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천라지망
늦은 새벽 무림맹으로 돌아온 남궁천은 걸음을 바삐 놀려 맹주실로 곧장 찾아갔다.
맹주실을 나설 채비를 갖추던 남궁검이 남궁천을 보며 물었다.
“왔느냐?”
“예, 할아버지.”
“맹주는 어찌 되었느냐?”
“장강을 통해서 천라지망을 벗어났습니다. 뭐, 곧 발각되겠지만요.”
“그렇군.”
“십당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고요?”
남궁천이 새벽같이 맹으로 돌아온 이유였다.
뭐, 이미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다만 자신의 생각보다 십당주들이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잠자리가 낯설던 참이었다. 잘됐지.”
“흐음. 생각보다 빠르네요. 반응이.”
“그런 것 같으냐?”
“예.”
“내 생각엔 그들도 이만하면 참고 참았던 거라고 본다.”
“아…….”
“갑자기 맹주가 바뀌었다. 정식으로 즉위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 않느냐? 물론, 총군사가 임시 맹주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어쨌거나 맹주는 맹주다. 십당주가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먼저 내가 불러주길 바랐을 테지.”
“그건 그렇겠네요.”
“하지만 이게 네가 바란 것 아니더냐?”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으며 묻자,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그렇긴 하죠.”
“장로원을 제외하면 최고 수뇌인사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다. 잘 살펴보거라.”
“알겠습니다.”
“그럼 가자꾸나.”
채비를 마친 남궁검이 서늘하게 식은 눈초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천뇌당의 합정관(合正館)이었다.
보통 맹주가 주관한 회의는 맹주전에서 열리게 되지만, 당주들이 먼저 주관하게 되는 회의는 천뇌당 합정관에서 열리게 된다.
마침 남궁검과 남궁천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소음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그 미묘한 분위기에도 남궁검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차분히 걸음을 옮겨 상석에 앉았다.
과연 남궁검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무림맹의 최고 수뇌 인사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임 맹주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을 자들이 저마다 입을 다문 채 불편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기 전에 총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맹주님이 오셨으니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십당의 과반수가 동의하여 열리게 되었습니다. 안건은 본 맹의 앞날과 무림공적 일 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갈승의 말이 떨어지자 몇몇 당주들이 헛기침을 했다.
남궁천은 예리한 눈으로 그들의 면면을 훑었다.
과반수 이상의 동의다.
정확히 다섯 명만 동의를 했을 수도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회의에 동의했다는 것만으로 전임 맹주와 친분이 두텁다고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누구라도 현 상황에서는 신임 맹주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을 수도 있으니.
마침 남궁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회의를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주최를 했어야 할 일이었소. 늦어서 미안하오.”
“크흠. 괜찮습니다.”
“뭐, 경황이 없으실 테니 그럴 수도 있지요.”
당주들이 나름의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그러고도 다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남궁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궁금한 게 많을 것이오.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답할 수 있는 것은 답을 해드리겠소.”
이번에도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실내에 모인 자들은 십당의 주인들로서 무림맹 내 최고 인사들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고강한 기운만으로도 이미 계절을 잊을 만큼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한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으니, 범인이라면 이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에 숨이 막히고 말았으리라.
이윽고 먼저 입을 연 자는 다름 아닌 호법당주 안천길이었다.
“맹주…… 아니, 묵천악은 어찌 되었습니까? 달아나자마자 천라지망을 펼쳤으니 지금쯤은 잡혔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칼날 같은 인상을 가진 안천길의 말에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래서야…… 대놓고 적대감을 보이는 셈이군.’
남궁천 역시 남궁검과 같은 생각이었다.
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호법당 아래에 청랑단이 있지 않던가?
청랑단주가 묵천악의 수족처럼 굴었으니, 호법당주 역시 그 못지않을 것이라 짐작은 한 바였다.
그간 묵천악과 짝짝꿍이 잘 맞았을 텐데 하루아침에 믿는 도끼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으니 황망하기 이럴 데 없으리라.
남궁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장강을 통해 천라지망을 벗어났습니다. 하나 날이 밝는 대로 곧 질풍대를 동원해서 추격을 시작할 테니 머지않아 다시 꼬리가 밟힐 겁니다.”
역시나 당주들이 서로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천라지망을 벗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안천길이 눈살을 슬쩍 구기며 물었다.
“천라지망을 뚫고 달아났는데 어찌 그리 확신한단 말인가? 역대 천라지망을 뚫은 자가 몇이나 된다고 그리 느긋한가?”
묘한 질책이 묻어 있는 말투다.
아마 저 말투는 점점 더 책망으로 바뀌면서 꾸지람까지 이어질 터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남궁천이 태연히 대답했다.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갈! 지금 동네 술래잡기 놀이하는 줄 아는가!”
역시나 질책으로 이어진다.
아마 지금쯤 안천길은 내심 잘 됐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겉모습만큼은 지엄하기 짝이 없다.
“천라지망에도 황금 시간대라는 것이 있네! 무슨 말인지 아는가? 천라지망을 펼치고 나서 그 시간대에 잡지 못하면 놓칠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야! 그 시간은 여섯 시진! 한데 지금 여섯 시진이 훌쩍 지났어! 게다가 천라지망이 뚫리고도 어찌 그리 태연하단 말인가?”
“그래도 아직 만 하루가 지나진 않았잖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죠.”
“뭐, 뭣이? 저……! 아직도 자네가 견습생인 줄 아는가! 말투는 또 그게 뭐야!”
이쯤 되자 여세를 몰아서 다른 당주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맹내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고 자금을 관리하는 천우당주(天佑堂主) 유백랑이었다.
“호법당주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네. 자네는 지금 반드시 잡아야 할 자를 놓치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일세. 자네가 놓친 전임 맹주는 무림공적 일 호이지 않은가? 그렇게 선언한 이상 신임 맹주의 신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았어야 했네.”
“옳은 말이외다!”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뱉은 자는 철심당주(鐵心堂主) 철무형이었다.
그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놓칠 일이었다면 애초에 무림공적 일 호라고 공표하질 말았어야 하네! 그만큼 중요한 자를 놓친 꼴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그를 끝으로 다른 당주들이 술렁이며 조심스레 말을 주고받았다.
남궁천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데 좀 듣자 하니 이상하네요.”
“뭐라?”
“이래서야 마치 애초에 묵천악을 무림공적 일 호로 공표한 게 잘못이라는 말 같네요?”
“그게 아니라!”
“그리고 또.”
“……!”
“천라지망을 뚫고 달아난 사람 또 있잖아요? 천하대살성 진천랑. 여러분들이 합심해서 쫓았던 제 아버지. 그런데 결국 잡아 죽였잖아요? 그때도 이렇게 맹주를 다그쳤는지 궁금합니다만.”
“저, 저……! 버르장머리가 없는……!”
“자네는 정말 아직도 견습생인 줄 아는가? 도대체 예의는 얻다 팔아먹은 것이야! 그 말버릇이……!”
콰아아앙!
일순 고막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큰 소리가 울렸다.
당주들이 저마다 미간을 좁히고는 얼른 공력을 끌어 올려 청각을 보호했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고막이 터져 피가 흘렀으리라.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남궁검이 손바닥으로 철탁을 내려친 채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꿀꺽……!
그 엄중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무슨 눈빛이 저런…….’
말 그대로 서슬 퍼런 표정과 눈빛은 산 사람도 그대로 씹어 삼킬 듯 살벌했다.
남궁검이 칼날 같은 시선을 호법당주 안천길에게 던졌다.
“버르장머리라고 하셨는가?”
“……!”
다시 남궁검의 시선이 천우당주 유백랑에게 향했다.
“이제는 견습생이 아니라고 하셨는가?”
꿀꺽……!
마지막으로 남궁검이 얼음장 같은 눈길로 철심당주 철무형을 노려보았다.
“예의가 문제라고 하셨나?”
“……!”
“자네들 말대로 여기 있는 적랑단주는 더이상 견습생이 아닐세. 본 맹 최고의 무력 집단의 수장일세. 한데 자네는 지금 그런 자를 상대로 버르장머리 없이 고약한 말버릇으로 마치 견습생 대하듯 말하는군. 내 말이 틀렸는가?”
“……!”
“내 신임을 위해서라도 무림공적 일 호로 공표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인가? 그게 정녕 악랄한 자를 대하는 자네들의 생각인가?”
“맹주님 뭔가 오해가…….”
“오해? 그럼 어디 한번 읊어보시게. 내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가? 호법당주.”
남궁검의 시선이 안천길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안천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뱀 앞에서 온몸이 얼어붙은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남궁검이 묵직한 음성을 또박또박 뱉어냈다.
“말을 해보란 말일세. 무엇이 오해였나? 자네들이 적랑단주를 견습생 취급한 것이? 아니면 자네들이 날 질책하기 위해서 적랑단주를 몰아세운 것이? 어디 말해보시게. 무엇이 오해였나?”
“끄음…… 그것이…… 저희들로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예의를 팔아먹은 자는 누군가? 수십 년간 본 가는 무림맹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어디 그뿐인가? 간악한 묵천악에게 나는 딸을 잃었네. 그런데 지금 자네들은 뭔가? 예의? 자네들이 진정 예의를 안다면 내게 먼저 사과를 해야 하지 않는가?”
당주들 중 누구도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궁검이 시리도록 차가운 눈길로 좌중을 훑어보며 칼날 같은 음성을 이어갔다.
“자네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양심이 있다면 최소한 그간 고생하진 않았는지, 그간 몰라서 죄송하다든지, 이런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예의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한데 자네들 중 누가 그 예를 갖추었는가!”
“맹주님, 저희들은 그저…… 그러니까 앞으로가 우려되어…….”
“말을 똑바로 하시게. 호법당주! 자네는 아직도 일개 청랑단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
“묵천악이 청랑단주로 지낼 때, 자네는 단원으로 있었지, 아마?”
“그, 그것을 어떻게……?”
“노부가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네.”
“……!”
“어찌? 과거 충성을 다해 모시던 주인이 자리를 잃고 쫓겨나니 연민이 생긴 것인가? 하나 호법당주가 연민을 품을 자리는 아닐진대.”
“오, 오해십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한때 자네들이 모시던 자가 말하지 않던가? 이 강호는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가는 곳이라고.”
“명심하여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안천길이 포권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남궁검은 싸늘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그는 남궁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적랑단주의 책임도 없지 않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보라.”
“간단히 말씀드리죠. 이틀 안에 묵천악의 모가지를 따오겠습니다.”
“……!”
“……!”
당주들이 모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궁천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전대 맹주는 병신같이 천라지망을 여러 번 뚫리면서 무림공적 일 호를 수십 년 쫓아다녔지만, 저는 이틀 안에 해결하지요.”
“적랑단주. 그 말을 지키지 못하면…….”
안천길의 말을 자르며 남궁천이 대꾸했다.
“지키지 못하면 적랑단주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묵천악 모가지에 현상금도 두둑하게 걸었으니 여기저기 제보도 쏟아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무림공적 일 호를 사흘 만에 잡아 죽이면 맹주 신임에는 별문제 없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시죠.”
남궁천의 말에 안천길도 입을 다물었다.
그가 깊어진 눈으로 남궁천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네. 자네 활약을 기대해 보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입매를 히죽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