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똥줄이 탄다
맹주의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소. 하나 본 맹은 늘 그래왔듯이 강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최선을 다했소. 그 결과 수십 년을 준비해 왔을 흑무련이 강호를 장악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소!”
“우오오오!”
갈채가 터져 나온다.
묵천악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흐뭇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단순하다.
흑무련이 강호 북쪽을 집어삼킨 상황임에도 단어 몇 개 바꾸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니 이렇듯 단순하게 넘어가지 않는가?
신년이라는 특유의 분위기와 쾌청한 날씨도 그의 연설을 돕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순리다. 하늘이 나를 돕고, 새해가 나를 돕는다. 올해는 나의 해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껏 맹주로서 강호 평화를 위해 단 하루도 고뇌하지 않은 날이 없었소. 어찌하면 이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 어찌하면 예전처럼 흑도와 마도 무리가 설치지 못하도록 할까? 과거 흑도와 마도는 양민을 핍박하고 살인, 강간, 납치를 일삼았소. 하나 이제 그들은 없소. 아니, 최소한 어딘가에 있더라도 그런 짓을 함부로 하지 못하오. 바로 본 맹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오!”
“와아아아아아!”
“만세! 만세! 만만세!”
“물론 어려운 시기도 있었소. 과거 천하대살성 진천랑이 살아 있을 때, 본 맹의 수많은 무인이 그에게 희생당했소. 하나 결국 우리는 그의 죄를 죽음으로 물었고, 오히려 그의 아들은 본 맹의 뜻에 깊이 공감하여 정의의 사도가 되었소. 그런데…… 그것이 나의 큰 실수가 될 줄은 미처 몰랐소.”
맹주가 잠시 말을 끊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실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강호신룡이 적랑단주로서 부족하단 건가?”
“그럴 리가.”
적당한 긴장감이 감돌 때, 맹주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며칠 전 적랑단주에게 한 가지 비밀 임무를 맡겼소. 그건 바로 천중산 흑무련 분타를 급습하여 정예 부대를 섬멸하는 것이었소.”
“아아.”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
“설마 실패한 건가?”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묵천악이 그 반응을 즐기듯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강호신룡을 믿었소. 일전에 난투전이 벌어져 그에게 실수를 한 적이 있지만, 내심은 그가 본 맹의 정의를 지켜주리라 믿었소. 한데…… 오늘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소.”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묵천악이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잠시 후 적랑단이 돌아올 거요.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생환자들이 증언해 줄 거요. 나도 아직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소.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오. 그 어떤 존재라도 본 맹의 정의를 위협하거나, 강호의 평화를 짓밟으려고 한다면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오.”
묵천악의 시선이 관중석 한 곳으로 향했다. 금왕이 천막까지 쳐서 만든 자리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맹주는 지금 남궁검을 보고 있었다.
마침 옆에 서 있던 총관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내자, 염라단이 갑자기 관중석으로 쏟아지듯 들어오더니 남궁세가 인근으로 포진했다.
실로 묘한 상황이었다.
맹주가 신년 연설을 하다 말고 갑자기 비밀 임무에 대해 말하더니 염라단을 투입해서 남궁세가를 포위하다니?
“아아, 다들 너무 놀라실 것 없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니.”
묵천악이 진정을 시키는 사이, 대연무장 복판으로 무인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와 소리쳤다.
“맹주님! 보고드립니다! 천중산으로 비밀 임무를 받아 떠났던 적랑단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막 남문을 지났다는 보고입니다!”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오, 마침내 온 건가!”
“자초지종을 알 수 있겠구나!”
“적랑단이 흑무련 분타를 완전히 박살 냈어야 할 텐데!”
그때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대연무장 정문이 열리면서 적랑단원들이 달려 들어온 것이다.
부단주 당우기를 비롯해 십여 명의 생존자들이었다.
그들 모두 피로 얼룩지고 여기저기 찢어진 무복을 입고 있었기에 얼마나 거친 난전을 헤쳐 나왔는지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흥분하던 사람들조차 그들의 행색을 보고는 절로 숙연한 기분이 들어 말을 아꼈다.
부단주 당우기가 대연무장 복판에 다다라서는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맹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적랑단 부단주, 당우기! 흑무련 분타를 궤멸하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였습니다!”
“우와아아아아!”
“적랑단! 만세! 적랑단주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사람들이 환호하자, 잠시 뜸을 들이던 맹주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그가 당우기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고생했네. 한데 적랑단주는 어찌 되었는가? 어째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또한 다른 단원들은 어찌 된 건가?”
그러자 당우기가 바닥에 이마를 쿵 찧으며 소리쳤다.
“적랑단주 남궁천은 본 맹을 배신하고 흑무련과 손을 잡았습니다! 하여 제가 적랑단주를 죽이고 단원들을 이끌어 임무를 완수한 후 귀환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가 치열하여 생환자의 수가…….”
당우기가 감정에 복받쳤는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묵천악의 표정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게 정말인가? 그러잖아도 자네의 보고를 듣고 믿을 수 없어서 기다리고 있던 차였는데…… 정말 남궁천 단주가 본 맹을 배신했단 말인가?”
이쯤 되자 대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만 보았다.
모두들 충격에 빠져서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당우기가 다시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본 단의 이동 경위가 모두 노출이 되었고, 이는 단주 남궁천의 짓이었습니다! 본 단이 천중산 분타를 기습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흑무련주와 남궁천이 서로 만나서 나란히 웃고 있었지요. 이에 저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남궁천 단주를 암습하여 죽였습니다! 생포하여 귀환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자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하면 그 이후에는 어찌 된 건가?”
“흑무련 놈들과 본 단이 격돌했고, 저는 단원들을 이끌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그 결과 분타를 궤멸시킬 수 있었으나, 흑무련주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본 단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아서 겨우 저희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당우기가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가 연신 이마를 찧어댔다.
마치 자책이라도 하는 듯.
그러면서 그는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잊은 채 속으로 뇌까렸다.
‘남궁천! 아직이냐? 언제 오는 것이냐? 네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나는…… 가문을 위해서라도 널 이대로 배신자로 만들 수밖에 없다! 네가 내게 정녕 모든 걸 걸었다면 늦지 않게 와다오!’
그래야만 누이가 산다.
자신을 대신해 몸을 날리던 당예설의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장내가 침묵에 잠긴 가운데 맹주가 비틀거리면서 난간을 짚었다.
옆에서 총관이 얼른 부축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묵천악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심호흡을 했다.
관중석에 모인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맹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맹주의 입에서 보고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맹주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겉으로는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는 맹주였다.
자신이 기다리던 가장 완벽한 결과가 아니던가?
때마침 남궁세가를 포위하고 있던 염라단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차차차앙!
염라단원들이 살기를 풀풀 휘날리며 노려보았지만, 남궁세가 사람들은 시종 차분한 자세를 유지했다.
오히려 그 주변에 있는 양민들이 더 놀란 표정으로 두런거렸다.
“정말 남궁세가가 배신한 건가?”
“아니지. 강호신룡만 배신한 건지도 모르잖아?”
“이 사람아, 도대체 언제까지 강호신룡이야? 방금 못 들었어? 대살성의 자식 놈이 우리를 배신했다잖아!”
“그럼 남궁세가도 이제 끝이네.”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들.
묵천악의 귀는 그 목소리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입매가 자꾸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람들이 너무 단순하다고?
고작 이런 일로 저렇게 여론이 휘청이는 게 이상하다고?
그건 세상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의외로 민중은 단순하다.
그들은 개돼지나 다름없다.
언제든지 흥분하고 광기에 취할 준비가 된 자들이 바로 군중들이다.
아주 살짝 바람만 불어넣으면 알아서 선동된다.
그들은 선동을 즐기기 때문이다.
보아라.
지금도 소수의 믿음이 전체로 확산되어 가지 않는가?
사실 처음 그 씨앗을 뿌린 것은 맹주가 심어놓은 군중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군중들이 알아서 불씨를 퍼트리고 있다.
거기에 남궁천에게는 낙인이 있다.
바로 천하대살성의 혈육이라는 것!
그 선입견이 기름이 되어 불씨가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그게 인간이다.
‘참으로 웃기단 말이지. 인간들이 모이면 하향평준화가 되니.’
즐거운 생각을 마친 묵천악이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오기 전에 이미 보고를 들어 짐작은 했으나…… 그 보고가 틀렸길 바랐다네. 한데…… 그게 모두 사실이었다니. 정녕 남궁천이 본 맹을 배신했단 말인가?”
그러자 이번엔 정문에서 또 다른 인물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사실입니다, 맹주님!”
비틀거리면서 달려오는 자는 다름 아닌 비선향주였다. 그 역시 난전 속에서 다친 것인지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친 다리 때문에 다소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향주!”
그러자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술렁거렸다.
“향주라니? 누구지?”
“맹주님의 직속 비밀 타격대가 아닐까?”
묵천악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테니.
비선향의 존재가 밝혀진 만큼 다른 조직을 또 키우면 그만이다.
설혹 직속 비밀 조직을 만들지 못해도 상관없다.
진천랑만 확실히 묻어버릴 수만 있다면.
묵천악이 단숨에 난감을 밟고 올라서더니 대연무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파라라라라!
그가 화려한 동작으로 대연무장 단상에 내려섰다.
마침 비선향주가 단상으로 올라오더니 무릎을 척 꿇으며 포권했다.
“비선향주, 맹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적랑단주가 본 맹을 배신하고 적랑단을 위험에 빠트린 것을 속하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단주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묵천악은 더 없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그런……!”
“죄송합니다, 맹주님! 속하, 동료들을 더 구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홀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쿵!
비선향주가 또 이마를 찧는다.
즐거운 축제가 되어야 할 신년 행사가 졸지에 초상집 분위기처럼 싸늘해졌다.
물론 맹주만은 제외하고.
묵천악은 기뻐서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애써 기분을 억눌렀다.
정말이지 비선향주마저 이렇게까지 잘 해줄 줄 몰랐다.
원래 비선향주가 이만큼이나 연기력이 뛰어났던가?
이래서야 경극 배우로 추천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 아닌가?
묵천악이 날아갈 듯한 심정을 갈무리하면서 무거운 음성을 흘렸다.
“아닐세. 다 내 책임일세. 내가 너무 물렀네. 나는 강호신룡이 본 맹을 위기에서 구해줄 영웅이 될 거라고 믿었네. 한데 이런 비극이 일어날 줄이야. 내 부덕의 소치일세!”
맹주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구슬펐다. 공력을 담아서 묘한 울림까지 주었기에 그의 발언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맹주님! 아닙니다! 맹주님은 사람을 믿은 것일 뿐입니다!”
“옳소! 맹주님은 강호 평화의 상징입니다! 부디 자책을 거두소서!”
“우리는 맹주님을 믿습니다! 맹주님이야말로 정도 무림 그 자체이십니다!”
“맹주님! 맹주님! 맹주님!”
사람들이 맹주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크크크! 보았느냐? 진천랑! 이게 나다! 바로 이런 모습이 진정 나란 말이다!’
묵천악이 기쁜 마음을 숨긴 채 날카롭게 명령했다.
“염라단은 들어라!”
“예, 맹주님!”
“본 맹을 기만하고 사악한 흑무련과 손을 잡은 남궁세가를 모두 체포해라! 이 시간부터 남궁세가는 백도 무림의 공적이다!”
“옛!”
염라단이 일제히 대답하며 더욱 살기를 피우자, 남궁표가 좌우로 눈을 굴리면서 소리쳤다.
“이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거냐!”
“참아라. 표야.”
남궁검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남궁표가 발끈했다.
“하지만 형님! 지금 상황이 점점……!”
“믿어라. 소가주를.”
“끄응.”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 와중에도 당우기는 정말이지 똥줄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남궁천!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인가! 이제 곧 정오를 넘긴단 말이다! 정오를 넘기면……!’
당예설의 몸에 검은 반점 하나가 더 생기면서 목숨을 잃게 되리라.
하늘이여, 어찌도 이리 잔혹하나이까?
차라리 절 벌 주소서!
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하늘이시여!
당우기가 고개를 꺾어 들고 천중을 향해 다가서는 쨍한 태양을 보았다.
그때였다.
삐이이이익!
청명한 울음소리가 창공을 떨쳐 울리더니, 일순 커다랗고 푸른 매 한 마리가 태양을 가리며 지나쳤다.
당우기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건……!’
드디어 왔구나!
남궁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