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 최후의 한 수
“왠지 불안해 보이네요. 혹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백묘의 말에 총관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맹주님은 늘 철두철미한 분이시지. 이번만큼은 맹주님도 단단히 벼르고 계시네. 남궁천이 천중산에서 살아 돌아올 확률은 매우 희박해.”
“호호. 희박하다는 건 결국 가능성이 있긴 하단 거군요?”
백묘가 정곡을 찌르자 총관이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백묘에게 향해 있었지만, 마음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가능성이라. 정말 남궁천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만약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맹주가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그 간계에서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이러한 내용을 다 알고 떠난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한데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가?
백묘의 말이 맞다.
자신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
애써 부인하고 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백묘가 다시 한번 총관의 속내를 짚어냈다.
“표정이 어두워요, 적서.”
“흐음.”
총관이 침음을 흘리자, 눈살을 여미고 바라보던 황랑이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하길래 똥이라도 씹은 표정인 게야?”
“모르겠소.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만 남궁천은 뭔가 다르오. 남궁천을 보고 있으면 마치…….”
진천랑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려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샌가 자신도 맹주처럼 말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 강해진 진천랑 같다고 해야 할까?
황랑이 피식 실소를 터뜨리더니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다르긴 개뿔. 진짜 달라진 사람은 남궁천이 아니라 맹주겠지. 킬킬.”
“그게 무슨 소리요?”
총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황랑이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어갔다.
“왜 모른 척을 하시나? 이미 맹주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맹주님이 제정신이 아니라니?”
“맹에 갇혀서 지내느라 지금 세상 분위기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킬킬. 자네 눈에는 맹주가 정상으로 보이는가?”
황랑이 곧장 대답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자, 이맛살을 구긴 총관이 백묘를 돌아보았다.
백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세간에는 지금 맹주가 노망났다는 소리가 돌고 있어요.”
“노망이라니!”
“클클. 발끈하시긴. 우리 총관께서는 아주 맹주에 대한 지극정성이 하늘도 감동시킬 정도라니까.”
“맹주님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신은 온전하오. 다만 최근 남궁천 때문에 다소 과민한 상태일 뿐이오.”
“진천랑이 환생했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듣고도 그리 믿어준다니. 역시 총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건……!”
“게다가 뭐? 진천랑이 마공을 썼다는 말도 한다던데? 본 교가 진천랑에게 이혼대법을 걸었던 적이 있던가? 킬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 교의 대법이라는 게 아주 엄청난 술법이 되었군. 거기에 헤프기까지 하고 말이야.”
“…….”
“그만 빈정거려요, 황랑.”
백묘가 나서서 말리자, 그제야 황랑이 입을 다물고는 코웃음을 쳤다.
백묘가 총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튼 맹주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걸로 알게요.”
“그래, 그건 내가 보장하지.”
총관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가만!”
문득 황랑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나직이 소리쳤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총관이 움찔거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황랑과 백묘가 서로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황랑이 돌연 바닥을 차더니 부서진 창문을 완전히 박살 내며 밖으로 날아갔다.
“거기 누구냣!”
뒤를 이어 백묘의 부채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취리리리릿!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솟구친 부채가 지붕 위의 누군가를 베어내고는 다시 백묘에게 돌아갔다.
어깨를 베인 흑의 복면인이 혀를 차고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황랑이 바짝 따라붙었다.
“서랏!”
황랑이 지붕을 차자 낡은 기왓장이 부서지며 튕겨 날아갔다.
카차차창!
졸지에 추격전이 시작됐다.
흑의인의 경공은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백묘가 날린 부채에 어깨 부상을 입은 탓에 전속력을 낼 수는 없는 듯했다.
만약 백묘의 부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황랑을 따돌렸을 만큼 빠른 자였다.
“노오옴!”
황랑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소매에서 비수 몇 자락을 날렸다.
쉬쉬쉭!
파라라라!
파파팡!
허공으로 솟구친 흑의인이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하자 날아들던 비수가 모조리 튕겨 나갔다.
전각 사이를 뛰어넘으며 달리던 흑의인은 더 이상 건너갈 전각이 없어지자 그대로 길 아래로 뛰어내렸다.
‘옳거니, 잘됐구나!’
황랑이 내심 쾌재를 부르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본디 경공이 뛰어난 자를 쫓을 때는 장애물이 없는 편이 훨씬 유리하기에.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황랑이 다시 한번 고함을 내지르며 비수 세 자루를 연이어 던졌다.
쒸쒸쒸에엑!
이제 막 숲으로 뛰어들던 흑의인이 몸을 숙이며 먼저 날아든 비수 한 자루를 피했다.
콰직!
빗나간 비수가 옆의 나무에 처박혔다.
콰앙!
뒤이어 날아든 비수를 피하니 이번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아예 터져 나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크읏!”
마지막으로 날아든 비수는 급기야 흑의인의 허벅지를 베어내고는 바위에 처박혔다.
콰앙!
투타타타타!
조각난 바위 파편이 흑의인을 그대로 덮쳤다.
“크윽!”
쿠당탕!
결국은 흑의인이 파편에 맞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휘리릭, 착!
부서진 바위에 착지한 황랑이 바로 옆에 엎어져 있는 흑의인을 내려다보았다.
“쥐새끼 같은 놈. 낯짝이나 보자꾸나.”
황랑이 흑의인에게 얼른 다가가서 어깨를 잡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이게 무슨 냄새……!”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황랑이 냅다 흑의인을 던지듯 부려두고는 몸을 날렸다.
파바밧!
콰아앙!
순간 흑의인의 전신이 터져 나가면서 사방으로 인육 파편이 비산했다.
동시에 녹빛 독무가 주변을 빠르게 덮쳐갔다.
파스스스스.
주변의 식물들이 앓는 소리를 내듯 시들어갔다.
삽시간에 흑의인이 있던 자리 근방이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멀찌감치 달아났던 황랑이 나뭇가지에 올라서서는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이런 지독한…….”
그가 씹어뱉듯 중얼거리는데, 마침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황랑이 있는 곳으로 백묘가 빠르게 내려섰다.
“놈은?”
“보면 모르겠느냐?”
황랑이 까탈스러운 목소리로 턱짓을 했다.
백묘가 시선을 돌리니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독무와 잔뜩 시들어서 썩어가는 식물들이 보였다.
“폭멸고독이군요.”
“지독한 새끼들이야.”
“얼굴은 봤어요?”
“못 봤다.”
“아쉽네요.”
“아쉽긴 개뿔. 폭멸고독을 쓰는 새끼들이야 뻔한 것 아니냐?”
“흑무련?”
“그래. 또 누가 있어?”
“누구라도 쓸 수는 있죠.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내 살면서 이렇게 폭멸고독을 남발하는 새끼들은 흑무련 말고 보질 못했어!”
“아무튼 알겠어요. 그나마 잡아 죽였으니 된 거죠, 뭐. 수고했어요.”
“하여튼 뒤치다꺼리는 전부 내 몫이라니까.”
“이거 왜 이래요? 나도 거들었잖아요.”
백묘가 부채를 활짝 펼치고는 살랑살랑 흔들자, 흑의인의 피가 묻어서인지 혈향이 풍겼다.
황랑이 혀를 차며 버럭 소리쳤다.
“추워, 이년아!”
* * *
무한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객잔.
무인 세 명이 둥근 탁자에 모여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죽립을 푹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먼저 선풍도골의 풍채를 지닌 두 사람이 있었고, 보다 체구가 왜소하여 남성은 아닐 것으로 보이는 자가 한 명이었다.
이 세 사람은 말없이 차만 음미하고 있었기에 언뜻 이상한 분위기로 보일 만도 했지만, 워낙 외진 곳이어서 그들을 수상하게 여길 숙객이나 길손도 보이지 않았다.
“흠. 늦군요.”
마침내 가장 먼저 입을 연 자는 체구가 왜소한 자였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노파였는데, 어딘지 모를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였다.
그러자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그르칠 일은 없을 테니.”
“옳은 말씀이오. 소식이 늦을수록 좋은 소식일 가능성이 높소.”
묵직한 음성을 꺼낸 자가 죽립을 슬쩍 들어 올렸다. 유난히 짙고 긴 눈썹이 인상적인 자였다.
그렇게 얼마나 더 말없이 차만 마셨을까?
잠시 후 흑의 경장을 갖춰 입은 무인이 날랜 속도로 다가와 짙은 눈썹의 무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장문인, 청응(靑鷹)이 죽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된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무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다른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청응이 죽었소.”
“과연. 마교 놈들을 무시할 순 없군요. 귀파의 비응(祕鷹)이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라니.”
죽립을 쓴 노파의 말에 장문인이 피식 웃었다.
“뭐, 그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소?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하긴. 하면 그들이 폭멸고독도 알아봤겠군요.”
“그럴 거요.”
그러자 수염이 긴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앞으로 어찌 흘러갈지 기대가 되는구려. 우린 그저 장문인만 믿겠소.”
“허허, 빈도에게 너무 부담을 주시는구려. 빈도도 그저 일개 도사일 뿐이외다.”
“허허. 누가 무림칠성 중 한 명을 일개 도사로만 보겠소이까? 겸손이 지나치시구려.”
“거 낯 뜨거운 소리를.”
장문인이 싫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빛을 번득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강호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소. 슬슬 묵 맹주의 체제가 무너질 기미를 보이는 지금, 우리도 조금씩 준비를 해둬야겠지.”
“옳은 말씀입니다.”
“지당한 말씀이에요.”
세 사람이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 * *
천중산 인근의 낡은 사당.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사당 안마당을 훑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남궁천의 신형이 안마당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왔어?”
사당 안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당예설이 밖으로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내셨죠?”
남궁천이 싱긋 웃으며 묻는 말에 당예설이 어깨를 으쓱였다.
“보다시피. 그나저나 생각은 해봤어?”
“뭘요?”
“당 가주가 되는 것.”
“이미 소가주가 되셔놓고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그땐 내가 반항심으로 널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하면?”
“난 그냥 너 자체가 마음에 들어.”
당예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남궁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물러났다.
“농담도 지나치면 실례라고요.”
“농담 아닌데.”
“아무튼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에요. 조만간 일이 벌어질 겁니다.”
“흑무련을 섬멸한다는 거지?”
“아뇨. 그건 나중입니다.”
“그럼?”
“맹주를 제거할 겁니다.”
“……!”
“이젠 때가 되어서요. 모든 조건이 갖춰진 것 같거든요.”
“자신은 있고?”
“네. 그런데 지금 맹주가 부단주를 시켜 절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부단주가 누군데?”
“당우기입니다.”
“……!”
시종 여유로워 보이던 당예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