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최후의 한 수
뭐가 잘못됐다.
잘못되어도 아주 심각하게 잘못됐다.
어째서 류난과 남궁천이 저렇듯 살갑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인가?
당황한 당우기가 둥그렇게 뜬 눈을 끔뻑이며 남궁천을 불렀다.
“단, 단주님……?”
하지만 남궁천은 당우기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태연히 류난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두 사람이 한참을 서서 대화를 나눴다.
이건 결코 그가 생각한 그림이 아니었다.
지금쯤 적랑단원과 흑무련 무인들이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고 있어야 했다.
처절하고 잔혹한 그림이 그려져야 했다. 물론 함정에 빠진 적랑단은 거의 전멸을 앞두고 있어야 했고.
그 와중에 자신은 정신없이 싸우는 남궁천을 엄호하는 척하면서 배후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남궁천을 처리하고 나면 비선향의 도움을 받아 이곳을 빠져나갈 계획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한데…….
이건 뭔가?
남궁천과 류난이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나란히 서서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단 말인가!
‘설마 이 사실을 누님도 알고 있었던 건가?’
반발심에 휙 돌아보니, 당예설조차도 놀란 눈치로 입을 척 벌리고 있었다.
비교적 태연한 사람은 손우곤과 견습생들뿐이었다.
당예설이 이내 피식 웃더니 당우기를 돌아보곤 혀를 내두른다.
“우기야. 네 단주. 정말 대단하지 않아? 도대체 어디까지 날 놀라게 할 셈인지.”
그 순수한 반응에 당우기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요?”
“응?”
“모름지기 명문 정파의 자제가 사파 나부랭이와 손을 잡고 이죽거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대단하단 말이오?”
“우기야……?”
당예설이 당황한 표정으로 부르는데도 당우기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남궁천만 노려볼 뿐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도대체 어떻게 흑무련주와 이런 작당을 한 거지? 어느 틈에?’
까드득.
어찌나 세게 어금니를 갈았는지 턱이 아플 지경이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분노와 살기가 너무나 강해서 당예설조차 무심결에 한 걸음 물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당우기는 모든 신경을 남궁천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이런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옆에 선 당예설이 심각한 상황임을 깨닫고는 당우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우기야! 왜 그래?”
탁!
순간 당우기가 당예설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앗!”
공력이 실린 손길이었기에 당예설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사이 당우기가 한 걸음 내디뎠다.
‘남궁천! 네놈이 맹주님의 장단에 놀아준 것이로구나! 하나 맹주님이 준비한 최후의 한 수는 흑무련 따위가 아니다! 바로 나, 당우기란 말이다!’
두 걸음째 내디디면서 입안에 품고 있던 가느다란 대롱을 앞니로 물었다.
마침 한 걸음 물러났던 당예설이 부리나케 뛰어들며 소리친다.
하나 이 모든 과정이 당우기에게는 시간이 늘어난 것처럼 느리게 보일 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혹감에 휩싸인 당예설이 자신을 가로막는 게 보였고, 그녀의 어깨 너머로 남궁천이 이쪽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주변 반응은?
모르겠다.
지금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겠지.
그나마 유일하게 자신의 행동을 눈치챈 자가 당예설이었다.
그녀는 지금 온몸을 던져 자신을 막고 있었다.
양팔을 쓰지 못하도록 어깨부터 감싸 안듯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자신이 비수나 암기를 날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독을 해도 손을 써야 할 테니 그렇게 행동했으리라.
하나 그녀는 틀렸다.
당우기는 독침을 쓸 작정이었다.
사천당가에서도 구하기 힘든 독침.
흑성칠주야독(黑星七晝夜毒)이다.
이 독에 당하면 곧바로 죽지 않는다.
독침에 당한 자는 그 순간 독한 모기에 물린 것처럼 살짝 따끔한 정도가 전부다.
이 독이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인지력에 따라 중독 증세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중독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몸이 빠르게 쇠약해지지만, 중독 사실을 모를 때는 생각보다 멀쩡하게 버티는 경우도 생긴다.
만약 예정대로 난전이 벌어진 상황이었다면, 남궁천은 자신의 중독 상황을 모른 채 죽기 살기로 싸웠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 운이 좋다면 흑무련을 섬멸한 후 잔뜩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무림맹까지 돌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느 쪽이든 칠 일 후에는 사망한다.
칠 일간 밤낮으로 몸에 검은 반점이 하나씩 생겨, 총 열네 개가 생기면 틀림없는 죽음에 이른다.
죽음만큼은 인지력과 상관없이 정해진 수순이다.
그 때문에 혹시라도 남궁천이 맹으로 귀환 후에 죽더라도 흑무련의 잔악한 독술에 당했다고 공표하면 그만이었다.
그야말로 맹주로서는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이었다.
해독제?
그딴 건 없다.
사천당가에서도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다.
과거 독신(毒神)이라 불리던 사파의 인물이 만든 것으로, 아직까지 해독제를 찾지 못했다.
오죽하면 흑성칠주야독을 현 무림의 만독지왕이라 부를까?
그런데 기대했던 난전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상관없다.
어차피 비선향이 어디선가 대기한 채로 자신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남궁천에게 이 독침을 쏘는 즉시 자신은 몸을 돌려 달아날 것이고, 비선향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리라.
‘남궁천! 내가 바로 최후의 한 수다!’
생각은 길었으나, 찰나의 순간이었다.
훅!
공력을 담아 가느다란 대롱을 불자, 독침이 허공을 가르며 남궁천에게 날아갔다.
어째서 중요한 순간은 이렇게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일까?
독침이 날아가는 모습마저 눈에 고스란히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남궁천이 이상한 낌새를 채고 벽라검을 재빨리 뽑아 드는 모습까지!
티잉!
‘막아……?’
놀랍게도 남궁천이 벽라검으로 독침을 튕겨냈다.
빌어먹게도 최후의 한 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날아갔던 독침이 그대로 튕기면서 자신의 목을 향해 쇄도하는 게 아닌가?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당우기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남을 죽이고자 할 때의 시간도 무척 느리게 흐르지만,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은 그보다 더 느리다는 것을.
“안 돼!”
이번에는 당예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박혀든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안 되긴 뭐가 안 된단 말이오?
어차피 누님은 눈엣가시 같던 내가 사라지면 좋은 일 아니겠소?
씨벌, 한 많은 세월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 알았더라면 조금은 더 의미 있게 살아볼 걸 그랬나?
아버지, 미안합니다.
나는…… 나는 맹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에게 나를 좀 더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데…… 죄송합니다.
죽음을 앞두니 지나간 모든 욕망이 부질없어진다. 후회보다는 의문이 든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굴었는지.
뭐, 자신이 잘못되어도 누이는 살아갈 수 있겠지.
툭!
어……?
당예설이 떠미는 힘에 균형을 잃은 당우기가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큿!”
당예설이 뒷목을 어루만지면서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누님……?”
당우기가 멍한 표정으로 당예설을 보았다.
당예설이 한 걸음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는 쓴웃음을 짓는다.
“바보 같은 녀석…….”
“누님……!”
“왜 이런 미련한 짓을…….”
비틀!
독을 인지한 당예설의 중독 반응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당우기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을 구한단 말인가?
소가주의 자리를 두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으면서! 왜 끝까지 혼자 착한 척인가!
당예설이 혈색 없는 얼굴로 중얼거린다.
“너란 녀석은…… 하여튼 손이 너무 많이 간다니까…….”
“누님!”
당예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 당우기가 바닥을 차고 날아가서 부축했다.
“누님! 정신 차리세요! 누니이임!”
“하아, 하아…….”
당예설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누이의 몸이 이렇게나 작았던가?
당우기는 자신의 팔에 안긴 당예설의 몸이 무척이나 작다고 느꼈다.
아직 칠 일간은 생존할 수 있을 테지만, 당예설은 당장에라도 꺼질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어어…… 누님? 누님이 왜 날……! 왜 나 대신에 누님이……! 도대체 이게 뭐요? 왜 이러셨소!”
당우기의 눈동자가 먹먹하게 젖어 들어갔다.
당예설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밉고 싫은 누이라도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던가?
그저…… 그저 자신의 힘으로 소가주가 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고, 가문을 이끌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결말이……!
당예설이 힘 빠진 눈으로 당우기를 본다.
“바보야. 넌 내…… 동생이잖아.”
“이런 바보 같은!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굴 보고 바보래! 이 바보야! 왜 날 구했냐고! 누가 구해달라고 했냐고! 각자의 길을 가자고 했잖아! 각자의 길을……! 크흑!”
당우기가 울부짖었다.
그로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당예설이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는 당우기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온정 어린 미소가 희미하게 걸린다.
“우기…… 꼬마 같네…… 예전처럼…….”
“누님…….”
“바보야. 동생이 위험할 때…… 누나의 길은 동생을 지키는 거야.”
“젠장! 젠장! 젠자아앙! 그런 게 어디 있어! 일어나! 내가 용납 안 해! 이대로 죽지 마! 치사하게 그러지 말라고!”
당우기가 고개를 꺾어 들고 절규하자, 마침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흐음.”
무겁게 흘러나오는 침음.
당예설이 눈을 슬며시 뜨고는 옆에 선 남궁천을 보았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설마…… 남궁천…… 처음부터 내게 설득하라고 한 건…… 이런 걸 염두에 둔 건가?”
“부정하진 않을게요. 제가 말했잖아요. 정말 결정적인 계기가 생긴다면 바뀔 수도 있다고.”
“독한…….”
당예설이 피식 웃었다.
동시에 그녀는 남궁천이 진짜 무서운 자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 저 어린 나이에 남매지간의 우애마저 이용하면서 전략을 짤까?
당예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거…… 기분 나쁜 독 같은데…… 나, 구할 수 있나?”
당우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어 들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이제 그는 자존심마저 다 버리고 남궁천에게 애원했다.
“남궁천! 누님을 구해다오! 내가 잘못했다! 날 처벌해도 좋으니, 제발 이 바보 같은 누님을 구해줘! 으흐흑! 제발!”
“무슨 독이냐?”
“그게…… 흑성칠주야독이다…….”
“이 미친…….”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흑성칠주야독이라니.
당예설이 이미 희망을 저버린 눈으로 묻는다.
“역시…… 불가능하겠지?”
“제가 무슨 신입니까?”
“하긴…….”
“뭐, 그래도…….”
“……?”
당예설과 당우기가 동시에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요.”
“그, 그게 정말이냐! 정말 누님을 살릴 수 있는 거야?”
당우기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정말이지 당예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였다.
남궁천이 그런 당우기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따악!
“이 미친놈. 누이에게 흑성칠주야독을 쓰는 새끼가 어디 있어?”
아니, 그건 너한테 쓴…….
뒤통수를 어루만지던 당우기가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쿵쿵 찧어대며 소리쳤다.
“단주! 부탁드립니다! 부디 누님을 살려주십시오!”
“내가 널 어찌 믿고?”
“어찌하면 믿겠습니까?”
당우기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