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62화 (361/508)

362. 무림공적 일 호

사람들의 웅성임이 조금씩 잦아들 때쯤 제갈승이 입을 열었다.

“정초부터 불미스러운 일로 여러분을 놀라게 해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 역시 지금 황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더불어 그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남궁세가 분들에게도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총군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제갈승을 노려보며 씨근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몇몇 이들은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때마침 당예설이 천천히 단상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죽은 것으로 알려진 당예설이 등장하자 군중들이 다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당예설이 죽은 게 아니었구나.”

“천만다행이다.”

사람들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당예설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저는 독침에 당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절 구해준 사람이 바로 강호신룡이었죠.”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왔다.

“역시 강호신룡이다!”

“강호신룡이 아니었다면 맹주의 간악함을 영원히 몰랐을 테지!”

“강호신룡! 강호신룡! 강호신룡!”

사람들의 연호에 남궁천이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당예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이지 저럴 때 보면 오늘 이처럼 처절한 복수를 노린 사람 같지가 않다.

당예설이 표정을 굳히고는 제갈승을 향해 물었다.

“본 가와 무림맹은 그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만큼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게다가 전 적랑단주를 역임했던 만큼 맹의 앞날이 우려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맹의 입장을 말씀해 주세요. 오늘처럼 사람이 많이 모인 날 공표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흐음.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얘기해 볼까요? 맹주가 이탈했으니, 현 무림맹은 맹주가 부재한 상태입니다. 부맹주가 따로 없으니 규율에 따라 총군사님께서 임시 맹주직을 수행하셔야겠죠.”

여기까지 말을 뱉고 나니 다시 군중들이 술렁인다. 그들 나름대로 찬반 의견이 오갔다.

“확실히 부맹주가 없으니 총군사가 맹주 대행 업무를 하겠군.”

“그래도 이런 부재 상태가 오래 가면 좋지 않아.”

“총군사는 원래 직무가 있을 텐데 겸임을 하는 게 가능할까?”

“게다가 천뇌당도 이번 사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순 없잖아?”

사람들의 반응을 잠시 살핀 당예설이 얼른 말을 이었다.

“총군사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지금은 엄중한 시기입니다. 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은 게 드러났어요. 그 말은 곧 마교가 지금 중원 어디선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뜻이겠죠.”

“……!”

확실히 마교의 파급 효과는 컸다.

무인들은 물론 강호에 몸담지 않은 양민들조차도 잔뜩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역대 마교는 무인과 양민을 구분하지 않고 학살해 왔기에.

그들이 지나간 곳은 곧 재와 불씨만 날리는 죽음의 땅이 되곤 했으니까.

“게다가 흑무련은 강호 북쪽을 장악해서 여태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이번 사태에서 천뇌당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맹주를 공석으로 두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러잖아도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시기다.

한데 중심을 잡고 맹을 이끌어 가야 할 자가 사라졌으니 이 빈자리를 채우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총군사 역시 그것을 감안하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빨리 지적해 올 줄은 몰랐다.

말을 마친 당예설이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만하면 된 것이냐?’

‘잘하셨소.’

남궁천이 당예설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예설은 의식을 차린 후 처음으로 본 남궁천의 얼굴을 떠올렸다.

흑성칠주야독에 중독되어 마지막 죽음의 반점이 생겨나기 직전, 그녀는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막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야에는 남궁천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찌나 서둘러 온 것인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깊은 잠에서 깼을 때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고서의 이야기는 이런 걸 두고 한 말인가?’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죽음의 늪에서 손을 뻗어준 이가 자신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남궁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셨네요? 정신이 좀 들어요?”

“남궁천……?”

“자자, 좀 힘들어도 저와 함께 가시죠?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해요.”

“나 방금 살아난 것 같은데…… 잠깐, 오늘이……?”

“정월 초하루예요. 맹주 잡으러 가야 합니다. 가서 때가 되면 총군사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맹주를 새로 뽑아야 한다고요.”

“무슨……?”

“가면 알아요. 늦었으니까 서두르자고요. 못난 동생도 봐야죠?”

그렇게 얼떨결에 달려온 이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하늘이 바뀌었다. 낡은 세상이 가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

말 그대로 신년이었다.

충격적인 일이 연이어 터졌음에도 신년다운 신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당예설이 총군사를 보며 재차 물었다.

“총군사님. 대답을 해주시겠어요?”

“흐음.”

제갈승이 침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당 소가주의 말대로 맹주의 공석을 오래 두고 볼 수는 없소.”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이니, 오늘 정리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기도 쉽지 않을 테니.”

그러자 군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옳소! 괜히 시간만 끌어봐야 또 인맥을 동원하여 비리만 늘 수도 있는 법! 이 자리에서 정하시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정하시오!”

군중들의 외침에 총군사도 말을 돌리기 어려워졌다.

지금 군중들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자칫하면 그 불길이 천뇌당으로도 번질 수 있는 참이었다.

제갈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소. 우선은 임시 맹주라도 선출하는 것이 좋겠지. 내 생각엔…….”

모두 입을 다물고 제갈승을 지켜보았다.

제갈승이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다가 마침 남문각주 천무류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남문각주님을 임시 맹주로 추대하고 싶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소?”

뜻밖의 제안에 천무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생을 나서지 않던 그였다.

한데 갑자기 맹주의 자리를 제안하니 얼떨떨한 심정일 수밖에.

물론 그를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패력궁 천무류의 무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미 적랑단주 선발전에서 강호신룡마저 꺾은 것을 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적랑단주의 자리를 신룡에게 양보까지 했으니 사람의 됨됨이는 이미 확인한 셈이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맹주의 자리에 그보다 어울리는 사람도 없으리라.

“좋습니다! 패력궁이라면 믿을 만하지!”

“옳소! 패력궁 천무류! 맹주가 되어주시오!”

“패력궁! 패력궁! 패력궁……!”

사람들이 다시 연호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천무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당예설이 그 모습을 보다가 남궁천을 힐끔 보았다.

‘지금까지는 네 뜻대로구나.’

그녀는 남궁천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나눈 대화를 또 한 번 떠올렸다.

“총군사는 패력궁을 추대할 거란 말이지?”

“그럴 겁니다. 지금 많은 사람에게 가장 빨리 인정받을 수 있는 무인이 바로 패력궁이니까요. 뭐, 그게 아니어도 옆에서 그렇게 부추겼을 거고요.”

“부추겨? 누가?”

“지각주가요.”

“지각주와 아는 사이였나?”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네 목적은 패력궁을 맹주로 만드는 것인가?”

“하하하. 평생을 한직에서 머물렀던 패력궁입니다. 그가 맹주의 자리에 오르겠습니까?”

남궁천은 패력궁이 맹주가 되어도 큰 상관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마 거부할 거라고 했지. 과연?’

마침내 모두의 시선을 받은 패력궁이 헛기침을 하고는 한 걸음 나섰다.

남궁천과 대화를 하려고 나타났는데 졸지에 맹주까지 하게 됐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커흠! 여러분의 뜻은 잘 알겠소. 한없이 부족한 노부를 믿어줘서 감사하오. 하나 나는 내 그릇을 잘 알고 있소. 내 비록 평생 무공을 갈고닦으며 수련했지만, 사람을 다스리는 법은 잘 모르오. 하여 지금껏 남문각에 머물고 있었소. 그런 내가 맹을 이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외다. 하여 나는 이번에도 만인의 뜻을 저버릴 수밖에 없겠소.”

“패력궁! 다시 생각해 주세요!”

“우리는 패력궁만 믿을 수 있습니다! 남문각주님! 맹주가 되어주십시오!”

“맹주가 되어주십시오! 맹주가 되어주십시오!”

다시 많은 사람이 소리친다.

하지만 패력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소란이 잠잠해질 때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소. 모두들 고맙소. 하나 나는 그 자리에 나보다 더 잘 어울릴 사람을 알고 있소. 강호 경험이나 연륜도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람이 없는 분이오. 게다가 이미 큰 조직을 이끈 경험도 있는 분이시지.”

“그게 누굽니까?”

“말씀해 주세요!”

다시 군중들이 소리치자, 패력궁이 손을 들어 올려 자제시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분은 바로 지금껏 모진 풍파를 견디며 남궁세가를 이끌어 오신 남궁검 가주님이오!”

일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궁세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 소리쳤다.

“오오! 그렇구나! 남궁검 가주님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남궁검 가주님이 맹주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군.”

“따지고 보면 남궁검 가주님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오히려 그동안 무림맹으로부터 가족을 잃었으니.”

“남궁검 가주님! 부디 맹을 맡아서 쇄신과 개혁을 이끌어주십시오!”

“진정한 강호 평화를 이루어주십시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남궁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검이 단상 위의 남궁천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지금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 기분을 뭐라 형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래전 남궁천이 했던 말.

“저는 그저 소가주답게 홀로 정점에 오르면 될 일입니다. 그럼 그곳엔 이미 가문이 있을 겁니다.”

그때부터 너는 오늘의 일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니다.

이건 예견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의지다.

마땅히 일어날 일이 때가 되어서 일어난 게 아니란 말이다.

의지로 이루어낸 것이다.

남궁천은 아직 정점에 오르지 않았다.

하나 남궁세가의 명성은 지금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옆에 선 남궁표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남궁검의 손을 굳게 잡았다.

“형님! 우리가 정말 소가주 하나는 잘 뽑았습니다!”

“우리……?”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남궁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커흐흠. 형님도 이럴 때 참…….”

남궁검이 피식 웃더니 경공을 펼쳐 허공을 단숨에 가로질렀다.

그가 단상 위로 착지하자 남궁검을 연호하던 사람들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남궁검이 총군사를 보며 물었다.

“총군사의 뜻은 어떻소?”

“만인이 원하고 있습니다. 맹은 만인의 뜻을 존중합니다. 천뇌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주님만 수락하신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모시겠습니다.”

“흐음.”

남궁검이 침음을 흘리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세상사 참으로 모를 일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던 자들이 지금은 선망과 존경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낸다.

어찌 보면 간사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나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간이다.

그런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자리가 바로 맹주일 테고.

마침내 남궁검의 입이 떨어졌다.

“남문각주의 제안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소.”

“우와아아아아!”

대연무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맞이한 남궁세가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남궁표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남궁화는 소매로 눈가를 찍었다. 남궁효는 가슴이 먹먹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남궁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함성이 잦아들 때쯤, 남궁검이 손을 들어 올렸다.

“사태가 심각한 만큼 곧바로 맹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겠소. 그래도 되겠는가? 총군사.”

“물론입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늘 이 시각부터 전대 맹주 묵천악을 무림공적 제일호로 공표한다! 천라단!”

그러자 귀빈석에 있던 천라단주 을지룡이 빛살처럼 날아와 단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라라라! 척!

“천라단주 을지룡, 맹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당장 천라지망을 펼쳐 간악한 묵천악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라!”

“존명!”

정월 초하루.

무림의 하늘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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