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똥줄이 탄다
“어어…… 너는…… 그 싸가지…….”
“오랜만이오, 영감. 후우우.”
남궁천이 길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독노가 영 불길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야 영감을 따라왔으니까.”
“으응? 날 따라와? 왜? 아니, 어떻게?”
“그야 뻔한 것 아니겠어?”
남궁천이 말을 마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추향응이 푸드득 날아올라 남궁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천독노가 입을 딱 벌리고는 추향응을 가리켰다.
“어어? 저 개새……! 뭐야? 그럼 저 개새를 데려온 게 너였던 거냐?”
“나지.”
“설마 그 말은…… 네놈이 나한테 만리향을 묻혔다는 거야?”
“그렇지. 칠칠맞게 만리향이나 묻히고 다닐 인간이 영감 말고 또 있을까?”
“아니, 도대체 언제……! 아참, 그보다 저 개새 이리 내놔라!”
“뭔 소리야? 내 반려조를 왜 영감한테 내놔?”
“네놈의 개새가 내 독단을 가져갔단 말이다!”
“그래? 추향아, 너 독단 가져갔냐?”
남궁천이 어깨에 앉은 매에게 묻자, 추향응이 고개를 휙 돌려 먼 산을 본다.
“……안 그랬다는데?”
“저, 저, 저……! 짐승 주제에 시치미를 떼다니!”
“진정하라고. 추향응이 독단을 먹었으면 벌써 비실거려야 할 것 아냐.”
“흥! 저놈은 사천당가에서 기른 녀석이 아니더냐? 평소 먹고 자라는 것이 온갖 독충일 텐데. 독에 대한 내성만큼은 어지간한 영물 뺨칠 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사천당가에서 나오는 건 개미도 건드리지 말란 말이 있지 않던가?
그렇다고 추향응의 배를 가르게 할 수는 없는 일.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먹이사슬 같은 거라고 생각해. 원래 세상이 다 먹고 먹히는 관계잖아.”
“뭔 개소리야!”
“뭐, 어쨌거나 만약 지금 이 녀석의 배를 가르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지만, 평생 사천당가의 숙적이 될 걸?”
“끄응…… 아오! 염병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일생에 도움이 안 될 놈!”
“거,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건데. 말이 너무 심하네. 기껏 좋은 소식 가지고 왔는데 이렇게 박대하니 그냥 돌아가야겠군!”
남궁천이 휙 돌아서자, 천독노가 움찔거리더니 얼른 불러 세웠다.
“잠, 잠깐!”
“뭐야?”
“왜 날 찾아온 거냐? 아니, 그보다 도대체 언제 나한테 만리향을 묻힌 거냐?”
“영감하고 헤어질 때지. 영감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무슨 소리! 세상은 못 믿어도 나만큼은 믿어도 되지. 아무튼 추향응까지 불러서 온 거면 용건이 있을 것 아니냐?”
“궁금해?”
“끄음.”
천독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속내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왠지 사실대로 말하면 뭔가 질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 녀석은 이상하게 나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지.’
천독노가 고민하는 사이 남궁천이 다시 돌아섰다.
“안 궁금하면 그냥 가고.”
허!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추향응까지 부려서 자신을 쫓아왔으니 당연히 용건을 말할 수밖에 없을 거다.
한데 저놈이 또 배짱을 부리면 정말로 이대로 돌아가고도 남을 것 같다.
누가 진천랑 아들 아니랄까 봐!
진천랑도 딱 저랬다.
그래서 항상 진천랑과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천독노는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궁, 궁금하니까 말해라.”
“뭐, 궁금하다니까 말할게, 그럼.”
“그래, 무슨 용무냐?”
“만능 해독제 좀 줘.”
“뭐, 뭣?”
“이번에 만든 거. 만능 해독제 좀 달라고.”
“아니, 네놈이 그걸 어떻게…… 흡.”
천독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제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역시.’
천독노가 눈알을 부라리며 시치미를 뗐다.
“뭔 개소리를 하는 게야?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천하의 천독노니까.”
“그건 그렇지만……!”
“세상에서 다루지 못할 독이 없는 천독노니까.”
“그렇긴 하지만……!”
“쌍두오독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물론 그도 그렇지만…… 잠깐, 너 그건 어떻게 안 거냐?”
“아버지한테 들었지.”
“아버지? 진천랑?”
“응. 꿈에 나타나서 그러시더라고. 만능 해독제가 필요하면 천독노를 찾으라고. 쌍두오독으로 그걸 만들었을 거라고.”
“허어…….”
이쯤 되자 천독노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가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니미럴, 정말 보고 있나?’
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천독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만능 해독제를 맡겨 놨냐? 뭘 다짜고짜 내놓으라 마라야?”
“어? 세상은 몰라도 천독노는 믿으라며. 한 번은 날 도와주기로 했을 텐데? 사실은 내가 도와주는 거지만.”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네가 날 도와주다니?”
“만능 해독제. 그거 확실한 거야?”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시험해 봤어?”
“그건……! 끄음.”
천독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만능 해독제를 제조했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남궁천의 말대로 아직 시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천독노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신이 아는 한 완벽한 배율을 이용해서 만든 해독제다.
세상의 그 어떤 독성도 이 단환 한 알만 먹으면 전부 용해될 거라고 자부한다.
그렇다고…….
‘내가 먹어볼 수는 없잖아? 끙.’
만능 해독제의 진정한 효력을 알고 싶다면 정말 지독한 독을 복용해야만 한다.
뭐, 눈 딱 감고 시험해 보려고 하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바로 그만한 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만능 해독제를 제대로 시험하려면 적어도 천독노 자신이 만든 독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런 독을 구하기가 어렵다.
이런 속사정을 이미 눈치챈 것인지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만들었으면 얼른 시험해 봐야 할 것 아냐?”
“시끄럽다! 독을 구하기가 쉬운 줄 알아? 독은 뭐 그저 굴러떨어지더냐? 웬만큼 효능이 괜찮은 독단은 한 알에 전각 서너 채 값은 족히 나간다.”
“과연. 그래서 내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거야.”
“뭔 소리냐?”
“시험할 기회를 제공해 주지.”
“뭣이?”
“그래. 흑성칠주야독 정도면 시험해볼 만하지 않아?”
순간 천독노의 눈빛이 반짝였다.
흑성칠주야독이라니.
“독신이 만든 흑성칠주야독 말이더냐?”
“그래.”
“너 설마…… 흑성칠주야독에 중독된…… 아니지, 그럼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리가 없지. 흑성칠주야독이면 인지력에 따라 엄청난 효능이 있으니. 게다가 네놈은 이미 만독불침지체일 테니까.”
“호오, 내가 만독불침지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당연히 네놈이 여기 있다는 건 천마신단을 소화했다는 것 아니냐? 그럼 네놈은 만독불침지체가 되었을 테지.”
남궁천이 잠시 감탄한 표정으로 천독노를 보았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독에 대한 지식만큼은 사천당가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운명이 천독노를 무림공적으로 만들었다.
누군 좋은 가문에 태어나서 재능이 없어도 득실거리는 욕망에 난리를 치는데, 누군 재능이 있어도 흙수저로 태어나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야 하다니.
인생이란 참으로 기묘하지 않은가?
남궁천이 상념을 떨치고는 말했다.
“아무튼 기껏 만든 만능 해독제가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할 기회를 제공해 주려는데. 어때?”
“커험! 고민 좀 해보마.”
“시간 없는데.”
“언제 중독됐는데?”
“나흘 전에. 이제 사흘 남았지.”
“환자는?”
“지금쯤 무한에 있을 거야.”
“그렇군. 무…… 콜록, 콜록! 뭐, 뭐라고? 어디라고?”
“무한에 있다고.”
“무한? 무한! 야이, 미친놈아! 사흘 밖에 안 남았는데 환자가 무한에 있다고?”
“그래서 말했잖아.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아니, 그걸 이제 말해? 너 급한 놈 맞아?”
“안 급한데? 내가 죽는 것도 아니니까.”
“허어!”
과연 대살성 진천랑의 아들답다.
이쯤 되자 조바심이 나는 건 천독노였다.
그가 품을 뒤지더니 단환 한 알을 휙 집어 던졌다.
“받아라. 만능 해독제다. 당장 가서 시험해 봐!”
“정 그렇게 부탁한다니까 들어줄게.”
“허! 누가 누구한테 부탁을 하는 건지, 원.”
“그야 영감이 나한테 부탁하는 거지.”
“아, 알았으니까 썩 꺼져!”
“그럼 무한에서 보자고. 신룡객잔을 찾아오도록.”
“잠깐!”
“또 뭐야?”
“이거 먹어라.”
천독노가 다시 품 안에서 누런 단환을 꺼내 휙 던졌다.
남궁천이 얼른 낚아채고는 물었다.
“이게 뭔데?”
“쾌환단(快環團)이다. 네 공력을 빠르게 회전시켜 줄 거다.”
“그거라면 이미 백령단이 있는데.”
“본좌가 만든 걸 그딴 허접한 영단과 비교하지 마라. 몸엔 조금 나쁠지언정 훨씬 효과가 좋을 테니까.”
“좋아, 그럼 진짜 갈 테니 무한에서 보자고!”
말을 마친 남궁천이 쾌환단을 입에 털어 넣더니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쌔애애애애앵!
한 차례 바람이 휙 불더니 이내 남궁천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텅 빈 곳에서 멍하니 눈만 끔뻑이던 천독노가 뒤늦게 발끈해서 소리쳤다.
“엇! 저 개새……! 야이, 개새야! 너는 왜 가는 거야? 이리 안 와!”
천독노가 길길이 날뛰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정월 초하루.
며칠간 눈만 뿌리던 하늘이 신년을 반기듯 모처럼 쾌청했다.
하지만 거리에는 아직도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무림맹으로 향했다.
무한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무림맹으로 가고 있었다.
맹주의 신년 인사를 듣고 나면 무림맹 최고 숙수가 직접 만든 만두를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네, 그거 들었나?”
“뭘 말인가?”
“이번에 임명된 적랑단주가 비밀리에 명을 받고 흑무련을 치러 갔다더군.”
“허어,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네. 어쩌면 오늘 복귀할 지도 모른다는데?”
“만약 무사히 복귀한다면 정월 초하루부터 희소식이 되겠군.”
“하지만 헛소문일지도 모르지.”
“하긴. 강호에선 두 눈으로 본 게 아니면 믿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두런거리는 사람들이 무림맹 대연무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귀빈석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던 묵천악이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명의 날이군.’
과연 하늘은 자신을 택할 것인가, 남궁천을 택할 것인가?
그때 마침 총관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맹주님!”
“무슨 일인가?”
묵천악이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가누며 물었다.
총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보고했다.
“부단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당우기가?”
“예, 지금 무한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비선향주와 함께 있답니다!”
“마침내! 하면 곧 이곳으로 도착한단 말인가?”
“예! 지금부터 신년 연설을 시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후에 부단주가 돌아오면 모든 것이 맹주님의 뜻대로 돌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군.”
묵천악의 입매가 길게 찢어졌다.
그래, 오늘 만큼은 마음껏 웃어도 좋으리라.
새해가 아니던가?
모든 걸 잊고 새 출발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지난날의 고뇌는 이제 말끔히 떨쳐 버리고, 기쁨으로 새해를 맞이할 순간이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총관, 그동안 고생 많았네.”
“저보단 맹주님이 고생하셨지요.”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곤 난간으로 걸어갔다.
마침 맹주의 모습이 난간 위에 드러나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이목을 모았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맹주님! 강호 평화를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맹주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맹주를 부르짖었다.
맹주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일상이 아니던가?
자신은 저들에게 강호 정의의 상징이다.
보아라, 진천랑!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
묵천악이 입매를 길게 찢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침내 잠잠해지자 그가 공력을 담은 음성을 흘려냈다.
“강호 동도 여러분. 마침내 새로운 날이 밝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