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무림공적 일 호
“네 말대로 천라지망을 느슨하게 해두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겠느냐?”
남궁검의 말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원래 모든 절망은 희망에서 시작되는 법이죠. 달아날 수도 있다는 희망. 구사일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맹주는 그게 무너질 때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느끼게 될 겁니다.”
“맹주에 대한 원한이 생각보다 깊구나.”
남궁천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속에 품고 있는 용광로와 같은 울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당연히 깊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는 한평생을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혀서 사셨어요. 아무런 죄도 없이. 맹주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당한 거죠. 모든 증거는 조작됐고, 사람들조차 등을 돌렸죠.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을 불태워 버릴 정도의 거대한 악은 어디서 탄생하는가? 결국 별거 아닌 것 같더라고요. 만약 아버지가 한 걸음만 잘못 디뎠다면 그런 거대한 악이 되지 않았을까요? 결국 그 악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겠죠.”
“하나 네 아비는 그러지 않았다.”
“맞아요.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죠.”
“어째서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남궁천이 가만히 중얼거리고는 맹주실 밖으로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았다.
맑은 하늘에 떠오른 달은 투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맑았다.
보름달에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남궁선.
자신을 보고 활짝 웃는 얼굴, 뭔가에 삐쳐서 부루퉁한 얼굴, 슬픔에 잠겨 엉엉 울던 얼굴, 곤히 잠에 빠져들었던 얼굴.
마침내 남궁천이 남궁검을 돌아보며 답을 말했다.
“아버지가 끝내 타락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버지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
‘나를 믿어줬던 사람들. 그들이 날 이 자리까지 오도록 만들었다.’
남궁천이 주먹을 꾹 말아 쥐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구나. 오늘따라 네 어미가 보고 싶구나.”
남궁검이 진득한 그리움을 담은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달을 보며 같은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색하지만은 않은 부드러운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이제 막 맹주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궁표였다.
“형님! 아니, 가주님! 아니, 맹주님! 이거 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튼 형…… 맹주님!”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남궁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궁표를 흘겨보자, 남궁표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음…… 내가 왜 왔지? 아! 그래요! 천라지망의 강도를 중급으로 낮추셨다면서요? 왜 그러신 겁니까? 기껏 우리 소가주가 애써서 맹주를 몰아붙였는데, 이러다가 놓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건 네가 죽고 못 사는 우리 소가주에게 물어보거라.”
“예?”
남궁표가 이맛살을 푹 구기다가 시선을 돌려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오, 소가주. 여기 있었는가? 그래, 어디 몸은 괜찮고? 식사는 했고? 무인은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라네. 잘 먹어야 해. 아니, 그보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안 자고 여기에 있는 건가? 어서 방에 들어가서 자지 않고? 혹시 잘 곳이 없나? 형님! 아니, 맹주님! 우리 소가주 피곤할 텐데 침상 좀 내어주시지 않고 뭐 하십니까? 가장 고생한 사람인데!”
“아……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나? 자네는 오늘 너무 큰일을 했어. 반드시 쉬어줘야 하네. 정초부터 이렇게 하늘을 뒤흔들 사건을 일으켰으니 얼마나 고단할꼬? 맹주님! 거, 침상 좀 씁시다. 전대 맹주가 지내던 침상이니 오죽 편하겠습니까?”
“으음. 전대 맹주가 쓰던 곳이라는 말을 들으니 더 눕기가 싫어지네요.”
남궁천이 난색을 표하자, 남궁표가 얼른 말을 바꿨다.
“아,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에라이, 퉤! 저런 더러운 자리는 쓸 필요 없네. 나중에 여기도 싹 재정비를 하고 다시 꾸며야겠군.”
듣고만 있던 남궁검이 땀을 삐질 흘리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네가 맹주인 줄 알겠구나.”
“어……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무튼 우리 소가주 좀 쉬게 해주시죠?”
“나는 쉬지 못하게 한 적 없다. 너 때문에 피곤할 것 같구나.”
“아…… 그랬나?”
“좀 정신이 없긴 하네요.”
남궁천이 어색하게 웃자, 남궁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내가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랬나 보네. 이해 좀 해주시게. 자네가 본 가의 명성을 이렇게 끌어올리고, 우리 형님을…… 크흡…… 평생 고생만 하신 우리 형님을…… 이렇게 맹주로…… 만들고…… 또 네 부모의 억울함마저 풀어버렸으니…… 크흐흑!”
남궁표는 차마 말을 마저 잇지도 못한 채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간 무림맹의 눈치를 살피며 험난한 세월을 지냈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남궁표를 다독였다.
“숙조부님. 이제라도 제 위치를 찾아가고 있으니 다행 아닙니까?”
“크흡. 그렇지. 이게 다 자네 덕분이야. 내가 자네를 진작 알아보지 못한 걸 미안하게 생각하네.”
“뭐,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짜증 나긴 해도 괜찮습니다.”
남궁천이 솔직하게 말하자 남궁표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어넘겼다.
“그나저나 천라지망을 느슨하게 한 것이 자네 생각이라니. 왜 그런지 이유라도 들어볼 수 있겠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뭔가?”
“하나는 맹주에게 거짓 희망을 주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완벽한 복수로군.”
“그렇기도 하지만 마교를 끌어낼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과연. 맹주가 마교와 접선할 수도 있다는 건가?”
“기댈 곳이 거기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렇군. 그럼 다른 이유는?”
“지근거리의 적아를 가리기 위함입니다.”
“적아를 가린다니?”
남궁천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밝은 달빛 아래에 등을 밝힌 무림맹 전각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곳은 밀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동안 주인 행세를 한 호랑이가 쫓겨났으니 여우나 늑대들이 호랑이 행세를 하려고 들 겁니다.”
“흐음. 감히 형님을 맹주로 인정하지 않을 부류가 있을 거란 말이로군.”
“그렇죠. 그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에요. 권력이 가장 약한 시기가 바로 지금처럼 뜻하지 않게 갑자기 권력 교체가 일어난 순간이니까요. 그리고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아직 묵천악의 편에 선 자들이 남아 있을 거예요.”
“하긴. 그동안 묵천악이 맹주로 지내면서 많은 이들을 포섭했을 테니까.”
“예, 우리는 그들을 발본색원해서 뿌리를 뽑아야겠죠. 반대로 이용을 하거나.”
남궁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목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한데 그것과 천라지망을 느슨하게 한 것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맹주가 달아나게 되면 그 무리가 더 난리를 칠 텐데. 무능이니, 뭐니 하면서.”
“바로 그렇게 구분하는 거죠. 천라지망을 펼치고도 맹주를 빨리 잡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거예요. 그럼 적이라는 걸 알 수 있죠. 반대로 아군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줄 겁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 못 잡으면? 묵천악이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세상에 묵천악이 있는 곳만 가리키는 나침반 같은 게 없는 한 놓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런 거 있습니다.”
“응? 뭐가?”
“묵천악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나침반. 그런 게 있습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예리한 날을 지닌 단검이었다.
“이건……?”
“추혈검입니다. 아, 제가 붙인 이름이긴 합니다. 살곡에 들렀을 때 찾은 거죠.”
“추혈검……? 그런데?”
“이게 맹주가 있는 곳을 알려줄 겁니다.”
“이게? 어떻게?”
“단상에서 맹주와 격돌했을 때, 제가 단검으로 맹주를 벤 것 기억하세요?”
“기억하네.”
“그때 사용한 단검이 이 추혈검인데요. 자, 이렇게 보시면…….”
남궁천이 말을 멈추고 탁자로 걸어가서 추혈검을 놓더니 빙글 돌렸다.
팽이처럼 돌아가던 추혈검이 어느 순간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멈췄다.
남궁표는 물론 남궁검도 지금 남궁천이 뭘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탁자에 두고 단검을 돌리다니?
남궁천이 씨익 웃더니 다시 한번 단검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참이나 돌아가던 단검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
그렇게 세 번째 똑같이 단검을 돌리고 멈추었을 때였다.
남궁검이 먼저 알아챘다.
“과연. 단검이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구나.”
“그렇습니다.”
“추혈검이라 이름 지은 것은 혹시 그 단검에 묻은 피의 주인을 가리키는 것이냐?”
“맞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녀석이 귀하디귀한 신병이기죠.”
“호오! 과연! 역시 우리 소가주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내가 한 번 해봐도 되겠는가?”
“얼마든지요.”
남궁천이 물러나자 남궁표가 추혈검을 잡고 빙그르 돌렸다. 한참 돌아가던 추혈검이 서서히 멈추면서 조금 전과 똑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남궁표가 신기해서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이 남궁천이 추혈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제 아시겠죠? 맹주는 절대로 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흘 내로 죽을 겁니다. 벌써 하루가 다 지나갔으니 이제 이틀 남은 셈이죠.”
“그렇군. 한데 왜 사흘인가? 이렇게 되니 차라리 더 골려주고 싶구만.”
“저도 그러고 싶지만…… 사흘 내로 죽여야지 큰돈이 들어와서요.”
“큰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쯤 되자 살곡의 일을 알고 있던 남궁검이 끼어들며 남궁표를 다독였다.
“그런 게 있어. 자네는 소가주를 못 믿는가?”
“그럴 리가요. 사실대로 말하면 이젠 형님보다도 소가주를…… 커흠.”
남궁검의 예리한 눈초리를 받은 남궁표가 씨익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무튼 무리하지 말게. 자네가 본 가의 희망이야. 아니, 이젠 강호의 희망이 되겠군!”
“명심할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주무세요.”
“그래, 그래.”
남궁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맹주실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자 남궁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다 없구나.”
“그간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기분이 좋은 거겠죠.”
“네가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그래도 처음엔 널 반대하던 이였는데도.”
피식.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런 작은 원한을 뼈에 새기면 살 수가 없다.
그런 전생을 살았다.
온 세상이 적이었기 때문에 작은 미움 정도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넘어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먼저 미쳐 버렸으리라.
‘맹주…… 당신은 지금 어떨까? 주변의 크고 작은 미움과 경멸 어린 시선이 날아들 텐데. 잘 버티고 계시는가? 희망이라는 게 당신을 괴롭히진 않는가?’
창밖으로 휘영청 떠오른 달.
저 달을 어디선가 맹주도 보고 있으리라.
* * *
무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강현.
방립을 깊이 눌러쓴 묵천악이 어둑한 뒷골목을 빠른 속도로 걸었다.
천라지망이 펼쳐졌다지만 아예 옴싹달싹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병신 같은 놈. 갑자기 맹주가 되면 천하를 호령할 줄 알았더냐? 이렇게 천라지망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야 날 상대하겠다고?’
그는 내심 비웃음을 머금고는 잰걸음을 놀렸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가자 붉은 등불이 화려하게 밝혀진 홍등가가 나타났다.
취객 중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쳤지만 묵천악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걷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궁천이 했던 말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 목숨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아까울 지경이군.”
왜 하필 사흘이라고 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궁천의 말대로라면 자신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최대한 빨리 수를 써야 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묵천악이 어느 순간 화려한 기루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속곳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녀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어머, 오라버니. 놀다 가시려고? 여기 좀 나가는 곳인데. 그만큼 물은 좋지만. 어떻게? 화끈하게 놀아보실래요?”
“닥치고 기둥서방 좀 불러라.”
“응? 무슨 소리를…….”
휙!
묵천악이 말을 더 잇지도 않고 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기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녀가 곧 묵천악에게 다가와 나직이 소곤거렸다.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