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최후의 한 수
울창한 숲.
끝없이 치솟은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렸다.
때문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어둑했다.
적랑단은 눈 쌓인 숲길을 밟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적랑단원들 옆에는 황의 제복을 갖춰 입은 사천당가 무인들이 나란히 따르고 있었다.
모두 백 명이었는데, 인솔자는 당예설이었다.
당예설은 저만치 앞서가는 남궁천을 한 번 보았고, 뒤따라오는 적랑단원들의 면면을 훑었다.
손우곤과 비량, 그리고 팽수혁을 비롯한 견습생들이 대주로서 대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는 당우기가 시종 벽돌 같은 표정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당예설이 당우기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잘 지냈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어떤 말을 할까?
소가주 자리를 빼앗아 간 년이라고 쌍욕을 할까? 아니면 원망서린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할까? 그도 아니면 아예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시하려나?
그런데 당우기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깼다.
“아, 누님. 난 잘 지내고 있어요. 임무 중이라 말을 걸지 않았던 거고요.”
의외로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당우기. 오히려 말을 건 당예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어? 아…… 그렇구나. 다행이야.”
“누님은 좀 어때요? 소가주 생활은 하실 만하고?”
“어…… 그래. 생각보다 일이 많더라고.”
“그렇지. 아버지가 좀 꼼꼼하셔야 말이지.”
당우기가 너털웃음을 흘린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예설은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모처럼 당우기가 어린 시절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 그러고 보니 넌 웃음이 많은 아이였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누이의 재능에 가려진 못난 소가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동생의 운명도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당우기의 모질지 않은 반응에 당예설은 조금 마음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단 축하한다고 해야겠지?”
“……?”
“아, 부단주가 된 것 말이야.”
“아…… 고마워요. 사천당가 소가주께 축하를 받으니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겠네.”
해맑게 대꾸하는 당우기의 표정에는 어떠한 그늘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계기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도 있는 걸까?
만약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필시 의심부터 하고 봤으리라.
하지만 당우기는 그녀의 유일한 친동생이었다. 이런 변화가 너무나 달갑다 보니 그대로 믿고만 싶어진다.
“우기야.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했어.”
“물론 처음에는 상처를 받았어요. 왜 하필 누님이냐고 원망도 했고. 왜 나는 누님의 천재적인 재능에 가려져서 평생을 그렇게 숙이고 살아야 하느냐고.”
“넌 그러지 않아도 돼. 나는 사실 너에게는 어떠한 불만도 없어. 다만…….”
“알고 있어요. 이제 나는 내 길을 가려고요. 그러니 누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누님의 앞길도 평탄하길 기도할 테니.”
“그래…….”
당예설이 멀뚱멀뚱 뜬 눈으로 대답했다.
너무나 정석 같은 대답에 뭐라 할 말이 없다. 갑자기 철부지 동생이 어른이라도 된 걸까?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당예설이 당우기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며시 물었다.
“단주는 좀 어떤 것 같아?”
“단주? 남궁천 단주 말이에요?”
“그래.”
당우기가 저만치 앞서가는 남궁천을 보았다. 이내 당우기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괴물 같은 사내예요. 처음엔 그 재능에 시기와 질투를 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이젠 인정하고 있습니다. 때론 말투가 거칠고 과격하지만, 생각보다 속내가 따뜻한 사람인 것도 같고. 내게 많은 깨달음과 뉘우침을 준 자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
“……단주를 존경하고 있어요.”
“아…….”
당예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당우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이런 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이 너무 달라졌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우기야.”
“듣고 있어요.”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뭘요?”
“그냥. 모든 것. 너의 운명, 너의 성격, 너의 재능, 너의 계획과 생각. 그 모든 것. 너무 애쓰지 말고 때론 흐르는 대로 두는 것도 방법일 때가 있어. 우주의 점 같은 인간이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야. 때론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필요가 있단다.”
“그래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죠.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고마워요. 누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매일같이 불안한 날들을 보냈을 거예요.”
“혹시…….”
“……?”
“……아니야.”
당예설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향해 세상 순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생에게 어찌 그런 말을 물어볼 수 있을까?
맹주에게 따로 지령을 받은 게 있느냐고? 맹주가 남궁천을 죽이라고 시키더냐고?
물어본다고 한들, 그래서 그런 적이 있다고 한들.
‘사실대로 말할 리가 없어.’
자신은 동생을 잘 안다.
동생의 저런 표정과 말투가 모두 거짓된 행동이라면,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당예설이 저만치 앞서가는 남궁천의 등을 가만히 보았다.
‘남궁천. 내가 정말 동생을 바꿀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 남궁천과 나눈 대화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동생을 회유하라고?”
“예. 당우기가 부단주로 온 것은 맹주의 꿍꿍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너무나 당연한 소리다.
맹주는 이미 동생을 이용해서 남궁천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남궁천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우기를 설득해 주세요. 괜히 멍청한 짓 못하도록.”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우린 서로를 미워한 기간이 너무 길었어…… 동생을 바꿀 수 있을까?”
“그래도 바꿔봐야죠. 가족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 녀석이 내 말 따위 들은 적이 있어야지.”
“그래도 여기서 그놈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누님밖에 없습니다.”
“흐음. 알겠어. 일단 말은 해볼게. 만약 내 말에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땐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
“그래도 정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결국 가족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으니까요.”
상념에서 빠져나온 당예설이 나란히 걷고 있는 당우기를 보았다.
당우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래, 여기서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야 한마디라도 더 해봐야 하지 않겠나?
“우기야.”
“네, 누님.”
“혹시라도 남궁천에게 서운한 게 있더라도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길 바란다. 정말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주 잠깐 당우기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 외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변화였다.
“섣부른 행동이라뇨? 누님도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하시네요. 난 이미 단주와 한배를 탄 상황이에요. 나는 과거를 지웠어요. 이제부터가 중요하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걱정하지 마세요, 누님. 난 이제 완전히 달라질 거니까요.”
“그래, 믿으마.”
“예, 누님. 절 믿으셔도 좋습니다.”
당우기가 전에 없이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아주 어린 시절 곧잘 자신을 따르던 당우기의 앳된 얼굴이 겹쳐졌다.
‘부디 너의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 * *
수풀 너머로 저만치 아래에 산채가 보였다.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산채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남궁천이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자, 꿈틀거리던 적랑단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는 기척을 숨겼다.
적을 일망타진할 완벽한 기회.
당예설 역시 몸을 최대한 낮게 숙이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궁천이 당예설과 당우기에게 나직이 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움직이면서 유사시에 절 엄호하도록 합니다.”
“알겠어.”
“알겠습니다, 단주.”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량을 돌아보았다.
“이 대주는 아까 말한 것을 처리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비량 역시 깍듯하게 대답했다.
당예설과 당우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로서는 남궁천이 비량에게 무엇을 지시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어쨌거나 이젠 거사가 코앞이었다.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남궁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갑니다!”
타앗!
순간 남궁천이 빛살처럼 쏘아지듯 달려 나갔다.
타타앗!
그 뒤를 이어 당우기와 당예설이 내달렸다.
순식간에 목책까지 다다른 남궁천이 몸을 훌쩍 날려서는 경계를 뛰어넘었다.
착!
“엇! 누구……!”
푹!
“커억!”
빠르게 달려온 남궁천이 그대로 번을 서던 무인의 목에 추혈검을 박아 넣었다.
마침 인근에 있던 다른 무인들이 남궁천을 발견하고는 피리를 입에 무는 순간!
쉭, 쉬이익!
푸푹!
당우기와 당예설이 날린 비수가 그대로 목에 틀어박히면서 맥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남궁천을 비롯한 세 사람은 빠르게 무인들을 처리해 나갔다.
어느 정도 경계를 허물고 나자 남궁천이 당우기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당우기가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 던져 올렸다.
삐이익, 파앙!
어둠 속에서 신호탄이 터지자, 곧 함성과 함께 적랑단과 사천당가 무인들이 폭포수처럼 우르르 쏟아졌다.
“우와아아아!”
“죽어라! 이 사파 나부랭이들아앗!”
순식간에 목책을 뛰어넘은 무인들이 밀물처럼 산채를 휩쓸어갔다.
횃불이 넘어가고 기름칠한 짚단이 불에 타오르면서 천중산 중턱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어디냐! 이놈들!”
“나와랏!”
“네놈들을 죽여줄 저승사자가 왔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여기저기에서 적랑단원들과 사천당가 무인들이 고함을 내지른다.
한데 이상할 정도의 고요함.
마침 각 조장들이 당황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 없습니다!”
“산채가 비었습니다!”
“젠장,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무인들이 우왕좌왕하자, 팽수혁이 얼른 목청껏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정비해라!”
“집합!”
대주들의 명령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단원들이 일제히 산채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당예설이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정보가 샌 것 같아. 함정이야.”
남궁천이 반사적으로 당우기를 돌아보았다.
“부단주. 아는 것 없나?”
“설마 절 의심하는 겁니까?”
당우기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궁천이 그런 당우기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가 그럴 필요가 없지. 어차피 한배를 탄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저도 위험할 짓을 왜 하겠습니까?”
“알겠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물론 그 직후, 고개 숙인 당우기의 입매는 길쭉하게 찢어졌다.
‘병신, 너는 이제 뒈졌어!’
당우기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마침 이글거리는 불길 사이로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류난을 비롯한 흑무련 무인들이었다.
당우기의 눈이 광기로 희번덕였다.
‘드디어 마무리 단계구나!’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당우기가 눈알을 굴려 당예설을 힐끔 보았다. 당혹감에 휩싸인 그녀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당우기가 내심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누님. 그래도 피를 나눈 남매인데 설마 누님까지 죽도록 내버려 두겠소? 내, 누님까지는 구해 드리지!’
이곳에 당예설이 지원 온 것은 조금 의외이긴 했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될 거다.
뭐?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그게 날 위해서라고?
천만에!
애초에 허튼짓은 아버지와 누이가 하지 않았던가?
감히 맹주를 상대로 싸우려고 들다니!
맹주는 강호의 하늘이고, 강호 그 자체다.
사천당가가 사천 지역에서 제일을 논한다지만, 무림맹과 척을 지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이러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가문을 위해서다.
그렇다.
맹주를 저버리고는 이 강호에서 살아갈 수 없다.
남궁천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처럼.
아버지와 누님은 줄을 잘못 섰다.
맹주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한낱 저런 애송이 녀석과 손을 잡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아버지와 누님은 결국 내게 감사 인사를 하게 될 거요.’
마침내 류난이 남궁천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류난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남궁천, 이만하면 그럴듯했나?”
“뭐, 나쁘지 않네요.”
“이걸로 정말 맹주를 끝낼 수 있단 거지?”
“돈이나 준비하시라고요.”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광기 서린 미소를 짓던 당우기가 이맛살을 팍 구겼다.
‘뭐야?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