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똥줄이 탄다
묵천악은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밤새 내린 눈이 제법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눈 덮인 무림맹의 경치는 여느 때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마침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총관이 막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간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모처럼 푹 잤네. 자네는 좀 어떤가?”
“저도 잘 쉬었습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꿈을 꾸었지.”
“주제넘지만 감히 여쭤봐도 될는지요?”
“허허. 안 될 것도 없지. 곧 정월 초하루가 아닌가? 신년을 맞이해서 무림공적을 발표하는 꿈을 꾸었네.”
“그 명단에 남궁천이 들어있었습니까?”
“아니. 없었네.”
“한데 어찌 좋은 꿈이라 하십니까?”
“그야…… 남궁천이 죽었다는 뜻일 테니까.”
“아…….”
총관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간밤에 특별한 일은 없었나?”
“예,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잘됐군.”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만약 비선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면 필시 뭔가 잘못됐다는 소식일 터였다.
하나 아직까지 잠잠하다는 것은 계획대로 일이 돌아간다는 뜻이리라.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이대로면 그들이 정월 초하루에 복귀하겠어.”
“그럴 겁니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을 제거하는 일이다.
전서구나 전령을 이용하는 것은 자칫 민감한 정보가 새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어차피 급보는 일이 잘못 돌아갈 때나 위험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공했을 때의 보고는 대면으로 진행해도 충분하다.
묵천악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했다.
“내일까지 소식이 없다면 모든 일이 잘 풀렸다는 뜻일 터.”
“그때가 되면 남궁천은 본 맹을 속이고 흑무련과 손을 잡은 인물이 되어 있겠군요. 남궁가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요.”
“그렇지.”
묵천악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물론 계획에 전혀 차질이 생기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남궁천이 중독 상태로 귀환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아쉽지만 남궁천을 배신자로 낙인찍기는 어려워진다.
대신 남궁천의 죽음을 빌미로 정파의 결속을 도모할 수는 있으리라.
어쨌거나 가장 좋은 결과는 남궁천이 현장에서 죽어버리고, 배신자라는 누명까지 덮어쓰는 것이다. 증언은 당우기가 해줄 테고.
그렇게만 되면 앓던 이가 쑥 빠진 기분이 아니겠나?
묵천악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요하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간다.
그간 남궁천의 업적을 다 묻어버리겠다는 듯이.
왠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 *
“으음…….”
침상에 누운 당예설이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당우기가 움찔거리며 눈을 떴다.
“누님?”
하지만 당예설은 곧 혼곤한 잠에 빠져들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고통 때문인지 눈자위를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당우기가 손을 뻗어 당예설의 이마를 만졌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그는 얼른 수건을 물에 적셔서 당예설의 이마에 올려두고는 다시 손을 잡았다.
“누님…… 일어나. 반드시. 이대로 죽으면 절대 안 돼.”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독한 적막이 그를 감쌌다.
예전 같았으면 아버지에게 혼날 걱정부터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혼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사무치는 후회에 가슴만 미어졌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항상 남 탓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마침 문이 열리면서 덩치 큰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귀왕이었다.
“커흠. 뭐 필요한 것 있수?”
“없소.”
“그럼 됐고.”
귀왕이 퉁명스레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방을 빠져나가려던 그가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나만 알아두시오. 나는 당신이 맘에 안 들어. 하지만 주군의 명이라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준 거요. 만약 당신이 주군을 배신한다면 그땐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당우기가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대꾸했다.
“명심하겠소.”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고.”
귀왕이 빠져나가고 나자 당우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당예설을 돌아보았다.
“누님. 남궁천은 정말 많은 이들을 거느리고 있군요. 어째서 아버지와 누님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 같아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손우곤을 따라 남몰래 무한으로 들어왔을 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나 맹주가 눈치채지 않도록 은밀하게 무한으로 들어왔어야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등하로를 이용한 것이다.
무한에 그처럼 무지막지한 지하 통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길은 무림맹으로도 이어져 있고, 고관대작의 집 안마당은 물론, 이곳 신룡객잔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등하로를 통해서 가지 못할 곳이 없을 듯했다.
한데 그 등하로를 관리하는 조직의 주인도 남궁천이라니.
자신이 치기 어린 마음으로 반항심만 키우고 있을 때, 남궁천은 상상도 못 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은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남궁천…… 누님을 살려다오. 그러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테니.’
당우기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당예설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벌써 나흘이 지났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단 사흘.
어디로 갔든지 지금쯤 남궁천은 돌아오고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예설은 흑성칠주야독이 온몸에 퍼져 죽을 수밖에 없다.
‘남궁천…… 부탁한다!’
* * *
삐이이익!
창공에서 날카로우면서도 청명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아이가 눈발을 가로지르는 푸른 매를 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푸른 매예요!”
“응? 허어, 정말 그렇구나. 저렇게 영롱한 색을 지닌 매는 처음 보는구나.”
그런데 그 순간,
쌔애애애애앵!
“어이쿠!”
“우앗!”
순간 질풍이 불어와서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닌가?
자칫 넘어질 뻔한 두 사람이 겨우 중심을 잡았다. 노인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들며 멍하니 물었다.
“방금…… 뭐가 지나갔느냐?”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그냥 바람이 분 것 같기도 하고…….”
“참 희한한 일이로고.”
노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푸른 매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한편, 노인과 아이를 지나친 남궁천은 정말이지 빛살 같은 속도로 쉼 없이 내달렸다.
‘아오, 이 영감탱이! 멀리도 갔네. 잡히기만 해 봐! 아주 그냥……!’
천독노가 딱히 일부러 달아난 것도 아니건만, 괜히 괘씸한 생각이 드는 남궁천이었다.
* * *
취리리릿!
바위틈을 미끄러져 나온 뱀이 연신 혀를 날름거린다.
한데 뱀의 생김새가 다소 독특하다.
정확히 몸통의 절반은 피처럼 붉었고, 다른 절반은 눈처럼 하얬다.
녀석은 바로 영물 중에서도 강력한 독단을 품고 있는 음양비사(陰陽飛蛇)였다.
녀석이 대가리를 꼿꼿하게 들더니 자신을 노려보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취릿!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는 듯 위협적으로 날름거리는 혀.
음양비사와 대적하고 있는 노인은 다름 아닌 천독노였다.
“옳지, 착하다. 그렇게 가만히 있거라.”
천독노가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천천히 움직인다.
취릿!
음양비사가 허튼짓 말라고 경고라도 하듯이 섬뜩한 소리를 내지르며 미끄러진다.
“자자, 착하지? 아프지 않게 다뤄줄 테니 얌전히 잡히지 않으련?”
하나 그런 말이 통할 리 없다.
취리리릿!
찰나지간 음양비사가 몸을 던져왔다.
“칫!”
천독노가 재빨리 허리를 젖히면서 손을 뻗었다.
콱!
목이 붙잡힌 음양비사가 천독노의 팔을 친친 감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게 아프지 않게 다룬다고 하지 않았느냐?”
천독노가 손아귀에 힘을 실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단도를 꺼내 들었다.
푹! 푹! 푹!
연이어 뱀을 내리찍자 마침내 머리가 잘려 나간 녀석이 연신 이리저리 몸을 꼬며 퍼덕거린다.
“후우, 빌어먹을. 이럴 것까지 없었잖냐?”
천독노는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닦아내고는 손에 들린 뱀 대가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한참이 지나자 잘려 나간 몸통도 기운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천독노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단도로 뱀의 사체를 가르기 시작했다.
“독단, 독단. 내 사랑 독단.”
되지도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천독노.
삐이이익!
그때, 장단에 어울리듯 하늘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음양비사를 해체하던 천독노가 고개를 꺾어 들고는 푸른 매를 보았다.
“으음? 저 녀석은 추향응?”
저만한 덩치의 푸른 매라면 역시 사천당가의 추향응일 터.
아마 사천당가가 근방에서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으리라.
“허허,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잡히는 건 시간문제겠구나. 으이구, 칠칠맞게 만리향이나 묻히고 다니다니. 누군지 몰라도 잡혀도 싸다, 잡혀도 싸. 쯧쯧.”
천독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음양비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뱀의 뱃가죽을 길게 가르자 싯누런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는 바닥에 닿자마자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치이이익.
“거, 냄새 한 번 지독하구나. 하지만 냄새가 이리 지독하다는 건 그만큼 독단도 쓸 만하단 거지!”
휘파람까지 분 천독노가 이내 뱀의 사체에서 흰색과 붉은색이 뒤 섞인 구슬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갓난아기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음양비사의 내단이었다.
“오호, 역시 쓸 만하구나.”
천독노가 히죽 입매를 말아 올렸다.
만약 천독노가 아닌 범인이 이 내단을 만졌다면 그 즉시 중독되어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리라.
하나 독을 물처럼 다루는 천독노였다.
그런데 그때,
삐이이익!
청명한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더니 하늘을 배회하던 푸른 매가 갑자기 천독노 머리 위로 내려앉는 게 아닌가?
푸드드득!
“으응? 뭐야? 이건?”
천독노가 눈을 치뜨는데, 추향응이 냅다 음양비사의 내단을 입으로 물었다.
“어엇! 이, 이놈! 무슨 짓이냐?”
화들짝 놀란 천독노가 독기를 끌어 올리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추향응이 재빨리 날아올라서는 옆의 바위로 날아갔다.
천독노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
“착하지? 얘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네가 잡을 놈을 따라가야지? 응? 너 이러면 직무유기야. 그 독단은 얌전히 내려놓고 네 갈 길을 가려무나.”
하나 추향응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부리로 까딱거리던 추향응이 마침내 고개를 꺾어 들더니 단숨에 독단을 삼키는 게 아닌가?
꿀꺽!
“응? 꿀꺽……? 꿀꺽이라니?”
순간 눈이 돌아간 천독노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아니, 이 새 새끼야! 그게 뭔 줄 알고! 당장 토해내! 이 개새야! 내가 오늘 네놈 뱃가죽을 갈라서라도……!”
“누구 마음대로…… 뱃가죽을 가른대? 헉, 헉……!”
“으응?”
돌연 들린 목소리에 천독노가 영 기분 나쁜 예감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남궁천이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오, 영감탱이! 멀리까지도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