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무림공적 일 호
그야말로 광풍이 한차례 휘몰아쳤다.
성난 고함을 마구 내지르던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고는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거듭 생각해도 충격이었다.
맹주는 백도 무림 그 자체였다.
한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정월 초하루부터 너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니 새해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맙소사, 나는 아직도 믿기 힘들군. 그 맹주가…… 저리도 악랄한 인간이었다니.”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속았다고 생각하니 기가 차네!”
“게다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니. 정말 갈 데까지 간 인간이 아닌가?”
“나는 그것보다 진천랑이 천살성이 아니었다는 게 더 놀랍군.”
“그러게 말일세. 그럼 진천랑은 아무 잘못도 없이 평생을 그리 도망 다니면서 시달렸다는 뜻 아닌가?”
사람들이 저마다 혀를 내두르며 술렁거린다.
때마침 관중석 한쪽에서 웬 사내가 장삼을 펄럭이며 단상 위로 단숨에 날아왔다.
그는 바로 패력궁 천무류였다.
“자네 말대로 활을 쓰지 않았네.”
천무류가 무뚝뚝한 음성을 흘렸다.
그 역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조금 전 남궁천이 남문각으로 찾아왔던 순간을 떠올렸다.
“한 가지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무엇인가?”
“이 순간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연무장에서 활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활을 쓸 만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한데 활을 쓰지 말라는 이유는?”
“그렇게 쉽게 끝내서는 안 되거든요.”
“……?”
그때까지만 해도 남궁천이 하는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남궁천을 따라 와보았다.
한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맹주가 남궁천에게 집착하는 것이 일종의 정의로운 경계심일 줄 알았다.
진천랑에게 당했던 것이 있었던 만큼, 같은 재능을 가진 남궁천을 너무 예민하게 경계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진천랑조차도 만들어진 악이었다니.
이제야 남궁천의 말뜻이 이해가 간다.
“자네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던 것이었군.”
“그렇습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정했다.
그 표정이 너무나 담담했기에 천무류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복수란 부질없는 것이란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자네 부모가 하늘에서도 기뻐하실 걸세.”
“그럴까요?”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천무류를 보았다.
천무류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맞았다.
지금 자신은 몹시 기뻤으니까.
정말이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 순간부터 맹주는 천하를 두려워하게 되리라.
자신이 느꼈던 그 고독과 공포를 뼈에 새기며 발악하리라.
그 생각을 하면 속이 다 후련하다.
참 멀리도 돌아왔다.
단순히 힘을 키워 죽여 버리는 건 쉽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가 없다. 게다가 또다시 평생을 무림공적으로 살게 되리라.
그래서 이 먼 길을 돌아왔다.
남궁천이 고개를 꺾어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있어? 나, 이만하면 잘한 건가? 오늘따라 당신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겠군.’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마침 천무류가 무거운 목소리를 이었다.
“한데 정말 괜찮겠나? 자네가 제법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맹주는 수십 년간 사람들을 속인 영악한 자일세. 자칫 저대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괜찮습니다. 사흘 내에 잡을 수 있습니다.”
“사흘이라. 왜 하필 사흘인가?”
“제가 정한 시간이니까요.”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는 씨익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광오한 발언이었지만 남궁천이라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지금껏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만 보던 당우기가 남궁천에게 달려와 다그치듯 물었다.
“남궁천! 누님은 어찌 되었나? 누님은 구한 거겠지?”
“누가 보면 내가 네 누님에게 독침 쏜 줄 알겠다?”
“그, 그건 아니지만…….”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턱짓을 했다.
당우기가 남궁천이 가리킨 방향을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당예설이 조금 초췌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당예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누님!”
당우기가 한달음에 달려가 당예설 앞에 무릎을 꿇으며 오열했다.
“누님! 다행이오! 정말 다행이야! 내가…… 내가 누님을 죽인 줄 알고…….”
당우기가 말을 마저 잇지 못하자 당예설이 마주 앉으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우기야. 나는 그래도 네가 돌아와서 기쁘다.”
“누님…….”
당우기가 눅눅하게 젖은 눈길을 들어 올리자, 당예설이 고운 미소를 짓는다.
이 순간 당우기는 오래전 아무 욕망도 없던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소가주니, 맹주니.
뭣이 중하던가?
그 옛날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어주던 누이가 이렇게 살아 있고, 자신은 그 시절의 풋풋한 감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도대체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쫓아서 그리 아등바등 살았던가?
이러한 마음은 후회이기도 했고, 깨달음이기도 했다.
마음이 편해지니 공력의 흐름도 달라지고, 더불어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때론 이렇게 무공의 성취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도 오는 법.
당우기가 눈물을 거두고는 단상 위의 남궁천을 보았다.
이미 남궁천은 단상 위로 오른 총관과 총군사를 상대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남궁천…… 너는 전혀 다른 곳에 있던 녀석이구나.’
새삼 남궁천이 대단하다는 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도 끝까지 이성을 유지한 채로 지금껏 칼을 갈아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학관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오로지 힘을 길러 복수할 생각밖에 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래서 내가 큰일을 하지 못한 것이겠지.’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만 같다.
당우기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던진 당예설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저놈은…… 확실히 보통 녀석이 아닙니다.”
“그래, 나는 진작 알아보았지.”
당예설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당우기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꽃을 보듯 온화한 표정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누님……?”
“응? 왜 그러느냐?”
당예설이 돌아보자, 당우기가 그녀와 남궁천을 잠시 번갈아보다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설마…… 누님……?”
“커흠. 허튼 생각 하지 마라. 그런 게 아니니.”
“아닌 게 아닌데요? 누님 지금 남궁천을 보는 눈빛이…….”
“그럼 또 어떠냐?”
“예?”
“사천당가주가 될 여인이 남궁세가주가 될 남자를 마음에 둔다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지 않느냐?”
“어…… 그렇게 말씀하시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피식.
당예설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당우기의 어깨를 붙들었다.
“우기야. 좋구나. 너와 이렇게 대화할 수 있어서.”
“커흠! 뭐…… 저도 나쁘진 않습니다.”
어느 정도 이성을 차린 당우기가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당우기의 눈빛이 깊어졌다.
‘남궁천, 너라면 내가…… 인정하마.’
한편 관중석에 모인 사람들은 단상으로 올라온 총군사와 총관을 향해 마구 소리치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총군사와 총관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총군사님도 맹주의 저런 짓들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천하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진천랑은 전부 조작이었던 겁니까? 하면 천뇌당이 조작한 겁니까?”
“그렇다면 천뇌당이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조작당이라고 해라!”
“천뇌당주 총군사는 해명해라!”
“삼뇌선이라더니! 삼뇌 중 하나는 조작질에 쓰는 것이냐!”
“해명해라! 해명해라! 해명해라!”
대연무장에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남궁천이 씩 웃으며 총군사 제갈승을 보았다.
“해명하시죠? 성난 군중은 때로 칼보다 무서운 법입니다.”
“끄음…….”
제갈승이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는 슬쩍 귀빈석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던 이세찬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남궁천에게 복종을 맹세했던 지각주였다.
며칠 전 그의 제안으로 진천랑과 관련된 사안을 천뇌당에서 다시 조사한 바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천랑이 천살성이 아니라는 증거를 꽤나 확보할 수 있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제갈승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자신이 위험해지기 전에 맹주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했다.
한데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렇게 시끄럽고 요란하게 처리할 생각은 없었건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성난 군중들이 화살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기 전에 진정시켜야 한다.
“진정해 주시오.”
마침내 제갈승의 입이 열리자 군중들의 외침이 잦아들었다.
제갈승은 심호흡을 하고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먼저 오해를 풀자면, 진천랑과 관련된 사안은 전대 총군사의 선에서 정리된 것이었소. 다만, 며칠 전 본 당은 꽤나 신빙성 있는 제보를 받아 무림공적 일 호였던 진천랑에 대해 다시 재조사에 착수했었소. 그 결과…….”
“…….”
제갈승이 남궁천을 힐끔 돌아보았다. 남궁천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제갈승의 입이 떨어졌다.
“무림공적 일 호였던 진천랑은 천살성을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맙소사…….”
“그럼 평범한 인간이 죄도 없이 온 세상과 싸운 거란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만! 그럼 혹시 천하제일룡이었던 남궁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와 함께 다녔던 거고!”
“옳소! 남궁선은 사실 진실을 깨달은 자였던 거지! 그녀가 백도 무림을 배신한 게 아니었던 거야!”
“이런! 맹주 때문에 백도 무림이 큰 가문을 희생할 뻔했구나!”
사람들의 탄식과 진득한 아쉬움이 구름처럼 대연무장을 떠돈다.
남궁천은 내심 조소를 지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물론 이들이 가식을 부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도 공범이지 않던가?
사람들은 진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았다.
권력자가 규정한 대로 믿기만 하고 어떠한 의문도 제시하지 않았다.
생각을 끄고 그저 순응하기만 했다. 선동당하고, 다시 또 선동하고, 손가락질하며 욕을 해댔다.
남궁천은 잊을 수 없었다.
전생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온갖 경멸과 혐오를 담아서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하던 그 시선들을.
하지만 이들은 모른다.
그것 또한 가해라는 것을.
군중의 심리란 이렇듯 때론 지성이 없는 생물 같다.
그러니 이용할 수밖에.
맹주가 그러했듯이 지금은 자신이 이용할 수밖에.
하나 자신은 오로지 진실을 이용하리라.
군중의 목소리에 제갈승은 다시 착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몇몇 분들이 말씀하셨듯이 남궁선은 진천랑이 천살성을 타고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소. 본 당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맹주님…… 맹주가 남궁선을 청부 살해한 정황이 있었소.”
“그런 악랄한……!”
“맹주를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한다!”
“그 악마 같은 인간에게 천벌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이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절대로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여론도 이렇듯 계기가 확실하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법.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총관은 등골이 서늘했다.
‘남궁천…… 여기까지 준비를 해두었다니. 총군사까지 움직였을 줄이야!’
만약 자신이 끝까지 맹주를 두둔했다면? 아마 그땐 자신도 같이 묻혀 버렸으리라.
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던 맹주가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맹주를 사로잡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쉽게 끝낼 수는 없다는 듯이.
‘참으로 무서운 자로다. 자네가 노리는 것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혹시 날 구제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진실을 밝히기 위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