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똥줄이 탄다
남궁천이 눈물범벅이 된 당우기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맹주가 또 뭘 준비했어?”
“……!”
움찔거린 당우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또 무슨 고민을 한단 말인가?
남궁천은 그야말로 괴물이다.
어떠한 계략도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누이를 살리고 볼 일이 아닌가?
“비선향이 따라왔습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솔직해졌네.”
당우기가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놀라지 않아? 설마…… 이미 알고 있었단 건가?’
* * *
일각 전.
산채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언덕 위.
“향주,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확실히.”
비선향주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살을 가늘게 여몄다.
남궁천이 적랑단을 이끌고 산채를 급습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예상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산채가 불에 타고 있음에도 흑무련 무인들이 남궁천과 적랑단을 공격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군.”
“어떻게 하죠?”
“흐음.”
침음을 흘린 비선향주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이상 무리를 하기보다는 이곳을 빠져나가 맹주에게 사실을 아뢰는 것이 급선무리라.
“돌아간다. 계획은 실패다.”
“존명!”
비선향주의 명에 따라 비선향원들이 일제히 몸을 빼내려고 할 때였다.
“쥐새끼가 그렇게 대놓고 찍찍대면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눈치를 채게 되잖아.”
돌연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비선향주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면서 외쳤다.
“누구냣!”
하지만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육합전성을 이용해서 말을 이었다.
“누구긴 누구겠나? 네 선배지.”
“선배……? 미친. 모습을 드러내고……!”
소리치던 비선향주는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푹!
“꺽!”
푸푹!
“악!”
“윽!”
언제 어떻게 당한 것인지 사방에 몸을 숨긴 부하들이 단 일격에 당해서 쓰러지고 있었다.
‘이건…… 살수의 수법!’
비선향주가 눈매를 꿈틀거리고는 소리쳤다.
“조심해라! 살수다!”
그 직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의 비선향원이 적의 검에 목숨을 잃은 상황.
“칫!”
비선향주가 바닥을 차고 날아가려는데, 마침 그 앞으로 한 사내가 뚝 떨어져 내렸다.
츠츠츠츠츳!
미끄러지다시피 멈춰 선 비선향주가 눈앞에 나타난 사내를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신은……!”
“말했잖아? 네 선배라고.”
눈매를 휘며 상큼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비량이었다.
다음 순간 비량의 눈빛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바닥을 차며 귀신처럼 날아들었다.
쉬이이잇!
“헛!”
비선향주가 당황하며 얼른 검을 뿌렸다.
하지만 비량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더니 바로 옆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비선향주의 안면에 비량의 주먹이 냅다 꽂혔다.
콰앙!
“커억!”
쿠당탕탕!
그대로 튕겨 나간 비선향주가 바위를 부수며 나뒹굴었다.
비량이 손을 탁탁 털면서 목을 우두둑 꺾었다.
“그럼 오랜만에 후배 군기 좀 잡아볼까?”
* * *
남궁천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끌고 오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량이 흑의인 한 명을 거칠게 끌고 왔다.
당우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랍게도 비량의 손에 붙들린 자는 다름 아닌 비선향주가 아닌가?
어디선가 난전이라도 벌이다 온 것인지 비량의 전신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정말로 비선향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거잖아!’
당우기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비량과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뭐, 이런 괴물들이 다 있나?
괴물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아……! 혹시 아까 이대주에게 따로 내린 명령이 바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당우기는 해쓱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회의감이 든다.
과연 맹주는 이런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이 괴물 같은 자를?
당우기가 처음 맹주를 마주했을 때 느낀 생각은 까마득한 산과 같다는 것이었다.
한데 지금 남궁천을 보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존재감이 작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존재감이 너무 커서 가늠이 안 되는 지경이다.
남궁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향주를 잡으셨네요.”
“제일 먼저 노렸지. 비선향의 움직임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다른 향원들은 어떻게 됐어요?”
“대부분 자결을 하거나 중상을 입어서 흑무련에 넘겼어.”
비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당우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들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괴물들이다.
남궁천뿐만 아니라, 남궁천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도 전부 괴물들이다.
맹주는 이런 자들을 상대로 싸우고자 하는 건가? 아니, 맹주는 알기나 아는가? 자신이 누굴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맹주가 무림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천외천이라더니.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지 않은가?
남궁천은 맹주보다도 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 정말 남궁천이 당예설을 살릴 수 있긴 한 건가?
흑성칠주야독을 해독할 수 있나?
당우기는 내심 회의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남궁천이 류난에게 비선향주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 녀석을 데리고 좀 부탁할 게 있는데.”
류난이 빙그레 웃었다.
“부탁이라기엔 너무 당당하군.”
“그래도 되니까. 애초에 내 돈 떼어먹으려고 수작질을 한 게 누군데?”
“좋아, 말해보시게.”
류난이 두 손을 들자, 남궁천이 씨익 웃더니 전음으로 한참이나 말을 전했다.
잠시 후 류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신창이가 된 비선향주를 돌아보았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당우기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돌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맹주의 모든 안배가 눈앞에서 무너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침 안고 있던 당예설이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움찔거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다시 남궁천에게 소리쳤다.
“단주! 누님은? 누님은 정말 살릴 수 있소?”
그제야 남궁천이 다시 당우기에게 돌아왔다.
남궁천은 대답 대신 쪼그려 앉아서 당예설의 맥을 짚었다.
잠시 진맥을 한 남궁천이 당우기를 돌아보았다.
“너는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알, 알겠소.”
당우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한시가 급하니 나는 바로 어딘가로 가야겠어.”
“어, 어디로?”
“나도 몰라. 그게 어딜지는. 거리가 멀수록 네 누이를 살리기 어려워질 거야.”
“……?”
“천운이 따라서 거리가 가깝다면 그나마 살릴 확률이 올라가긴 하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확률이야.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닥치고 들어. 결과적으로 너 때문에 네 누이가 흑성칠주야독에 중독됐다.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내가 한 번 애써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은 멍청한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알겠어?”
“알, 알겠소.”
“어울리지도 않는 존대 따위는 집어치우고. 오히려 더 가식으로 보이니까 믿음이 안 가잖아.”
“미, 미안하다.”
당우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사과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 그런데 어디로 간단 거야? 네가 가는 곳에 해독제가 있는 거야?”
“그건 모르지. 다만 그러길 바랄 뿐.”
“그게 어딘데?”
“그건 추향응이 알려주겠지.”
“뭐……?”
당우기가 멍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사이, 남궁천이 몸을 일으키고는 품에서 자그마한 피리를 꺼내 불었다.
삐이익!
그러자 크고 푸른 매가 어느 순간 머리 위로 나타나더니 창공을 한 바퀴 돌았다.
남궁천이 당가를 떠날 때 받은 추향응이었다.
추향응은 만리향을 빠른 속도로 쫓아간다.
삐이이이!
한 차례 긴 울음을 터뜨린 추향응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면서 남궁천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푸드득!
남궁천이 추향응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는 작은 호리병 마개를 열어서 냄새를 맡게 했다.
다시 한번 날개를 퍼덕인 추향응이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듯 큰 소리로 울었다.
삐이이이익!
푸드드득!
추향응이 날아오르자 남궁천이 당우기를 다시 돌아보았다.
“앞으로 네가 할 일은 손 대주가 알려줄 거다.”
“어…… 그래. 누님은?”
“함께 가라. 어떻게든 기한 내에 다녀오도록 해볼 테니까.”
당우기가 다시 한번 바닥에 이마를 쿵 찧었다.
“이렇게 부탁한다! 꼭 누이를 늦지 않게 살려다오!”
“어휴, 그러게 왜 하필 흑성칠주야독을……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는데, 흑무련주 류난이 다가왔다.
“그럼 바로 떠나는 건가? 만나자마자 이별이군.”
“뭐, 오래 보며 웃고 떠들 사이는 아니잖아?”
“하하. 자네 말도 맞군.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약조한 시간이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네.”
남궁천이 이리저리 앉으면서 다리를 쭉쭉 늘리며 대꾸했다.
“알고 있으니까 잔소리할 시간에 돈이나 준비하라고. 또 괜한 수작질하면 그땐 나도 못 참아.”
“그러지.”
대충 몸을 푼 남궁천이 이번엔 품에서 흰색 단환을 꺼냈다.
예전에 진주언가에서 받았던 백령단 중 하나였다.
“이게 남아 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따악!
남궁천이 당우기의 머리를 차지게 후려치고는 노려보았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하필 흑성칠주야독을…… 어휴.”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만, 당우기는 그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손우곤이 다가왔다.
“주군,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기간 내에 오셔야 합니다.”
“그래, 저 녀석 잘 감시하고.”
남궁천이 당우기를 턱으로 가리키자,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환자 보호 잘하고.”
“예, 주군.”
“그럼 가볼게.”
남궁천이 말을 뱉고는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올렸다. 확실히 백령단을 복용하니 그러잖아도 빠르게 회전하는 공력이 훨씬 민첩해졌다.
창졸지간!
파아아앙!
한 줄기 바람처럼 남궁천의 신형이 날아갔다.
쉬이이이이잇!
그야말로 바람 같다.
나무며 바위며 풀잎들이 정신없이 남궁천을 지나쳤다.
순식간에 멀어진 남궁천을 보면서 당우기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남궁천! 부탁한다!’
* * *
추향응은 쉬지 않고 날았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남궁천도 쉬지 않고 달렸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너무 먼 곳에 있으면 안 되는데.”
추향응이 쫓는 것은 바로 천독노였다.
일전에 당가를 방문했을 때 남궁천이 천독노에게 만리향을 묻힌 것도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천독노는 쌍두오독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천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전생에 천독노가 남궁천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비단 천독노만의 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모든 독인들의 꿈.
그 어떠한 독도 해독할 수 있는 단환을 만드는 것.
‘그걸 위해서 쌍두오독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었지.’
천독노가 만능 해독제를 제조하는 데 성공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그저…….
‘이 괴짜 영감탱이가 사고를 쳤길 바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