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65화 (364/508)

365. 무림공적 일 호

묵천악은 방 안을 연신 서성였다.

그는 이따금씩 창문을 살짝 열어서 밖을 내다보고는 다시 방 안을 서성이곤 했다.

밖에서는 연신 왁자한 웃음소리와 기녀들의 간드러지는 말투가 뒤섞였다.

한참을 그렇게 방 안을 서성이던 묵천악이 자리에 앉으면서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콰장!

탁자가 부서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자 기녀 하나가 놀란 기색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신지요?”

“일은 무슨 일! 왜 이렇게 안 오는 것이냐? 말을 건넨 지가 언젠데!”

“위에서 서두르는 것으로 압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흥! 그렇다면 먹을 거라도 내오든지!”

“네, 곧 술과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서둘러!”

“알겠습니다.”

기녀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물러났다.

묵천악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부서져 나간 탁자를 보고 있자니 자기 자신처럼 느껴져서 괜스레 또 화가 났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처럼 침착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니 또 화가 났다.

그야말로 화가 화를 부르고 다시 화를 부르는 상황.

‘진천랑……! 네놈이 어떻게 다시 나타난 것이냐? 그때 네놈은 분명 죽었건만!’

아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걸 알면 또 어쩔 건가?

중요한 건 놈이 다시 나타났고, 자신이 놈에게 졌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모든 걸 잃고 삶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아니, 이 개 같은 것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언제는 비표만 던지면 촌각이 무섭게 달려온다더니!”

묵천악이 아무도 듣지 않는 고함소리를 바락바락 내질렀다.

그의 조바심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웃음소리와 신음이 난잡하게 어우러졌다.

“술! 술을 가져오란 말이다!”

마침 문이 열리면서 기녀가 술병과 잔을 들고 들어왔다.

“술부터 대령했습니다. 음식은 조리하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시중을…….”

“필요 없다. 썩 꺼져라.”

“그럼.”

기녀가 물러나자마자 묵천악이 냉소를 짓고는 술병을 움켜쥐었다.

‘감히 이름도 없는 기녀 주제에 내 몸에 손을 대려고?’

지금껏 그를 접대한 여인들은 대부분 이름 난 기녀이거나 여염집 아낙들이었다.

아무 놈에게나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와는 일절 살을 섞지 않은 그였다.

물론 지금은 상황도 상황인 만큼 여색을 누리고 싶은 마음 따위도 없지만.

술병을 나발째로 벌컥벌컥 들이켠 묵천악이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탕!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흐흐흐. 흐흐흐.”

정말이지 실성이라도 한 것 같다.

하지만 웃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될 수가 있나?

불과 오늘 아침만 해도 기분 좋게 일어나 신년을 맞이했다. 날씨도 쾌청했다.

한데 몇 시진 지난 지금 자신은 누구 것인지도 모를 옷을 훔쳐 입고 단내가 풍기는 기루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크하하하하!”

묵천악이 의미 모를 웃음을 한참이나 터뜨리다가 뚝 그쳤다.

정말이지 감정의 기복이 스스로도 제어가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진천랑…… 진천랑……! 두고 봐라. 이대로 절대 끝나지 않는다! 네놈은 반드시 내 손에 또 죽으리라!”

벌컥벌컥!

묵천악이 다시 술병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채운 술이 입가로 흘러나와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품위 따위는 개나 줘버린 지 한참이다.

콰차앙!

빈 술병을 거칠게 내리쳐서 깨버린 묵천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술! 술을 더 가져오너라! 그리고 왜 이렇게 안 오는 것이야?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술이라도 먼저 가져오겠습니다.”

“흥! 네놈들도 날 무시하는 것이냐? 그래서 이렇게 늦는 것이야?”

묵천악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손을 불쑥 뻗으며 달려나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묵천악이 기녀의 가느다란 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컥!”

“이렇게 굼뜨니 여기서 죽게 되지 않느냐? 강호에서는 빠릿빠릿해야 하는 법이라는 걸 모르느냐!”

“죄, 죄송……!”

우두둑!

묵천악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진 기녀가 힘없이 픽 쓰러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또 다른 기녀가 술과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방금 들어왔던 기녀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였다.

그녀가 들어서다 말고 묵천악과 바닥에 쓰러진 기녀를 보고는 멈칫했다.

“뭘 꾸물거리느냐? 어서 술과 음식을 들이고……!”

“이런 짓을 하면 위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기녀는 겁을 먹는 대신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는 대꾸했다.

묵천악이 기가 차서 눈을 희번덕였다.

“뭐라? 감히 네까짓 년이 내게…….”

“어르신께서는 어제와 다릅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주제를 알라고 하는 소리더냐?”

“어르신께서 이곳을 찾아오신 목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자중해 달란 말씀입니다.”

“네 이년…… 정녕 네년도 이년의 길동무가 되고 싶은 게로구나.”

“어차피 강호에 몸 담은 이상 목숨 절반은 절벽에 내밀고 사는 몸. 좋을 대로 생각하시지요.”

차갑게 말을 뱉은 기녀가 부서진 탁자 한쪽에 술과 다과를 차려두고는 돌아섰다.

묵천악이 손끝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눈앞의 기녀를 찢어 죽이고 싶지만,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다.

지금 자신은 맹주가 아니다.

그걸 알고 저 기녀가 ‘어르신’이라고만 부르는 것이다.

괘씸한 년.

기녀가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묵천악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냐, 네년은 언젠가 내 손으로 그 잘난 가랑이를 찢어 죽여주마.”

“쉬고 계시지요.”

기녀는 끝까지 차가운 자세를 유지한 채 밖으로 나갔다.

묵천악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년이고, 저년이고…… 전부 내가 우습구나!”

후우우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 나갔다.

하나 당장 분풀이를 할 곳이 없다.

방황하던 그의 눈길이 탁자에 차려진 술병으로 향했다.

“이 수모를 언젠간 갚겠다! 두고 봐라! 감히 나를 무시해? 너희들은 너무 빨리 나를 잊었다! 네놈들이 지금 호의호식할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 줄 모른단 말이냐? 이 개 같은 것들! 감사할 줄 모르는 새끼들은 전부 뒈져도 싸지! 내 언젠간 이 세상을 불태워 버리마!”

묵천악은 다시 술병을 들어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단숨에 한 병을 비우고, 또 한 병을 비워갔다.

* * *

휘리리릭, 척!

기루 맞은편 지붕 위로 비량이 착지했다.

“상황은 좀 어떻죠?”

비량의 물음에 천라단주 을지룡이 건너편 기루를 보며 대답했다.

“맹주가 들어간 지 반 시진 정도 지났소. 현재는 조용한 상태요.”

을지룡이 나름의 예를 갖춰 대답했다. 사실상 직책으로 보자면 을지룡이 더 위였지만, 비량에 대한 예의였다.

“흐음. 정말 조용하네요? 기루답지 않게.”

“원래 꽤 시끌벅적했지만 맹주가 들어가고 나서 한 식경 정도 지났을 때부터 조용해지기 시작했소.”

“그 말은…….”

“안에서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거나, 이미 빠져나갔거나 둘 중 하나일 거요.”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아직 급습을 하지 않은 것은 맹주가 안에 있다고 판단하신 거고요.”

“그렇소. 맹주는 삼 층 동향 객방 세 번째에 머물고 있소.”

“과연 천라단이네요. 정확한 위치까지 알아내시고. 천라지망의 단계를 중급으로 낮췄는데도.”

“상급 천라지망을 펼쳤다면 객잔의 무장 상태도 알아낼 수 있었을 거요.”

“괜찮습니다. 이만해도 충분합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오?”

“일단 건드려 봐야겠죠?”

비량이 생글 웃어 보이더니 어디론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팽수혁과 유현, 진소홍과 윤종승이 차례대로 날아와 지붕 위에 착지했다.

“무림공적이 저기 안에 아직 있다는구나. 각 대주들은 대원들을 두고 나와 함께 급습한다. 만약 실내에 무장한 무인이 많으면 대원들까지 모두 침투시키는 쪽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구렁이 좀 놀라게 해볼까?

비량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 * *

“끄음……!”

묵천악은 묵직한 두통을 느끼면서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희뿌연 천장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그는 천장이 왜 낯선지 생각해야 했다.

이곳이 맹주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현실을 자각하자 지독한 분노와 절망감이 음습해 왔다.

“진천랑!”

씹어뱉듯 말을 흘려낸 묵천악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다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크읏!”

그가 얼른 공력을 운기해서 주기(酒氣)를 체외로 빼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머리가 어질하다.

‘뭐지……? 설마 이놈들이 술에 독을?’

아찔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너무 무방비했다.

세상 끝자락에 섰더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좀 더 조심해야 했다.

어쨌거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극독은 아닌 모양이다.

‘아…… 극독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건가?’

생각해 보니 굳이 값비싼 극독을 소모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무림공적 일호가 되었으니 죽이고자 한다면 차라리 무림맹의 손을 빌리지 않겠나?

“니미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서 화가 날 지경이다.

“끄음.”

신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들어 보니 아직 널브러져 있는 시체도 치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무 조용한데?’

그토록 시끌벅적하던 곳이 이렇게 거짓말처럼 조용해질 수가 있나?

“여봐라.”

묵천악이 입을 열었다.

이젠 심신이 지쳤는지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사방이 고요하다.

이건 확실히 뭔가 잘못됐다.

‘이 마교 놈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묵천악의 눈빛이 일순 예리해졌다.

찰나!

콰차차창!

방문이 부서지고 창문이 부서지면서 시커먼 인영이 튀어나왔다.

삐이이잉!

제일 먼저 유성추가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리며 날아들었다.

파라라라라!

묵천악이 그대로 몸을 눕히고는 빠르게 회전하며 피했다.

묵천악의 아랫배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유성추가 침상을 박살 냈다.

콰차앙!

촤촤아앗!

미끄러지다시피 바닥에 착지한 묵천악이 반사적으로 몸을 튕기며 한 인영에게 날아갔다.

직감적으로 가장 약한 상대로 파악한 자였다.

그는 바로 윤종승이었다.

“노오오옴!”

묵천악이 일갈을 터뜨리며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내려쳤다.

하지만 윤종승은 피하는 대신 맨손으로 부딪쳐 왔다.

쉬이이잇, 꽈아아앙!

윤종승의 손바닥에서 강맹한 기운이 폭발했다.

‘아뿔싸! 폭렬갑……!’

이미 고천수의 폭렬갑이 윤종승에게 흘러 들어간 것을 지난 비무 대회 때 보지 않았던가?

경황이 없어서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크윽!”

신음을 삼킨 묵천악이 뒤로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튕겨 나갔다.

그 뒤를 유현이 쫓아가며 검을 어지럽게 휘날렸다.

쉬쉬쉬쉬쉬쉭!

정면에서는 유현이, 좌우에서는 팽수혁과 비량이 날아들었다.

“으랏차!”

쉬이이잇!

결국 맹주가 혀를 차고는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파밧!

어찌나 급하게 몸을 던졌는지 바닥에 제대로 착지할 여유도 없이 마구 굴렀다.

쿠당탕!

‘제길…… 빌어먹을 독기 때문에……!’

묵천악은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그 뒤로 조롱 섞인 외침이 들렸다.

“무림공적 일 호가 도망간다! 잡아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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