끌어가기도 쉬우리라.
“일리가 있군.”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몇몇 당주들도 용기를 내어 공감하는 뜻을 드러냈다.
“기실 맹주의 최측근인 총관의 입장에서는 명을 거역하거나 비밀을 발설하기에 어려운 위치에 있었을 겁니다. 바로 눈앞에서 거대 권력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쉬이 반대하기도 힘들었을 테지요. 어찌 보면 총관도 희생자일 수 있지요.”
“제 생각에는 그에게 근신 기간을 준 다음 다시 총관의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하면 인수인계를 하기에도 여러모로 장점이 있을 겁니다.”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무리 총관이 피해자라고는 하나 불의를 보고 따지지도 않았소! 한데 징계는커녕 자리를 보전해 주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그리 따지면 십당을 차지하고 앉은 우리는 어떻소? 우리는 눈 뜬 장님처럼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불의조차 모르지 않았소? 그 바람에 여기 계신 맹주님의 가문이 그토록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고. 따지면 우리도 자리에서 물러나야지요.”
“허! 적어도 우리는 그 불의에 동참하진 않았잖소?”
“그럼 총관은 과연 동참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공도 변변찮게 익힌 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만약 총관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차라리 목숨을 걸었어야지. 그게 협의고 정의지.”
“뭐든 지나고 나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쉬운 법이지요.”
당주들의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회의의 열기가 점점 더해지고 있었지만, 남궁검과 남궁천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곧 정보가 되리라.
한 사람을 처리하는 문제를 두고도 당주들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끔 해준다.
발언자의 성격과 가치관, 사상과 철학 그리고 이상까지. 심지어 무공의 수위까지 은연중에 드러나곤 한다.
한참을 지켜보던 남궁검이 철탁을 가볍게 내려쳤다.
탕.
마침 모든 당주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고는 시선을 돌렸다.
남궁검이 내려친 철탁에는 조금 전에 힘껏 내려친 탓에 손바닥 자국이 고스란히 나 있었다.
“여러분의 뜻은 잘 알았소. 의견이 분분한 것 같으니 내가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앞으로 총관은 보름간의 근신 기간을 가진 후 원래 자리로 복귀하도록 할 것이오.”
“……!”
“인수인계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전임 맹주의 과오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오. 또한 포용의 정치를 보여줌으로써 혹여 두려움을 가진 일부 인사들에게 안심을 주려는 의도도 있소. 반대 의견이 있으면 말하시오.”
“…….”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한 식경 정도만에 십당의 주인들에게 확실한 존재감을 인식시킨 남궁검이었다.
남궁검이 서늘한 표정으로 좌중을 훑으며 말했다.
“과거 나는 적랑단주를 지낸 적이 있소. 여기 있는 몇 분은 아마 나를 알고 있을 거요. 당시 묵천악은 청랑단주였소. 그때 그는 마교를 눈앞에서 고의로 놓아준 적이 있소. 물론 나는 반대하였고, 그 일로 서로 충돌이 있었지. 작은 불의 하나를 봐주면 오늘날처럼 이렇듯 큰 재앙으로 돌아오는 법이오. 앞으로는 마교와의 싸움으로 전개될 양상이 크오. 그러니 각 당의 당주들은 합심하여 맹을 잘 이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맹주님을 돕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당주들이 저마다 입을 열며 듣기 좋은 소리를 쏟아냈다.
그렇게 회의는 반 시진 정도 더 진행된 후에 끝이 났다.
남궁검과 남궁천은 맹주실로 돌아오면서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맹주실로 돌아온 후 남궁검이 탁자에 앉으며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떻더냐?”
“호법당주는 확실히 경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천우당주와 철심당주가 주의 인물이겠고요.”
“하긴. 그 세 명이 가장 눈에 띄긴 했지. 나머지는 어떻더냐?”
“정검당주도 조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약천당주가 의심스럽기도 하고요.”
“흐음. 한 번의 대면으로 그들 모두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다들 지금은 몸을 사릴 게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본성을 드러낼 터. 몇은 안고 가되, 몇은 버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게다.”
“예, 어쩌면 생각보다 긴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당주들이다.
각 당에 속한 기관들만 합해도 어지간한 문파 하나 정도의 규모가 나온다고 봐야 한다.
그런 조직 여러 곳을 하루아침에 장악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한 걸음입니다.”
* * *
달그닥…… 달그닥…….
수레가 굴러가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몸이 적당히 흔들린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차지만 춥지는 않다.
“끄음…….”
묵천악은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청명한 하늘 아래로 조각 구름이 뭉실뭉실 떠가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수레바퀴가 구르는 소리.
적당한 흔들림.
나른한 몸.
묵천악은 잠시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시야 안으로 동그랗고 작은 얼굴이 불쑥 내밀어졌다.
“어……?”
웬 아이가 묵천악을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이다 소리쳤다.
“할부지! 할부지가 눈을 떴어!”
“으응?”
망아지로 수레를 끌던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돌아보았다.
묵천악은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고는 흠칫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다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통증과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절로 비명을 터뜨렸다.
“크윽!”
“어허, 조심하시오. 아직 어깨에 화살이 꽂혀 있소.”
“끄으음.”
묵천악이 눈길을 내려 어깨에 꽂힌 화살을 보았다.
그러자 잊었던 현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렇군. 천라지망을 뚫어 도망치고 있었지.’
새삼스럽게 처지가 실감 난다.
도대체 이 거짓말 같은 현실은 언제가 되어야 익숙해지려나?
“클클클…….”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노인이 묵천악을 넌지시 보다가 물었다.
“괜찮으시오?”
“여기가 어딘가?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나? 사흘은 지났나?”
“여긴 홍안현(红安县)이올시다.”
“그런가…….”
홍안현이라니.
죽을힘을 다해 장강을 따라 헤엄쳤는데, 고작 홍안현이라니.
황강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못했구나.
씁쓸한 생각을 떠올리는데, 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사흘이 지났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어제가 정월 초하루였소.”
“고작 몇 시진 지났을 뿐인가?”
며칠은 의식을 잃은 줄 알았다.
한데 고작 몇 시진이 지났을 뿐이라니.
‘고통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흐르는구나.’
노인이 말을 잇는다.
“요즘 같은 날씨에 흠뻑 젖은 채로 강가에서 잠들면 죽기 딱 좋소. 마침 우리가 거길 지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송장이 되었을 거요. 천운으로 아시오.”
“고맙네. 한데 자네들은 아무나 이렇게 구해줘도 되는가?”
“안 될 건 뭐요?”
“내 처지를 보면 무인이라는 것을 알 텐데.”
“허참. 그럼 어떻소? 그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소? 은원관계는 당신들끼리 알아서 푸시오. 내 손자 보기에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구한 것일 뿐이외다.”
노인의 말끝에 이제 열 살 정도 되었을 것 같은 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할부지 엄청 착해요. 힘도 엄청 세요! 아마 맹주님만큼 강할 걸요?”
“그렇구나.”
묵천악이 피식 웃으며 아이를 보았다.
마침 저 멀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망아지를 몰면서 힐끔 돌아보곤 말했다.
“곧 마을이오. 화살은 내가 뽑을 수가 없어서 의원을 불러오겠소.”
“그건 안 되네!”
묵천악이 단호하게 말하자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꼴을 하고도 그냥 있으시겠다고? 에잉. 빨리 뽑아내고 소독하지 않으면 상처가 곪을 텐데.”
“그 의원은 어디에 있는 자인가?”
노인이 피식 웃었다.
“사실 의원이랄 것도 없소. 우린 아주 작은 마을에 사는데, 거기에서 그나마 어깨너머로 의술을 익힌 장 씨 영감이 봐주는 것일 뿐이오. 혹여나 소문이라도 날까 봐 걱정이걸랑 염려 마시오. 전쟁이 나도 우리 마을은 칼 한 자루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니까.”
“흐음. 혹시 맹에서 방을 붙이진 않았던가?”
“방? 무슨 방 말이오?”
노인과 아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묵천악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닐세. 나는 잠시 쉬겠네.”
묵천악이 방립을 얼굴에 덮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수레가 달그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을로 들어서자 몇몇 이들이 노인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어이구, 김씨 영감. 아침부터 부지런하시군.”
“허허,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
“으응? 그런데 수레에 누워 있는 자는 누군가?”
그러자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할부지 친구예요.”
“친구? 자네에게 친구가 있었어?”
“허허, 옛 고향 친구일세. 먼 길을 오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네.”
“그럼 아침부터 친구 마중 나간 거였어?”
“그리운 벗이 찾아온다는데 십 리 길도 달려가야지.”
“허허, 그래, 그래. 좋은 시간 보내시게.”
“고맙네.”
그렇게 수레는 계속 굴러가서 조금은 호젓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수레가 마구간으로 들어서자 귀여운 얼굴의 아이가 방립을 들어 올리고는 묵천악을 내려다보았다.
“할부지. 다 왔어요.”
“그래.”
묵천악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상처가 덧나고 있었다.
공력을 운기하면 잠시나마 편해질 수 있지만, 운기행공이 만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의원의 손길이 필요하긴 했다.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노출되는 걸 꺼리시는 것 같아 대충 둘러댔소.”
“잘했네.”
“말투를 보아하니 꽤나 높은 양반 같은데 어쩌다 그리 되셨소?”
“…….”
묵천악이 대답 대신 싸늘한 시선을 던지자, 노인이 제 입술을 툭 쳤다.
“입이 방정이지. 신경 끄시오. 나도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의원의 확실히 이 마을 사람인가?”
“그렇수다. 안심하시오. 곧 불러 드릴 테니.”
“수고가 많군. 고맙네. 이 신세는 꼭 갚도록 하지.”
노인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동에게 말했다.
“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예, 할부지. 따라오셔요.”
소동이 앞장서려는 순간이었다.
묵천악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찰나지간, 묵천악이 빛살처럼 날아가 노인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커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