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63화 (362/508)

363. 무림공적 일 호

“무림의 하늘이 바뀌었군.”

죽립을 눌러쓴 선풍도골의 노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찬가지로 죽립을 눌러쓴 노파가 옆에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맹주도 이제 끝이군요.”

“천라지망을 펼쳤으니 머지않아 잡히겠지.”

“근본 없는 것들은 이렇듯 뽑히는 것도 한순간이죠.”

“허허, 너무 매몰차게 굴진 맙시다. 그래도 그런 면이 있어 지금 이렇게 우리가 기회를 엿보는 것 아니겠소.”

“장문인께선 늘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노파의 말에 장문인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아니에요. 무림칠성이라면 그럴 자격이 충분하지요.”

노파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침 다른 노인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쨌거나 맹주가 이리 순식간에 무너질 줄은 몰랐습니다. 강호신룡의 명성이 과한 게 아니라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든 우리로선 손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 아니겠소? 신룡이 과소평가되었든, 과대평가되었든 달라질 건 없소. 이제 남은 건 사람들이 바뀐 하늘을 어찌 받아들일지가 문제겠지.”

“장문인께선 언제까지 지켜보실 생각입니까?”

“글쎄…… 우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봅시다. 이제 막 마교 문제가 대두되었으니 섣불리 뛰어들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렇지요. 하면 한동안은 신룡의 재주를 구경해야겠군요. 또 남궁 가주가 과연 맹을 잘 다스릴지도 두고 봐야 알 일이고.”

세 사람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주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지강은 무한의 저잣거리를 빠르게 내달렸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면서 넘어질 뻔했지만, 욕설을 들어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외곽의 허름한 객잔으로 들어선 지강이 삼 층까지 달려가서 문을 벌컥 열면서 소리쳤다.

“련주님! 엄청난 소식입니다! 헉, 헉!”

“엄청난 소식?”

“예! 방금 무림맹 맹주가……!”

“바뀌었나?”

“예! 아? 예? 어…… 그렇지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남궁검 가주가 맹주가 되었고?”

“맞습니다!”

“맹주는 무림공적 일 호가 되었고.”

“그렇…… 습니다만. 진짜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고 있었으니까.”

류난이 피식 웃으며 탁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창가의 탁자에는 둥근 구슬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 여신우가 팔짱을 낀 채로 입매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아…….”

지강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중얼거렸다.

“그 새 대가리를 통해서 보신 거였군요.”

그러자 여신우가 발끈해서 말했다.

“새 대가리가 아니라 옥안영오다.”

“옥안영오는 새 아닌가?”

“평범하지 않지.”

“그래. 평범하지 않은 새 대가리로 치자고.”

여신우의 이마에 핏대가 살짝 섰지만, 류난이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옥안영오 덕분에 대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은 대략 알고 있어.”

“그래도 직접 가서 보셨으면 정말 입이 딱 벌어지셨을 겁니다. 남궁천이 그런 식으로 맹주의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습니다.”

“군사라고 모든 걸 다 알면 예언자가 되었겠지.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이제 어쩌죠? 묵천악이 이대로 달아나면…….”

“우리로서는 오히려 잘된 거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묵천악의 죽음이 아니라 완벽한 몰락이었으니까. 하지만 몰락시킬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목숨을 원했던 거고.”

“하긴. 그렇군요. 남궁천에게 감을 따달랬더니, 감나무를 통째로 뽑아 버린 셈이네요. 하하.”

“사실 지금으로선 우리 손으로 묵천악을 죽이는 게 가장 이득이긴 한데…….”

“그래야 남궁천에게 다섯 배의 잔금을 물지 않을 수 있겠죠.”

“좋은 방법 없을까?”

지강이 고개를 저었다.

“천라지망을 펼쳤어요. 우리가 섣불리 끼어들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이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남궁천이 실패하길 바라야겠군. 이거 상황이 이상해졌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맹주를 죽여달랬다가, 이젠 맹주가 살아 있길 바라야 한다니.”

“앞으로 사흘이군요.”

“맹주가 죽을까? 살까? 우리 심심한데 내기나 할까?”

지강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류난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러죠. 련주님은 어디에 거시겠어요?”

“글쎄. 부련주는 어디에 걸 건가?”

“나도 끼는 건가?”

“당연히.”

“흐음.”

여신우가 미간을 좁히고는 생각하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나는 살 것 같군.”

“이유는?”

“맹주의 입지가 한순간에 무너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견뎌온 처세술이 있겠지. 마교가 맹주를 도울 수도 있고.”

“그렇군. 지강은 어떻게 생각해?”

“저는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남궁천이 지독해서요.”

“응? 그게 다야?”

“뭐,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마교가 맹주를 도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힘이 있을 때나 맹주지. 지금은 그저 구제불능인 쓰레기일 뿐이죠.”

“그것도 그렇군.”

“그런데 무엇보다 그런 논리를 뛰어넘어서…… 남궁천이 살려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호오, 논리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는 건가?”

“글쎄요. 그냥 남궁천이 움직이면 늘 상식 밖의 사건들이 터지는 것 같아서요.”

그러자 여신우가 코웃음을 쳤다.

“흥! 저런 게 본 련의 총군사라니. 논리고 나발이고 그저 사람을 보고 흔들리는 꼴이라니.”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게 그 사람이니까. 아무튼 전 그렇습니다. 련주님은 어떠세요?”

“난 모르겠어. 대신 심판을 볼게.”

류난이 어깨를 으쓱이자, 지강이 미간을 푹 구겼다.

“예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나는 무려 흑무련의 주인이니까. 내가 곧 법이다.”

“그런 발언은 안 어울리십니다.”

“하하! 그래도 정말 모르겠는걸? 자, 그럼 이제 뭘 걸어볼 텐가? 사파답게 이런 건 목숨 정도는 걸어줘야 하는데 그건 너무 살벌하겠지?”

지강이 눈썹을 파르르 떨며 한 걸음 물러났다.

“오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농담이야, 농담.”

“휴우. 목숨은 좀 그렇고. 총군사 자리를 걸죠.”

“호오? 세게 나오시는데? 그럼 부련주는?”

류난과 지강이 돌아보자, 여신우가 팔짱을 풀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총군사가 자리를 걸었으니, 나도 그만한 걸 걸어야겠지. 옥안영오를 걸지.”

지강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니, 무슨 저 새 대가리가 총군사 자리와 맞먹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겐 그렇다.”

“그걸 말이라고 해!”

“자자, 흥분하지 말고 부련주로서는 정말 큰 걸 건 셈이니까 인정하자고.”

류난이 웃으며 말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운명은 어디로 흐를까?”

단순히 두 사람의 내기를 떠나, 맹주의 운명에 따라 흑무련이 지불해야 할 금액이 달라지리라.

그럼에도 류난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모처럼 강호에 재미있는 일이 잔뜩 벌어지는군.”

* * *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깔렸다.

여기저기 집집마다 밥을 짓는 것인지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잔뜩 긴장한 채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더니 절로 허기가 졌다.

꾸르르륵.

배 속에서 소리가 났다.

묵천악을 주름진 손으로 뱃가죽을 쓰다듬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정초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도무지 자신의 처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 자신은 시녀들에게 안마를 받고 있어야 했다. 일부러 총관에게 준비시켜 두었다.

정초가 되면 늘 해오던 버릇과 같은 것이었다.

따뜻한 곳에서 차를 음미하며 안마를 받고 또 적당히 여색을 즐긴 후에 술과 만찬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휘이이이잉!

칼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에 묵천악은 얼른 옷깃을 여몄다.

대연무장에서 달아난 그는 최대한 빨리 무한을 벗어났다.

그리고 가까운 민가에 스며들어서 양민들의 옷을 훔쳐 입었다.

날씨가 쾌청했던 까닭에 다행히 빨래를 널어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겨울옷이 이렇게 얇다니. 이 옷을 입는 놈은 추위를 안 타는 건가?’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다.

민초들의 삶이 팍팍하다 보니 따뜻한 옷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맹주로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묵천악이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옷을 잘못 훔쳤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꾸르르륵.

다시 배 속에서 소리를 지른다.

먹을 걸 달라고 아우성이다.

정말이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자신은 무림맹주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방립을 눌러쓰고 주변 사람들 눈치나 보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니.

생리적인 욕망을 참아본 적이 없는 그였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옮겨졌다.

‘지금쯤 천라지망이 펼쳐졌을 터. 모든 움직임이 은밀하고 신속해야겠지.’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노상에 음식을 놓고 파는 곳이 몇 군데 보였다.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돈이 없다.

돈이 될 만한 건 옷가지와 장신구일 텐데, 마을 어귀에 죄다 묻어두고 왔다.

행인과 자연스럽게 섞여든 묵천악은 마침 만두를 진열한 가게 앞에 섰다.

“만두 세 개만 주시게.”

묵천악의 말에 주인이 눈살을 여미고는 방립 아래를 힐끔 보았다.

묵천악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하자, 주인장이 이맛살을 푹 찡그리며 물었다.

“돈은 있소?”

“나중에 주겠네.”

“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지금. 당신이 누군 줄 알고 외상을 해줘?”

“감히!”

“……?”

“끄음. 약속하지. 반드시 줄 테니 만두 세 개 주시게.”

“일없소. 돈부터 내시오.”

“거, 사람 말을……!”

“일없다니까!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노오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영감이 누군데? 달아난 맹주라도 되시나? 그럼 신고를 해야 할 판…… 가만……?”

순간 주인장이 뺨을 파르르 떨고는 방립 아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묵천악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돌렸다.

주인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설, 설마…… 정말로 맹주?”

“사람 잘못 봤네.”

“맹, 맹주다! 여기에 맹주가 있다!”

“맹주라니? 어디에? 엇! 정말 저게 맹주야?”

“맹주는 얼어 죽을! 묵천악이라고 불러야지! 어디야? 엇! 정말인가? 어서 맹에 알려!”

“저기 맹주가 있다!”

“묵천악이다! 역적 묵천악이다!”

순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묵천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묵천악이 일순 사자후를 터뜨렸다.

“갈!”

“크읏!”

“으윽!”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틈을 타서 묵천악이 얼른 만두 세 개를 품에 넣고는 경공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묵천악이다!”

“놈이 도망간다! 잡아랏!”

“에라이, 쳐 죽일 놈아!”

등 뒤에서 고함지르는 소리가 왕왕 울린다. 등이 따갑도록 성난 시선들이 느껴진다.

묵천악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가?

강호 그 자체였던 자신이!

백도 무림의 하늘이었던 자신이!

이제는 만인의 멸시를 받으며 세상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다니!

돌연 귓가에서 진천랑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클클클! 이제 좀 아시겠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 좆같은 기분을?”

발끈한 묵천악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닥쳐라! 너와 나는 태생이 다르다! 네놈은 무림공적……!”

“멍청한 소리. 무림공적 일 호는 이제 당신이야.”

“아니야! 나는 무림공적 따위가 아니야! 나는 맹주란 말이다! 나는 무림맹주 묵천악! 나는 백도 무림의 하늘이자 강호 그 자체다! 나는…… 나는…… 크흐흑!”

눈물이 앞을 가린다.

순간 발을 헛디딘 묵천악이 바닥을 거칠게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그 바람에 품에 넣어뒀던 만두가 바닥에 떨어졌다.

묵천악이 엉금엉금 기어가서 만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입에 마구 집어넣었다.

“나는…… 강호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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